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박수 소리> <길은 학교다>의 저자 이길보라
심호흡
2015년 10월~11월에 나온 신간을 훑어보며 꼭 만나보고 싶은 이가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로 다큐멘터리를 찍고 책을 낸 이 사람. '반짝이는 박수 소리'라는 제목을 지닌 영상과 종이책을 차례로 보면서 궁금증은 더 깊어졌다. 수어가 지닌 깊고 넓은 세계를, 그 언어를 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그 덕분에 조금이나마 맛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눈을 바라보며 말을 건네고 다시 돌아오는 말을 담는 일이 약간 어색했던 나지만, 이 인터뷰를 마치고 하나만큼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우연인지 아닌지 몰라도 책 제목과 맞닿은, '반짝였던' 그의 눈빛. 저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 이길보라와 만나 나눈 CODA, 다큐멘터리, 꿈 등에 관한 조금 긴 인터뷰.
들숨과 날숨의 기록
HYE강(이하 생략): 요새(2015년 11월경)는 어떤 작업을 하시나요?
이길보라(이하 생략): 후속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고 있어요. 베트남전에 관한 이야기인데, 내년 2월에 촬영이 있을 예정이거든요. 이 작업은 호명되지 않은 이름들을 호명하는 일이에요. 국가가 기억하지 않은, 공적 방식으로 기록되지 않은 개인들의 이야기죠. 예를 들어 베트남전에서는 베트남이 승전국이기 때문에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요.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인들이 죽인 민간인도 그중 하나죠.
한국의 경우를 살펴보면, 국가적으로 베트남전을 '도와줬다' '이겼다'라고 잘못된 기억을 꺼내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렇지만 결국 졌잖아요? 전쟁에서 돈을 열심히 벌어오긴 했지만. 한국군은 사실 미국의 노예 용병이라는 애매한 위치로 갔어요. 그런데 여기서 국가가 그들(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을 기억해주지 않았을 때, 호명하지 않았을 때 이들의 트라우마가 재미있거나 혹은 안타까운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봐요. 저는 고엽제 전우회가 계속 광장에 나오는 방식을 택한 것도 자신의 이름을 직접 호명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 모이는 게 자신들을 기억해 달라는 표현이라는 거죠?
저는 그걸 하나의 트라우마라고 보고요, 국가폭력으로 인해 호명되지 않은 사람들의 목소리라고 생각해요. 그 이름들을 다시 호명하고 그들의 목소리들을 모으는 작업을 하려고 하고요.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다큐멘터리가 시작되었다고 들었는데요.
이번에는 '반짝이는 박수 소리'와 달리 사적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지 않을 거예요. 제게는 할아버지에 대한 자료도 별로 없고, 할아버지가 살아계시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죠.
작업 팀은 세 명인데 전체 디렉팅은 저(이길보라 감독), 그리고 촬영감독, 프로듀서로 구성되어 있어요. 이 다큐가 언제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다큐멘터리 작업은 보통 2-3년 정도 하니까 내후년쯤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때 국내 사정을 봐야 알겠지만,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자연스럽게 요즘 관심사도 이 주제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겠네요.
맞아요. 국가나 국가폭력, 군대, 전쟁 혹은 자본주의. 그런 것들에 대해 계속 공부하고 있습니다.
주제 범위가 매우 넓은데, 작업 결과물을 만들면서는 이들을 씨실과 날실로 엮어야 하잖아요. 어떤 방식으로 배우고 정리하나요?
먼저는 관련된 책을 계속 찾아 읽어요. 예를 들어 베트남전의 경우 좁게는 베트남전 자체의 이야기를 먼저 들여다보죠. 제 안에 있는 질문을 주목해요. 그 전쟁에서 죽었던 사람들의 이름을 호명하는 이야기, 여성이나 약자들을 호명하는 이야기에 관심을 두고 살펴봐요. 이렇게 들여다보면 결국 큰 맥락 속에서 이야기의 흐름을 찾게 되거든요. 이 전쟁과 다른 전쟁들은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이는지, 전쟁과 자본주의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자본주의란 무엇이고 또 사회주의란 무엇인지, 국가는 무엇인지 등 큰 흐름 속에서 질문들이 계속 나오죠. 그래서 결국 세계사 공부도 같이 하게 돼요.
