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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DITOR Jul 03. 2017

쓰고 싶은 대로 쓰겠다는 다짐이 만들어낸 이야기

<언제 들어도 좋은 말> <보통의 존재>의 저자 이석원


심호흡

2015년 9월, <보통의 존재>로 롱런하는 에세이스트에 이름을 올린 이석원의 새 책이 나왔다. <보통의 존재>가 나온 지 무려 6년 만에 나온 산문집.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이라는 따뜻한 느낌을 주는 제목을 지닌 이 책에는 '이석원 이야기 산문집'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냥 산문집도 아니고 이야기 산문집이라니, 결정적 단서를 찾는 탐정이 된 듯 책을 요리조리 훑어보며 인터뷰 후보 리스트에 올렸다.


<보통의 존재>를 1시간 30분 걸리는 퇴근길 동안 흠뻑 빠져 읽은 나로서도 그의 다음 책에도 제법 관심이 갔던 터. 다른 후보에 눈길을 돌리기 전, 첫 인터뷰 요청을 떨리는 마음으로 진행했다. 조금 어려울 것 같다던 담당 편집자와의 대화는 다행히 잘 이어졌고, 어렵사리 '서면 인터뷰'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책 얘기부터 작가 이석원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담긴 조금 긴 인터뷰.


들숨과 날숨의 기록

HYE강(이하 생략):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은 책장이 잘 넘어가면서도 한 번씩 속도를 늦추고 호흡을 고르며 보게 되더군요. 아마도 제가 공감하는 부분에서 그러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서면으로라도 작가님을 만나 뵙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정말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석원(이하 생략): 저도 감사하고 반갑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지면으로밖에 뵙지 못하는 점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첫 번째 책 <보통의 존재>는 쓰는 데 9개월이 걸렸고, 두 번째 책 <실내인간>은 4년이 걸렸다고 들었습니다. 이번 책은 집필 기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궁금합니다.

한 달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 썼고 일 년쯤 다듬었습니다. <실내인간>을 사 년 내내 완성하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 아주 다른 과정이었지요. 생각해보면 <보통의 존재>와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을 쓸 때는 글이 뭔가 내 안에서 밀고 나오는 느낌이었고, <실내인간>은 많이 쥐어짜야 했습니다.     


처음에 신간 제목이 여덟 글자라는 것만 밝혀주셨습니다. 책의 구상 단계에서 제목을 먼저 확고하게 정한 이유가 있나요?

아, 제목이 여덟 글자라던 책은 다른 책입니다. 구상 단계에서 순서가 밀려 이젠 언제 낼 지 기약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의 최초 제목은 가제였긴 하지만 '수연산방'이었고, 이후 <보통의 존재>의 글귀 중 하나인 '좋아해. 다정하지 않을 뿐'이 두 번째 제목이었다가 반응이 엇갈려 최종적으로 '언제 들어도 좋은 말'로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목을 지을 때 만장일치에 가까운 반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그런 제목이 나올 때까지 계속 바꾸는 편입니다. 물론,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은 특별히 반대하는 사람이 없던 제목이었습니다.  

<보통의 존재>는 에세이, <실내인간>은 장편 소설이라는 형식을 택하셨습니다. 이번 책은 산문과 소설 사이를 오가는 알쏭달쏭한 형식이라고 느껴지는데요. 이러한 형식을 택한 이유는 무엇인지요?

항상 새 작품에 들어갈 때 전작이 큰 영향을 미칩니다. 전작이 잘됐으면 잘된 대로 이번에는 다르게 가고 싶어 하고, 뭔가 문제가 있었다면 왜 그랬는지를 생각해 역시 다르게 가고 싶어 합니다. 이번 책은 바로 그러한 고민과 욕구의 소산입니다. <보통의 존재>를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셨기에 제 기질상 이번에는 어떻게든 다른 느낌, 다른 방식, 다른 깊이를 추구해보고 싶었습니다.


