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이튿날, 출근하자마자 직원들이 일하고 있는 자리로 가서 일일이 악수를 청했다.
"저를 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훌륭한 지회로 만들어 가겠습니다"
한 사람씩 얼굴을 쳐다보며 감사의 말을 전하니 새로운 역할에 대한 기대와 설렘, 책임감과 부담감 같은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교차했다.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가서 일하고 있으니 전임 위원장이 나를 찾아왔다. 회사생활 35년, 6년 동안 위원장으로서 우리 지사를 위해 봉사하고 이번 달에 퇴직하시는 선배님이시다. 그는 미소 가득 머금은 표정으로 내 양복 왼쪽 옷깃에 배지를 달아 주었다. 노란색 얼굴과 파란색 얼굴이 마주 보는 모양의 배지다. 두 얼굴은 노와 사를 상징하고, 마주 보고 있다는 것은 서로 협력하고 소통하라는 뜻이리라. 그는 배지를 달아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 배지는 참 무거운 거야"
"아.. 그렇죠. 어깨가 무겁습니다!"
배지를 달고 나서 선배님의 말씀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 세웠다. 퇴직하시기 전에 한 가지라도 더 여쭈어 그의 지혜를 가까이서 배워 두고 싶은데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경구가 떠올랐다. 그동안 노동조합 일에는 약간 거리를 두고 바라보고 있었다면 지금은 조합원과 간부 직원들 앞에서 나의 소신과 의견을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위치로 바뀌었다.
늘 좋은 게 좋은 거란 마인드를 가진, 유들유들한 성격으로 살았는데 앞으론 상황이 다르다. 나 혼자만 오케이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조합원 전체의 이익을 생각해야 한다. 생각을 깊게 하고 조합간부들의 의견을 구해 판단을 잘 내리는 것이 내 임무다.
배지의 무게가 가볍지 않지만 이제 막 출발인 만큼 두려움, 부담감보다는 열정이 솟아난다. 나 스스로 선택한 길이기에 어쩌면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지금의 이 열정을 잘 이용해서 조합원들에게 봉사하고 나의 자아도 성장시켜 나가고 싶다.
누군가의 기대를 받는 상황에서 일을 잘 처리해서 '수고했다. 잘했다.'라는 말을 듣는 건 나의 오랜 숙제였다. 학창 시절 교사이셨던 아버지께 난 늘 칭찬에 목말라있었고 취업해서는 일 잘해서 성과를 내고 눈에 띄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성과를 내는 사람보다는 그저 누구나 편하게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누가 요청을 하면 거절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니 거절을 못했다. 능력이 안 되어도 알았다고, 함께 연구하고 해결해 보자고 말했다. 그러면 내 능력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을 통해서든 일은 어떤 식으로든 풀리기 마련이었다.
'함께 해요'라는 문구를 선거 캠페인 슬로건으로 했었다. 나를 지지해 준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 의논해서 일하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혼자 모든 걸 감당하기보다 옆 사람과 함께 하면 배지의 무게가 내 어깨를 짓누르는 일도 없을 것이다. 배지가 무겁다고 말씀하신 선배님의 말씀을 잊지 않되, 배지의 무게를 즐기며 잘 감당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