저는 이 질문들이 자연스럽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올라가게 놔둬요.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전쟁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하고, 이 전쟁 왜 하필 이 땅에서 일어났는지 이해하려면 베트남이 갖는 중요성도 알아야 하더라고요. 이 흐름을 이해하려면 세계사를 알아야 하고, 세계사를 이해하려면 결국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도 알아야 한다고 봐요. 그러면서 조금씩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것 같아요. 책은 책을 물고 오니까요.
제가 해온 작업들도 같은 방식이에요. 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엄마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고, 엄마 아빠를 알기 위해서는 엄마 아빠의 엄마 아빠를 알아야 하겠죠. 저는 제 옆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작업을 시작했는데, 그것들이 결국 사회를 일궈내는 이야기가 되는 거잖아요. 사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전체적인 것과 연결되기도 하고요.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한다는 건 자연스럽게 그 시대에 대한 이야기와 연결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반짝이는 박수 소리>의 프롤로그/에필로그도 지금 이야기와 일맥상통하네요.
<로드스쿨러>와 <길은 학교다>를 작업하고 나서 엄마 아빠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두 분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엄마의 엄마 이야기도 하게 되더군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게 아버지 이야기뿐만 아니라, 엄마의 이야기도 나를 일구는 하나의 축이 된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러면서 이름도 이길보라(아버지 성과 어머니 성을 함께 쓴)로 바꾸게 되었죠. 페미니즘 등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이 이유가 가장 먼저예요.
책과 다큐멘터리 작업을 같이 하고 계신데요. 기획부터 의도하신 건가요?
두 작업 모두 의도하고 한 건 아니에요. <길은 학교다>는 18살 때 여행을 하면서 느꼈던 벅찬 순간들을 작업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돌아온 후 책 작업을 시작했어요. 그러던 와중에 저 스스로 '로드스쿨러'로서 정체성을 갖게 되었죠. 로드스쿨러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다큐멘터리라는 방법을 택한 것뿐이에요.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반드시 책과 다큐를 같이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어요. '다큐 반짝이는 박수 소리'는 영화로 엄마 아빠 이야기를 하기 위해 시작한 건데, 긴 과정을 하다 보니 재미있는 이야기가 너무 많은 거예요. 그래서 이건 따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책 작업도 하게 되었습니다.
영화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와 책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의 폭이나 깊이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결은 비슷하지만 다른 작업이라는 생각으로 임했어요. 앞으로도 작업 방식은 딱히 한정하지 않으려고 해요. 제가 하려는 이야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방법이나 매체는 무엇인지 고민해봐야죠. 지금까지 시도하지 않은 다른 새로운 방식을 선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어요.
언어를 찾는 과정은 고단했다. 당신과 나 사이에는 여러 종류의 차이와 차별이 있었다. 나만의 언어로 나를 설명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이곳이 아닌 저곳, 저곳이 아닌 그곳을 찾아 길을 떠났다. 그 길목에서 만난 이들의 생은 나와는 다른 결을 지닌 것이었지만, 종종 비슷한 감수성을 지닌 생을 만나곤 했다.
- <반짝이는 박수소리> 프롤로그 중
책에 쓴 이야기들은 부모님들도 보셨나요?
아직 못 보신 것 같아요. 책이 출간된 후로 부모님을 만나지 못했어요. 연락만 주고받는데, 그 코멘트는 하지 않으시네요. 부모님에게는 글자 언어가 익숙한 게 아니다 보니 못 읽으셨거나 안 읽으셨을 수도 있어요. 아니면 읽으셨지만 코멘트를 안 하신 걸 수도 있고요. 읽으셨더라도 안 하셨으면 좋겠네요.(웃음)
저는 '미라클 벨리에'라는 영화로 CODA를 처음 알게 됐어요. 아직 CODA라는 단어가 조금 생소한 분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반짝이는 박수 소리'를 CODA로서 소개한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청인들을 위한 영화. 그들을 초대하고 환대하고 싶었어요. 이 영화의 키워드는 ‘환대’라고 생각합니다. 반짝이는 박수 소리로 환대하는 거예요. 그래서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반짝이는 이미지가 나오고, 영화 앞에서는 반짝이는 박수 소리를 설명하고, 마지막에는 반짝이는 박수 소리로 끝나잖아요.
복지나 장애의 영역을 떠나서 생각해보면 좋겠어요. 손과 얼굴 표정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그 세상은 우리가 사는 세상 안에 같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세상을 몰라요. 만나본 적이 없으니까요. 우리는 평소에 장애인을 잘 만나기 힘들지요. 장애인은 시설에 있거나 격리된 채 항상 조용히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실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참 많아요. 주의 깊게 바라보면, 내가 속한 공간에서도 찾을 수 있어요.