또 장편 소설을 쓰면서는 (책에 나온 대로) 글을 쓰는 일에 대한 여러 가지 회의를 느꼈기에 무엇이 문제였던가를 헤아리는 과정에서 나는 왜 소설을 썼는가, 내가 정말 쓰고 싶은 글, 써야 할 글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는데, 내가 하고 싶은 건 이야기이지 소설은 아니었어요. 


즉, 어느 책이든 단지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소설일 수는 없는 것이고, 그 이야기가 소설의 문장을 띠고 있을 때라야 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저는 단지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 그 이야기들이 소설의 문장을 갖추게 하는 데엔 더 이상 관심이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피하고 싶었을 정도였죠. 소설에 대한 어떤 관심이나 애정도 없는 내가, 형식적인 면에서 산문보다 엄격한 장르의 글(소설)을 쓰기 위해, 다시 말해 그 형식에 맞추기 위해 쏟는 노력과 시간들이 더는 제게 의미를 주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해서 이제부터는 세상이 정해놓은 어떤 틀이나 형식에도 얽매이지 말고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쓰자, 는 생각에 쓴 것이 이번 책입니다. 


그래서 에세이로서는 드물게 마치 장편 소설처럼 책 한 권을 아우르는 긴 이야기가 들어가게 되었고, 그러면서도 그 이야기를 소설의 문장으로 덧칠하거나 소설적인 묘사를 통해 글을 소설답게 하는 일을 부러 하지 않았으며, 시와 에세이의 경계에 있을 법한 짧은 글들을 곳곳에 배치하였고, 때론 일기를 넣기도 하고 때론 편지를 넣기도 하면서 그렇게 제한 없이 자유롭게 썼습니다. 결국 이 책은 작가 마음대로 쓴 '잡문'이요, 그래서 산문인 것이지요. 어쨌거나, 작가인 제가 쓰고 싶은 대로 썼으니 독자들께서도 읽고 싶은 대로,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시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게 에세이가 됐든 소설이 됐든 둘의 결합이 됐든 뭐든 말입니다.


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글들을 굳이 어떤 장르다, 분류하고 싶지는 않으며 그저 재미있는 '읽을거리', 단지 붙들고 있는 동안의 '소일거리'로 충실히 기능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쓴 것입니다. 그런 만큼 독자들께서 다양하게 정의 내리고 구분해 주신다면 그 자체로 제겐 기꺼울 따름입니다. 저는 책이란, 작가가 반을 쓰고, 나머지 반은 독자가 써서 마무리를 짓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제 책이 여러 사람들에게 전달되어 각자의 취향과 안목에 따라 그렇게 각기 다르게 '완성'되어가는 것을 보는 일이 좋습니다.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의 2부는 1, 3, 4부와 다소 다른 느낌을 줍니다. 에세이 속 소설 같은 느낌인데요, 특히 가위바위보 대회에서 져야 이기는 설정이 재미있었습니다. 지지리도 운 없는 남자 철수가 마지막으로 써낸 말도 의미심장했고요. 이 이야기를 만들게 된 이유나 쓰게 된 영감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산문집 사이 끼어드는 이야기로 넣으신 이유도 궁금합니다.

2부에 실린 '불운 올림픽'이란 글은 애초 이 책의 단초가 된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에 나오는 대로 장편 소설을 발표한 이후 글을 아예 쓰지 못하다가, '로제 그르니에'라는 작가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저 나름으로는 극적으로 다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부턴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자, 라는 생각을 하던 무렵, 어느 날 갑자기 토하듯 몇 시간 만에 써진 글입니다. 그것이 바로 다시금 가능하게 된 저의 글쓰기의 시작이었고, 이번 책의 내용이 바로 그러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만큼 이 글은 어떤 식으로든 들어갈 수밖엔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차여차해서 가위바위보 대회란 글을 썼다, 는 식으로 그저 언급만 하기보다는 가급적 통째로 싣고 싶었는데 이유는 이렇습니다.


