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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인 Nov 17. 2020

뉴질랜드에서의 마지막 긴 산행

* Day 30-33 / 20201023-1026

@Tongariro National Park




#Day 1 (Whakapapa Village to Waihohonu Hut, 15.4km, 5시간 45분)


왜 사람들이 통가리로에 하루치기 알파인 크로싱을 만들어놨는지 이해가 되는 하루였다. 정작 오르려고 하는 산을 옆에 끼고 주변을 빙빙 도는 이상한 코스다. 산을 보고 걷는 건 좋은데 나같이 주의 집중 산만한 사람에게는 여간 마음 졸이게 하는 코스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가는 길이 마치 광야처럼 마른풀들로 둘러 싸인 황량한 대지뿐이라서 계속 히피 트랙과 비교되고 지루하기만 했다. 그렇게 6시간 정도 걷고 만난 산장은 마치 펜션 같이 생겼는데 밖에서 텐트 치고 자는 게 억울할 정도로 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고 무엇보다 들어서자마자 온기가 가득했다. 산장을 관리하는 분도 젊은 여자분이셨는데 마치 오리엔테이션처럼 우리에게 날씨와 내일 가는 길, 산장 이용 규칙을 안내해 주었다. 오늘 처음 해 보는 거라고 하면서 마오리어로 환영 인사도 해 주었다. 너무 지친 상태로 걷기만 해서 내일은 조금 더 신나게 걷고 싶은데 내 몸이 잘 따라 줄지 모르겠다.


짜증만 내다가 사진 찍을 때 겨우 내보인 웃음
그런 나를 묵묵히 기다려 준 남편
분명 우린 저 산으로 가고 있는데, 왜 이렇게 빙빙 도는 기분이 들지? (지극히 한국 등산 모드로서의 생각)
걷고, 걷고 또 걸었다.
메마른 광야에서도 꽃은 핀다.


#Day 2 (Waihohonu Hut to Oturere Hut, 8.1km, 3시간 15분)


“Nice walk?” “No!” 오 테레레 산장에 도착하자마자 어제도 활짝 웃어주신 분이 텐트를 치며 물으셨을 때 나는 망설이지 않고 “아니”라고 대답했다. 어제와 달리 좀 더 활력 있게 걷고 싶었는데 오늘도 너무 힘들기만 했다. 같이 걷는 오빠의 조그만 말에도 짜증이 솟아오르면서 결국 나는 침묵 등산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치 내 내면을 수양하는 시간처럼. 곧 만나게 될 일본인 친구가 통가리로 알파인 횡단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었다. 그 친구와 소통하던 중에 오빠는 뉴질랜드에서의 마지막 산인만큼 횡단이 아닌 '완주'하고 싶다고 했다. 결국 그 친구와 함께 하지 못하고 우리 둘이 산을 오르게 되었다. 그런 오빠의 결정이 원망스러워지는 어제와 오늘이었다. 내 몸도 마음도 잘 따라와 주지 않는 이번 산행은 옆에 남편이 있어도 버겁게 느껴졌다. 도착해서 폭포가 보이는 가장 완벽한 자리에 텐트를 설치했지만, 내 마음도 그리고 옆에서 나를 받아주고 있는 오빠의 마음도 편치 않은 이틀 밤을 보내고 있다.

좋아요! 돌
갑자기 비는 오고, 배는 고파서 꺼내 먹은 칼로리바
두 번째 날 우리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뷰에서 텐트를 치고 잤다.
그러나 너무 힘들었던 나는 마치 유배지에 온 것처럼 표정이 좋지 않다. (제발 확대 안 해주길 바란다.)
남편과 두런두런 속 이야기 나누며 둘째 날도 마무으리.