저는 이 영화를 통해서 장애인의 복지나 지원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문화적인 차원에서 접근했어요. '이들이 손을 쓰고 얼굴 표정을 움직이면서 말하는데, 그게 진짜 아름다워요. 한 번 놀러와 보실래요? 한 번 들여다보고 가실래요?'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어요. 그런 느낌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두 세계 사이에 있는 벽에 균열을 내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물론 이 영화 한 편으로 모든 편견이 사라지고 깨질 순 없겠죠. 하지만 적어도 다리를 놓거나 두 세계 사이의 벽에 약간의 균열을 내는 일 정도는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에요. 영화를 다 보고 나왔을 때 적어도 우리 옆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사람들을 만났을 때 반가운 마음이 들고 한번 말을 걸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면 좋겠어요. 정말 말을 걸고 싶다면 스마트폰을 활용해서도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고요.
저는 CODA로 살아왔기 때문에 두 세계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두 세계가 잘 소통할 수 있음을 믿어요. 믿긴 하는데 소통의 연결고리가 부재했다고 생각하거든요. 연결고리를 만들고 물꼬를 터주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다큐멘터리에서 보니 CODA의 가정 역시 보통 가정과 다르지 않았어요. '반짝이는 박수 소리'는 가정을 향한 신뢰가 있기에 가능한 작업이었다는 생각도 들고요.
최근에 본 다큐멘터리에 CODA 과학 영재의 이야기가 있었는데요. 이 아이를 어떻게 길렀는지 알아본 영상이었어요. 청각장애인 부모가 이 아이를 어떻게 대했는지 봤는데, 그들은 정말 사려 깊게 아이의 말을 들어주더라고요. 아이의 구화에 온 신경을 기울여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봐주는 엄마,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눈으로 보는 소통. 서로의 100%를 꺼내는 대화. 이런 요소들이 CODA 가정, 청각장애인 가정에서 더 완벽하게 기능한다고 생각해요. 수어를 통한 소통이 오히려 우리가 현대사회에서 간과하고 있는 것을 꼬집어내지 않나 생각도 들고요. 음성언어를 사용할 때 돌려 말하는 부분이 수어에서는 사라져요.
저는 종종 음성언어가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요, 음성언어와 수어를 동시에 쓰면 수어가 더 빨리 끝나요. 더 경제적인 언어죠. 돌려서 말하지 않고 표정에서 다 드러나고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직접적인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거품이 없다고나 할까? 그래서 더 진실된 소통이 가능하죠. 티브이에 나왔던 가정도, 저의 가정도, 다른 코다 가정도 직접적이기에 더 진실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이 당당하고 밝은 모습으로 장애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일반적으로 다른 청각장애 가정도 비슷한 분위기인가요?
물론 개인차가 있기는 할 겁니다. 그런데 제가 만나본 대부분의 청각장애인들은 장애를 지닌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아요. 그들은 그들의 커뮤니티와 문화가 있어요. 또 언어를 비교했을 때도 수어가 음성언어에 비해 열등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더 우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요. 그분들 스스로도 그들의 문화를 하위문화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너희? 말하는 사람들, 청문화, 우리? 농문화'라고 생각해요.
수어의 현실과 환경을 놓고 볼 때 가장 먼저 개선되어야 할 부분은 뭘까요?
수어언어법을 제정*하기 위해 운동 중이에요. 법이 발의가 되려면 채택 과정에서 여러 단계가 필요한데 이제 중간 정도 왔다고 합니다. 수어언어법 제정을 놓고 두 가지 방향을 살펴볼 수 있어요.
* 관련 기사: 농아인을 위해 (제민일보, 2017.4.19)
1)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한국어가 있고 수어가 있다.
2) 한국인들 중에서 한국 농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수어다.
이중 1)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두 가지가 되기 때문에 모든 공간에서 두 가지 언어를 제공받게 돼요. 2)는 평소 우리가 사용하는 공간은 그대로 가고, 농인들이 있는 공간이나 학교가 바뀌게 되는 거죠. 농인의 언어는 수어이기 때문에 이 공간에서는 모든 이가 수어를 해야 하고, 수어 통역사 자격증이 있는 사람들이 선생님을 하게 되겠지요? 저는 둘 다 좋다고 생각해요. 사실 후자는 기본적인 거고요.