그 글 자체가 책의 전체 이야기와 통하는 데가 있는 데다가, 무엇보다 제가 이제부터 추구하게 될 글의 방향, 즉 형식에서의 자유로움과 재미를 추구하고 있는 글이라는 점, 그러면서도 이야기이기는 하되 소설이라기엔 어딘가 너무 심플한 이 글을 넣음으로써 소설도, 그렇다고 여느 에세이도 아닌, 그러면서 그 둘 다이기도 할 이 책의 모호한 지점을 더욱 확고히 해줄 것이란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엔 '형식 따위 필요 없어. 이제부턴 나 쓰고 싶은 대로 쓸 거야'라는 일종의 선언과도 같은, 제게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다행히 읽으시는 분들이 재밌어하시고, 그 글이 거기 있는 걸 자연스레 받아들이시는 것 같아 기쁩니다.


연애 이야기가 큰 골조를 이루지만, 진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방황하고 좌절하고 다시 일어나는 신인(?) 작가의 성장기 같기도 합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첫 번째 책을 쓴 후와 두 번째 책을 쓴 후 글쓰기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세 번째 책을 쓰시면서 '글쓰기'에 어떤 의미를 갖게 되셨나요?

모든 것이 책에 나와 있는 대로입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마감 같은 것 없이도 나라는 사람은 언제나 글을 써 왔고, 그것이 앞으로도 쭉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 이번 책을 쓰게 된 동기이자 쓰는 과정에서 발견한 저의 소중한 깨달음이었습니다. 그 일을 지켜가기 위해 노력을 다할 생각이지만 그리 거창한 각오가 필요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유는, 이제 제가 그 일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하기 때문에 하는 노력과 사랑하기 위해서 하는 노력은 엄연히 다른 것이니까요.


가수로서의 자아와 작가로서의 자아를 분리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습니다. <보통의 존재>에서는 수정을 거듭하며 음악 이야기는 거의 지웠다고 들었는데, 이번 책에서는 가수로서의 모습도 어느 정도 드러내셨습니다. 심경의 변화가 있으셨나요?

창작자로서 제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제가 만든 결과물에 대해 '있는 그대로' 평가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악 하는 사람이 쓴 글'이라는 선입견은 제게 절대적으로 피하고 싶은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한 번도 음악 하는 사람으로서 글을 대한 적 없고 늘 그 부분을 조심해 왔습니다. 그런 결과 이제 많은 이들이, 또 매체에서도 다른 수식어 없이 그저 저를 이석원, 혹은 이석원 작가라고 불러주게 된 현실에 안도하며 또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이번 책에 잠깐이지만 음악을 하는 모습이 등장하는 것은 단지 재미를 위한 장치였을 뿐, 여전히 경계하는 마음은 변함없습니다. 단지 약간의 여유가 생긴 탓인데, 이제 그런 선입견에 쉽사리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시간과 공이 쌓여가고 있다는 믿음, 그리고 사람들이 보내주는 신뢰 덕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블로그에 몇 줄 쓸 때조차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보통의 존재>는 출간 이후로도 수정을 심심치 않게 했고, 그 때문에 처음 쇄와 현재 나오는 쇄가 꽤 다를 거라고 하셨는데요. 이번 책 역시 계속 수정을 해나갈 계획이신가요?

수정은 제가 하는 모든 작업 공정 중 가장 중요한 과정이자 행위입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무한히 보장받지 못하면 저는 저의 100%를 보여드릴 수 없습니다. 만약 수정을 할 수 없는 종류의 일에 맞닥뜨렸을 때, 전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가정해서 미리 대비하려 합니다. 아무리 틈이 생기지 않게 하려고 노력을 해도 틈이 생길 수밖엔 없는 게 세상일이니까요. 