#Day 3 (Oturere Hut to Mangapopo Hut, 12.3km, 5시간 10분)


이번 트랙의 하이라이트를 걸었다. 이틀 동안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이 풍경을 보려고 여기까지 걸었구나. 활화산을 걷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막막한 광야 트랙이었지만 오늘은 내가 활화산 한가운데에 있다는 게 눈으로 증명되었다. 화산 지면의 열과 눈이 녹아 만들어진 강 틈으로 연기가 나오고, 그 연기 냄새가 가득 퍼진 트랙을 온종일 걸었다. 그 하이라이트 코스에서 많은 관광객들을 만났는데 지금은 국경이 닫혀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하루 500명 넘게 다녀 간다고 같이 등산했던 키위 청년이 말해주었다. 그 사람들의 가벼운 등산 차림이 약간은 부러웠지만 완주 코스를 달리고 있는 우리가 내심 자랑스럽기도 했다. 뭐랄까, 자연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그 아름다움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하이라이트 지점부터 안개가 자욱하게 끼더니 눈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늘 목적지 산장에 도착하기까지 4시간을 더 걸어야 하는데 비는 멈추지 않았고, 그 와중에도 눈 앞에 풍경에 집중한 많은 관광객들 사이에서 우리도 이 순간을 그냥 즐겨버리기로 했다. 우비를 꺼내지도 않고 등산가방 방수커버만 뒤집어 씌우고 미친 듯이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그 순간 , 그저께 그리고 어제 참 좋은 날씨를 허락받았구나. 이제야 감사하게 되었다. 둘째 날 남편이 했던 말이 있다. 사람들이 왜 사서 고생하냐고 물어보면 남편은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기 위해서요”라고 대답할 거란다. 하물며 잘 걸을 수 있는 적당한 온도와 바람의 날씨까지도 감사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걸었나 보다.


걷기 전 속도 따듯하게 채우고, 장거리 산행에 대비해 가방끈도 조절해야 한다.
오늘은 어떤 길을 걷게 될까? (오늘은 제발 재밌게 걷자!)
정말 광대하다, 자연의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주는 통가리로 국립 공원
마치 백두산 천지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급변해버린 날씨. 비바람의 강타로 속도를 내서 뛰듯이 걸었다.
무사히 산장에 도착한 자들. 젖어서 불어버린 몸을 녹일 틈도 없이 텐트를 치고 다음 날을 위해 빨리 자야 했다.


#Day 4 (Mangapopo Hut to Whakapapa Village, 9.4km, 4시간)

@ 숙소 Parklands Motorlodge


어제 비바람에 홀딱 젖은 옷이 다 마르지 않았다. 가방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젖은 옷을 잘 싸매어 넣고, 다 마르지 않은 등산화에 엊그제 신었던 양말을 신고 걸어야 한다는 게 개운치 않았던 아침이다. 오늘은 마지막 날이기도 했고, 어서 빨리 씻고 싶어서 일찍 하산하기로 했다. 오빠는 내려가는 길에 산에게 더 사랑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나도 미안했다. 산을 사랑해주지 못한 것보다 이 트랙을 걸으면서 함께 했던 사람을 더 사랑하지 않았음에 남편에게 미안했다. 이 산은 돌아가는 길 역시 만만하지 않았다. 어제 비가 와서 진흙이 꽤 미끄러웠고 계단처럼 높이가 있어서 허벅지 근육을 많이 써야 했다. 4시간 만에 처음 시작했던 지점으로 다시 돌아왔다. 아니, 3일 밤이 지나고 돌아왔구나! 고생했다, 우리! 내일 타우포 일정을 위해 가는 길목에 있는 캠프장에 왔는데 캠핑카가 우리밖에 없어서 이 좋은 시설을 우리가 독차지했다! 아직 젖은 빨래들을 해에 말리고 샤워도 하고 맛있는 양고기에 영화까지 본 우리. 제대로 쉬고 있다. :-)


마지막 산장, 비록 우린 야외 캠프장에서 텐트를 치고 잤지만 산장 사진을 남겨 보고 싶었다.
이 사진을 마지막으로 전 날 물에 같이 젖어버린 카메라는 긴 잠에 빠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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