수어언어법이 빨리 제정되어서 모든 공간에서 수어로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 많은 것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농인 아이들이 수어로 제대로 된 교육을 제공받으면, '나중에 커서 공장이나 농사만 하지 않아도 되는구나!'를 알게 될 거고, 그러면 농인들이 일할 수 있는 다양한 현장들이 생기겠죠. 농인 아이가 '나도 커서 대통령이 될 수도 있겠네?'라는 꿈을 꿀 수 있는 세상. 이런 것들은 교육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데, 교육이 변하려면 언어가 인정되어야 해요. 이럴 때 한쪽에서는 국회에서 법을 제정하는 일을 해야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문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이런 책을 내고 다양한 작업을 계속해야겠죠.
책에는 선생님을 꿈꿨던 어머니 이야기가 나와요. 또 청소년들의 고민에는 늘 꿈이 자리하기도 하죠. 혹 꿈이 없어 방황하는 청소년에게 본인의 경험에 비추어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면요?
꿈이 없어 방황하는 몫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고 봅니다. 누구나 목표를 향해 늘 질주할 수는 없어요. 누구든 방황해야 하는 양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시간들은 엄마에게도 제게도 당연히 있었고요. 무언가를 위해 질주하는 시간 말고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잘할 수 있는지 생각하는, 내 옆에 있는 이 사람은 뭘 잘할 수 있을지 들여다보는 그런 시간이 필요하죠.
18살에 여행하면서 가장 좋았던 건, 8개월 동안 생각할 수 있었다는 점이에요. 더 큰 세상을 만나고 배웠다고 얘기하곤 하지만요.(웃음) 저는 청소년기에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어요. 무슨 생각을 하면 어디서 멍 때리냐는 소리를 들었고 책을 읽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죠. 시간 뺏기니까 나중에 읽으라는 말도 많이 들었고. 그게 너무 이상하고 답답했어요. 18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동남아시아를 8개월 동안 여행하면서 장시간의 버스, 장시간의 기차를 타고 할 수 있는 건 오직 '생각하기'였어요. 그땐 인터넷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죠.(웃음)
제가 할 수 있는 건 바디랭귀지를 통해 옆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거나, 시디플레이어에 있는 노래를 하루 종일 주야장천 듣는 것이었어요. 엠피쓰리도 없던 때니까. 12곡 밖에 안 되는 노래를 계속 듣다 보면 지루하니까 창밖을 보며 각종 걱정들을 하기 시작해요. 학교에 대한 걱정, 학교 체제에 대한 걱정, 대한민국 입시 체제에 대한 걱정, 친구에 대한 걱정, 엄마 아빠에 대한 걱정, 지구에 대한 걱정, 인도에 대한 걱정 등등. 이런저런 걱정을 하다 보면 세상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제가 다 하고 있는 거예요. 사실 그런 시간들이 저를 성장시켰어요. 그 걱정은 자연스레 지구와 타인을 걱정하고, 그들이 되어보는 경험을 하게 만들죠.
저는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는데, 대한민국의 청소년과 돈을 벌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그런 시간이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꿈이 있어야 한다, 꿈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이런 건 다 허상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이 순간을 아름답게 살지 못한다면 다 가짜 아닐까요. 그래서 '꿈을 이룬다, 성취한다, 달려간다' 이런 단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꿈보다는 차라리 현재에 대한 질문들이 더 낫다고 생각하시겠네요.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을 가장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그게 맞다고 생각하니까요. 우린 언제 죽을지 모르는 거잖아요. 지금 이 순간, 타인과 지구에게 폐를 덜 끼치면서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경험한 게 없는데 꿈을 말해야 하는 현실이 더 말이 안 된다는 생각도 들어요.
저는 유예시키는 거라고 생각해요. 공부하라고 학교에 묶어 놓으면서 꿈에 대한 허상을 심어주는 것 같아요. 아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살피고 그게 이어질 수 있도록 돕는 게 아니라 학교에 갇혀서 배우고, 대학에 가면 여태껏 억눌러왔던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얘기하잖아요. '가둬놓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누가 우리를 가둬놓는지에 대해서도 잘 생각해봐야 해요. 가둬놓음으로 인해 누가 이익을 보는지,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는 건지에 대해서도. 꿈이 없는 건 아이의 잘못이 아니에요.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아이에게 꿈을 물어본다는 것 자체가 우문이죠.