어쨌거나, 무한히 고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은 바로 제가 글쓰기를 사랑하는 이유 중 아주 큰 것입니다. 저는 그 정도로 수정 자체를 사랑하는데, 그것을 함으로써 저는 제가 되고자 하는 어떤 것, 제가 만들고자 하는 어떤 것으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보통의 존재>는 원고를 쓸 때는 물론, 출간 직후에도 천여 곳을 넘게 고쳤고, 제가 너무 많이 고치니까 어느 날 출판사에서 이제부턴 2판 1쇄라고, 너무 많이 달라졌으니 그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정도로 저는 수정을 많이 하지만, <보통의 존재>는 첫 책이었기에 그 분량이 그리 많았던 것 같고, 이번 책도 이미 수정 작업 중에 있습니다만, 변화의 폭이 그렇게 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실 제가 하는 수정이란 게 워낙 세세하고 미세한 부분들이어서, 독자들 입장에서는 수정 이전이나 이후를 표 나게 체감하시지는 못할 듯하므로 굳이 그에 영향을 받으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책을 읽다 보면 '이석원'이라는 사람은 유독 '현재' '지금 순간'에 집중하려는 느낌이 강한 것 같습니다. 이번 책에는 과거의 순간과 만나 자신이 가졌던 오해를 푸는 장면이 있는데요, 작가님에게 '과거'와 '미래'는 어떤 의미를 갖나요?

과거로 돌아가 오해를 푸는 그 순간조차 현재에서 벌어지는 일로, 다시 말해 현재로 인식하는 편입니다. 즉, 제게 과거나 미래는 현재에 비하면 그만큼 희미한 것인데, 제게 이토록 현재와 지금 이 순간이란 게 중요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저는 상실에 무척이나 민감해서 지금 이 순간이 한 번 뿐이며, 한 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그 유한성이야말로 제 모든 창작과 삶의 에너지이자 슬픔과 소중함의 원천이 됩니다. 그것이 제가 현재에 그토록 집중하는 이유입니다. 그런 제게 과거와 미래는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못하며, 때문에 그것들이 제게 머물러 있을 때, 바로 지금, 저를 스쳐 지나가는 이 순간일 때라야 비로소 의미를 느끼는 편입니다.  


조용한 곳을 원하지만 굳이 도시를 좋아하기 때문에 도시를 떠날 생각이 없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작가님이 도시에 애착을 갖는 이유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나서 평생을 살아온 곳이기 때문인 것 같긴 한데, 저와 같은 사람 중에도 도시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냥 타고난 것 아닐까요. 어려서부터 도시의 활기와 쓸쓸함 같은 것들에 유난히 매혹되고 크게 반응했어요. 휴가철에 지방 어디로 놀러 가면 해방감을 느끼기보다는 어서 도시로 복귀하고픈 욕구를 더 많이 느끼는 편입니다. 그냥 좋은 것 같아요. 여기 있어야 비로소 마음이 편해져요.  


블로그에 자신을 소개하는 문구로 '나이 탐험가'라고 쓰신 걸 봤습니다. 20대, 30대를 탐험하면서 느낀 바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또 현재 40대라는 나이를 탐험하면서 그전과는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엇인지도 궁금합니다. 

'나이 탐험가'란 표현 역시 저의 '이 순간은 한 번뿐'이라는 세계관이 반영된 표현입니다. 흔히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꺼려하는 경향들이 있는데, 저는 나이에 대해 그런 관점을 갖고 있기에, 제게 나이란 늙고 젊고의 문제가 아니라 한 번씩밖엔 경험할 수 없는 유일하며 소중한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늙는다는 것이 적어도 아직까지는 두렵지 않으며, 그저 경험해 볼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하고 마주치는 그 각각의 나이를 느끼려 애를 쓸 뿐입니다.


