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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찬 Sep 17. 2022

시를 쓰는 마음, 시의 마음

박성우, 「옛일」 「나흘 폭설」 (『자두나무 정류장』(창비) 중에서)

1.


옛일



한때 나는, 내가 살던 강마을 언덕에

별정우체국을 내고 싶은 마음 간절했으나


개살구 익는 강가의 아침 안개와

미루나무가 쓸어내린 초저녁 풋별 냄새와

싸락눈이 싸락싸락 치고 차는 긴 밤,


넣을 봉투를 구할 재간이 없어 그만둔 적이 있다




벌써 5년쯤 지난 여름, 엄마가 보험을  보험설계사 아주머니가 집에 책을 몇 권 선물해주셨다. 그중 시집이 두 권 있었다. '시집'의 세계 자체가 낯설었던 내게 그 두 권은 꽤 우연하고 적절한 시작이 되어주었다. 그중 한 권이 위 시가 실린 박성우 시인의 『자두나무 정류장』이었다. 생생하고 어렵지 않은 언어로 쓰인 박성우의 시들은 시가 쉽게 읽힌다고 해서 그 깊이가 덜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훌륭한 예시로 내게 여전히 남아있다.


얼마 전부터 시에 관한 이런저런 글을 (쫌!!) 부담 없이 끄적여보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때 처음 생각난 시가 바로 「옛일」이었다. 박성우 시집을 읽은 후 5년이나 지났지만 지금도 나는 시가 어렵다.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쉬울 리 만무한 것처럼. 그래도 시집을 읽으려 하고 시를 써보기도 한다. 「옛일」에서 시인은 한때 '별정우체국'을 내려했지만, '강마을 언덕'의 여러 정경을 담을 봉투를 구할 수 없어 그만두었다 말한다. 하지만 그는 그 마음을 시로 썼고, 별정우체국 대신 『자두나무 정류장』을 냈다.


이 시의 마음은 시를 쓰는 마음과 시집을 읽는 마음을 닮았다. 내게 다가온 풍경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는 겸손한 자각 아래서 그것을 넣을 봉투를 만드는 마음. 「옛일」은 이야기를 쓰는 것에 실패한 아주 뭉클한 이야기다. 또한 그럼에도 그 이야기를 담아 부쳐낸 하나의 봉투다. 모든 말이 그렇듯, 모든 시는 실패의 흔적일 테다. 그렇다면 시인이란 그 실패를 돌돌 말며 길을 나서는 배달부. 그런 상상을 하면 독자가 하나의 시와 만나는 일이 빨간 실 이야기처럼 필연으로 느껴진다. 시집을 읽으며 각각의 시를 만날 때마다 우리는 우체국에서 보낸 편지를 정확하게 수신 받는 셈이다. ( 여전히 이런 촌스러운 비유가 좋다.) 별정우체국을 볼 수는 없지만, 별정우체국을 분명 존재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시, 시집이다. (시집 제목이 별정우체국이었어도 좋았겠다!)






2.


나흘 폭설



폭설이다

버스는 나흘째 오지 않고

자두나무 정류장에 나온 이는 자두나무뿐이다


산마을은 발 동동거릴 일 없이 느긋하다


(중략)


아까 낸 눈길조차 금시 지워지는 마당,

동치미 국물을 마시다 쓸고 치직거리는

라디오를 물리게 듣다가 쓴다 이따금

눈보라도 몰려와 한바탕씩 거들고 간다


한시도 쉬지 않고 눈을 쓸어대던

싸리나무와 조릿대와 조무래기 뽕나무는

되레 눈썹머리까지 폭설을 당겨 덮고 누웠다


하얀 어둠도 눈발 따라 푹푹 쌓이는 저녁

이번엔 내가 먼저, 긴긴 폭설 밤을 산마을에 가둔다

흰 무채처럼 쏟아지는 찬 외로움도 예외일 순 없다




나흘째 산마을에 폭설이 내린다. 버스조차 오지 않는 산마을에서, 화자는 마당을 치우고 동치미 국물을 마시고 라디오를 듣는다. 그리고 시를 쓴다. 시를 쓰는 것이 앞선 행동과 다를 것이 있을까. 라디오를 듣다 지쳐 시간을 보내기 위한 손쉬운 방편일지도 모른다. 혹은 시인에게는 이 역시 손을 쓰는 노동의 행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인이 시를 쓰기 시작하자, 시 안의 세계가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눈을 쓸어대던' 나무 빗자루들이 '폭설을 당겨 덮고' 눕는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마당을 쓸던 화자가 지금은 시를 쓰고 있기 때문이지만, 나무들이 직접 '누웠다' 말하는 의인화된 표현은 그들이 이 시 세계에 잠시 순응해준다는 인상을 부른다. 그러다 아름다운 마지막 연에 이르러 시인은 '내가 먼저, 긴긴 폭설 밤을 산마을에 가둔다'라고 쓴다. 시를 쓰는 자기 앞에서 잠자리에  나무들을 보던 시인이, 기꺼운 용기라도 받았는지 시 세계를 과감하게 넓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를 끝까지 읽고 나면, 이게 단순히 나흘 폭설의 일상을 묘사하는 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이 시는 나흘 폭설이 어떻게 하나의 시가 되는지, 나흘 폭설에 갇히며 시작했던 시가 반대로 나흘 폭설을 어떻게 시 안에 가두는지를 보여주는 시다. 그것은 시 쓰기와 시 시계가 서로 주고 받는 교감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나흘 폭설은 「나흘 폭설」이 된다. 나흘간 내리는 폭설이 「」 홑낫표 두 개의 봉투 안에 담긴다.


나는 이 묘한 시 앞에서 '쓰기'의 원초적인 위로를 발견한다. 마지막 행에서 시인은 '쏟아지는 찬 외로움'까지도, '예외일 순 없다'는 단정적인 어조를 쓰며 시 안에 가둔다. 하지만 이는, 내내 지독하게 마음을 파고들었을 약한 감정이 어느새 시가 되어 눈처럼 가라앉았을 거라 생각하도록 만든다. 춥고 쓸쓸한 어느 폭설의 하루가 이상하게 소중해지는 순간이다.


그런데 그 과정을 한 번만 다시 짚어볼 필요가 있다. 바로 위 위 연으로 돌아가 보자. 여기서 시를 '눈보라가 몰려와 한바탕씩 거들고' 갈 때가 바로 폭설이 시와 공명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곧이어 빗자루들이 눈을 이불처럼 덮는다. 중요한 것은 이 표현들이 의지가 아니라 묘사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화자가 시를 쓰지 않았다면 관찰하지 못했을 풍경이다. 내게는 이 부분이 우리가 시를 쓰기 시작할 때 저절로 에게 감응하는 주변의 모습으로 느껴진다. 그렇게 풍경은 시가 되고, 시는 풍경에 덩그러니 쌓인 정서를 골라 담아 주머니에 넣는다. 시를 쓰는 마음에 이은 시(가 되는 풍경)의 마음이랄까. 시를 쓸 때 풍경이 내게 다정해지는 것. 그럴 때면 시에게도, 풍경에게도 고마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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