2,30대를 탐험하면서 느낀 바를 물으셨는데, 특별히 기억나는 부분은 없습니다. 제게 지나가 버린 것들은 크게 의미를 갖지 못하기도 할뿐더러 그냥 남들과 똑같이 별 특징 없이 살아온 탓인 것 같습니다. 40대가 되고 중반이 되어서 이제 조금 있으면 오십에 가까워지는 나이가 됐는데, 나이가 들수록 절감하는 건 늘어난 인간 수명에 비해 너무 빨리 찾아오는 몸의 노화, 그리고 인생에 대해 조금은 더 너그러워진 자세 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타 인터뷰에서 "음악은 하고 싶은 일이라기보다는 그 당시에 제가 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글쓰기는 처음으로 하고 싶다고 느낀 일."이라고 덧붙이셨습니다. 두 작업의 차이와 장단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두 작업 중 작가님이 잘 하는 일과 끌리는 일이 일치하는지도 여쭤보고 싶네요.

음악을 직업으로, 일로 삼기 전까지 음악은 제 모든 것이었습니다. 태어나서 그만큼 오래, 열렬히 좋아해 본 대상이 없습니다. 그러던 것이, 일이자 밥벌이가 되면서 음악 듣는 즐거움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정말이지 제게 돌이킬 수 없는 충격이자 큰 상실이었고, 음악을 하는 일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도, 남들처럼 그 일이 간절해서 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음악을 해 나가면서 회의가 많았습니다. 그런 제게, 직업 이상의 의미를 갖는 일과 단지 밥벌이로서 지탱해온 일이 비교가 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음악은, 제가 그 일을 좋아하고 안 좋아하고를 떠나서 일단 손을 댄 이상 잘해야 하는데, 그 소리란 것을 제가 완벽하게 장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늘 괴로웠습니다. 음악을 내 몸처럼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길 바랐지만 늘 벽에 부닥치며 한계를 절감하는 일은 힘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글은 그만큼 자신이 있는 일이냐 물으신다면 그것은 다른 문제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적어도 글을 쓰는 일은 무대에서 소리를 내는 일과는 달리 무수한 수정이 가능하고, 무엇보다 혼자 하는 일이란 점에서 제게는 다르게 여겨질 수밖엔 없습니다.


작가님 글에서 빠질 수 없는 덕목(?)이라면, 솔직함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작에서도 그러했듯 이번에도 작가 이석원에 대해 은밀히 들여다본 느낌을 받습니다.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자신을 오픈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둔감한 편입니다. 또한 책은 책에서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겐 저 자신조차 단지 책에 등장하는 하나의 인물일 뿐인지라, 사실 '내 이야기를 한다'라는 자각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아마 그렇게 세세한 이야기들까지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작가로서 저를 포함한 모든 것들을 객관화해 보는 태도를 아주 강하게 갖고 있습니다. 글을 쓸 때만큼은 세상 모든 것이 내 글의 소스일 뿐인 것이지요.


예전에 <보통의 존재>를 읽은 어떤 유명한 분이 있었는데 나도 이렇게 담담하게 세상을 살아내고 싶다면서 저를 꼭 좀 만나보고 싶다고 해서 한참을 도망 다닌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기대하는 건 책 속에 담긴 저의 모습 일부일 뿐이지 온전히 제 모습은 아니니까요. 제 책을 읽으신 분들 중에 <보통의 존재> 속 저와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의 저가 완벽하게 동일 인물이라고 느끼실 분들이 과연 얼마나 계실까요. 그런 이유로 전 누군가 제가 쓴 책을 읽고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라고 단정을 짓거나 상상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즐겁고 감사한 일이지요. 


제가 정말 두려워하는 건 제가 만든 결과물이 있는 그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뿐, 저의 책이 여러 사람들에게 퍼져서 그들 각자의 취향과 안목대로 받아들여지고, 작가인 제가 그들 모두에게 각기 다르게 정의 내려지고, 상상되는 것은 그 자체로 근사한 일이 아닐까요. 거기서 '진짜 내 모습'이란 건 사실 가려낼 수도 없고, 이미 중요하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님 글은 그냥 흘려보내기 쉬운 감정을 다시 세분화하여 자신의 언어로 재조립해 펼쳐낸 느낌을 받습니다. 독자로 하여금 두루뭉술하게 느끼고 넘어갔을 비슷한 감정을 다시금 분석하여 "그때 네가 느낀 감정은 이러이러해서 이런저런 이유로 발생한 게 아닐까. 나는 그랬어."라고 조곤조곤 읊조려주는 느낌도 받고요. 이 과정을 글로 풀어낼 때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궁금합니다.

저 자신을 포함해, 사람들이 막연하게 생각만 하던 것을 언어로 포착해 내는 데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고 또 무척 공을 들이는 편입니다. 저는 그러한 작업을 곧잘 영작에 비유하는데요. 한글로 된 문장을 영어로 능숙하게 옮겨 쓰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듯 막연하게 생각으로만 존재하는 것들을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긴 인내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영작을 하다 도저히 안 되면 미리 답을 보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는 것처럼 저 또한 꼭 그렇게 포기하고 싶은 고비를 여러 번 견뎌내다 보면 마침내 내가 포착하고 싶었던 것이 활자로 구체화되는 순간이 찾아오고, 그것을 수없이 다듬어 나무랄 데 없는 표현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기쁨을 느낍니다. 영작하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결코 그 일을 자주 한다고 해서 수월해지지는 않아서, 그때마다 힘든 과정들이 되풀이된다는 점이겠네요.   


아이들은 주로 놀이터에 가면 타는 기구 순서가 정해져 있지요. 작가님의 놀이터(?)인 서점에서는 주로 어떤 코스로 책들을 살펴보시나요? 또 특별히 관심을 갖고 구매를 하는 책의 종류가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저는 일단 서점에 들어서면 그 공간 안에 있다는 자체로 무한한 편안함과 행복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일단 들어선 직후엔 이리저리 목적지 없이 거닐면서 그 공간 자체를 느끼는 시간을 갖고 그런 다음 책을 살펴보러 다니는데, 여전히 책 자체에 목적을 두는 행위라기보다는 그저 서점 안을 산책한다, 라는 측면이 더 강합니다. 


아무튼 그래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코스가 있긴 있습니다. 일단 소설에는 워낙에 관심이 없어서 거의 가지 않고 동화와 인문학 책, 역사책, 과학책 등을 주로 봅니다. 그러다 맘에 드는 책이 있으면 들춰보거나 사고 그러는데 그렇게 고른 책을 품고 계산대에서 계산을 한 뒤 집으로 데려오는 순간의 행복감은 정말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이전 책들과 다르게 가려는 고민을 많이 하시니 작업이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번에 쓰고자 하는 이야기들은 어떤 것인가요?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제가 다르게 가고 싶어 하는 건 스스로 제약을 두는 행위가 아니라 욕구에 충실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쓰고 싶은 게 너무너무 많습니다. 독자들께서 이번 책을 좋아해 주고 계시기 때문에 제게는 앞으로 선택의 폭이 무지하게 넓어졌으니 이것보다 더 감사한 일이 있을는지요. 일단은 또 이번 책과 다르게 가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이번 책에서 제가 추구했던 많은 것들과 반대의 책이 나올 것 같습니다. 뭐랄까, 이번 책처럼 순식간에 페이지가 넘어가는 게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에서) 페이지가 잘 안 넘어가지는, 두고두고 쪼개 읽을 수 있는, 보다 사색적이고 은근한 그런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보통의 존재>에서는 보편적인 공감대를 불러오는 짧은 이야기들 속에서 오히려 작가님만의 색깔이 묻어 나온다고 느낀 반면, <언제 들어도 좋은 말>에서는 한 호흡으로 이어지는 특별한 이야기 속에서 되려 관계를 둘러싼 보편적인 고민이 많이 보였습니다. 작가님에게 있어서 가장 특별한 존재로 자신이 느껴지는 순간과 가장 보통의 존재로 자신이 느껴지는 순간에 대해 여쭤보고 싶습니다.

맞는 답변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작은 친절과 배려 등을 접했을 때, 나 자신이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그럴 때 제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된 기분 좋은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항상 다른 사람들도 느끼게끔 행동하려 노력합니다. 돌려주고 싶은 것이죠. 반대로 보통의 존재로 느껴질 때는 일을 할 때입니다. 타고난 재능과 역량, 능력에 관해서는 한 번도 자신을 특별하다 느껴본 적 없습니다. 늘 제 자신이 성에 차지 않고, 그래서 남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하려 합니다. 아주 많이요. 아주 많이 부족하니까.


독자로서의 자신을 평가한다면 어떻습니까? 또한 작가로서 독자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싶나요?

여전히 책을 거의 읽지 못하는 저는 평가를 받을 만한 독자가 되지 못합니다. 작가로서는, 이것은 작가를 떠나 뭔가를 만들어야만 살 수 있는 한 사람의 창작자로서 사람들에게 신뢰받는 창작자가 되는 것이 유일한 제 꿈입니다. 그러니 독자들이 제 글에 기대를 걸고 신뢰를 보내줄 때, 무한한 감사와 기쁨을 느끼며 그러한 신뢰가 오래도록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습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보통의 존재>가 워낙 크게 히트를 쳐서 그 뒤에 나오는 책들에 대한 부담감이 있으실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이 독자들에게 어떤 존재로 자리매김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으시다면 알려주시고, 이 책이 작가님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께 새 책과 관련해서 제가 바란 것은 오직 하나, 다른 책과는 상관없이 그저 이 책을 이 책대로 읽어 주십사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그 청을 들어들 주신 것 같아 기쁩니다. 저에겐 일등을 하는 것보다 다양성과 개별성을 획득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기에 전작과 이렇게나 다른 새 책을 독자들께서 환영해주시는 것은 남다른 기쁨과 의미가 있습니다. 


특별히 이번 책은, 이 책이 누군가의 인생의 책이 되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붙들고 있는 동안만이라도 그 시간만큼 책임져 줄 수 있는, 돈 만 삼천 원을 지불한 값을 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는 마음으로 쓴 것입니다.


장편 소설을 사 년간 쓰면서, 글을 읽고 쓰는 것의 즐거움에 대해 참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책은 내가 읽어도 재밌을 만한 책을 쓰고 싶었고 독자들께서도 그 즐거움과 재미를 온전히 느끼시길 바랐습니다. 다른 어떤 거창한 주제나 의미, 깊이 이런 것 상관없이 그저 붙들고 있는 동안 최대한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책이요. 


거기에는 전작인 <보통의 존재>가 비록 한 개인의 이야기일지라도 삶과 죽음, 영원한 이별과 상실 등 사뭇 거창한 주제들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한데, 이번에는 사뭇 통속적이며 가벼운 이야기들로, 그러나 그 평범하고 별것 아닌 이야기로 사람들의 감정을 전작보다 더 크게 건드려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중요한 것은 형식은 아니었고 이 부분은 앞으로도 쭉 유지될 것 같습니다.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쓰자, 는 것.

 

이석원 작가(사진 제공/오픈하우스포퍼블리셔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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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파일 가장 마지막에 '보내주신 질문들이 좋아서, 답을 하느라 보다 신중하게, 그러나 원 없이 이번 책과 관련해 하고 싶었던 말들을 할 수 있었다'라고 덧붙였다. 솔직하고 섬세한 답변만으로도 감동이었건만, 마지막 인사는 더욱 감동이었다. 그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다고 해도 서면보다 더 깊은 이야기가 오갈 수 있었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에게 가 닿은 질문과 나에게 와 닿은 답변이 적절한 호흡으로 나타나 기뻤다.


얼마 전, 언니네 이발관의 마지막 앨범이라고 알려진 6집 '홀로 있는 사람들'이 발매되었다. 5집의 '아름다운 것' '산들산들'을 참 많이 들었는데. 6집도 정말 좋다. 인터뷰 찬찬히 읽어본 후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가사를 천천히 곱씹어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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