로드스쿨러를 과도하게 걱정하는 시선들도 있는데요.
크게 우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제가 학교를 그만두라고 말한다고 다 그만두지 않아요.(웃음) 사실 저는 공교육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모두가 학교를 박차고 나오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공교육이 살아야 근본적인 해결이 되니까요. 공교육 안에서 다양한 경험과 배움을 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많은 대안학교를 세울 필요도 없을 거고요.
반면, 모두가 반드시 공교육의 테두리 안에 있어야 한다고도 생각하진 않아요. 각자가 다르기 때문에 각자에게 맞는 배움의 현장을 찾아야 하는 거겠지요. 지금 여러 종류의 학교들이 세워지는 것도 그런 맥락일 거고요. 네모난 콘크리트 건물 안에 들어가는 것만이 학교는 아니에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했을 때 학교는 그냥 광장이었어요. 근대가 시작되면서 학교라는 시스템이 만들어진 거니까 학교의 역사도 그리 길지는 않죠. 뒤집어서 생각하면 학교의 모습을 다르게 상상하는 게 가능한 일이에요.
학교를 그만둔 여러 친구들을 만나봤는데, 다 각자의 이유가 있어요. 학교가 너무 답답하고 입시 체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나온 친구도 있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다른 식의 배움과 현장이 필요해서 나온 친구도 있어요. 누구는 그만둬도 되고 누구는 그만두면 안 되는, 그렇게 정해진 건 없습니다.
다시 아까 했던 이야기로 돌아가면, 우리 모두 방황하는 시간이 필요해요. 만약 지금 만화가 너무 보고 싶어서 학교를 그만두고 몇 달간 만화만 봤던 친구가 있다고 한다면, 그 친구는 몇 달간 만화를 보고 나서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내가 왜 만화만 보고 있지? 이러다 죽는 게 아닐까? 도태되는 게 아닐까? 내 인생을 어떻게 책임져야 할까?' 그 생각 끝에 다시 알아서 궤도에 오르게 돼요. 스스로 자기 길을 찾아가죠. 충분히 생각하는 시간, 불안해하는 시간, 방황하는 시간들이 없다면 자기 길을 제대로 찾을 수 없는 것 같아요.
저와 로드스쿨링을 했던 친구들 모두에게 이런 경험들이 있었고요. 부모가 나서서 걱정하지 않아도 그만큼의 불안, 그만큼의 걱정은 스스로 다 하더라고요. 학교를 그만두면 불안해서 스스로 생각을 더 해요. 또 당장 여행을 가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면, 그 활동을 통해 스스로의 불안을 이겨내기도 하고 알바생이라는 위치에서 자신이 속한 곳의 구조를 생각하게 돼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사회를 읽어내기도 하죠.
어딘가에 속해있지 않기 때문에 방황하는 시간들이 결국 그 사람을 생각하게 만든다고 봅니다. 확실히 하고 싶은 게 없는데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하는 아이가 '학교를 그만둬도 되냐'라고 물어본다면 전 '그래도 된다'라고 대답할 거예요. 그 친구는 스스로 불안해서 무언가를 찾을 거거든요.
그만두고 아니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생각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물꼬를 트는 상황이 허락되는 게 더 중요하겠군요.
맞아요. 결국 스스로 자기 삶을 살아야 하는 거잖아요. 주변에서 아무리 걱정해봤자 자기 삶을 스스로 살지 않으면 그 생은 내가 살아내는 생이 아니에요. '로드스쿨러'라는 말은 학교를 그만둔 아이들만 일컫는 게 아니라, 남녀노소 누구든 내가 어디에 있든 스스로 길에서 배우고 사람들과 연대하면서 길을 찾는다고 생각하면 자신에게 그 이름을 붙여줄 수 있는 거예요.
저도 옛날에는 학교를 다니고 다니지 않고가 중요했어요. 선을 긋는 데 필요하니까. 지금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결국 영화를 하고 싶은 사람은 영화를 하기 위해 모이고, 좋은 작업을 하려는 사람은 좋은 작업을 하더라고요. 좋은 작업을 하는 사람 혹은 좋은 이야기를 하는 게 제일 중요하지, 그 사람이 학교를 다니든 안 다니든 대학을 갔든 안 갔든 어디를 갔든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아마 죽을 때까지 저는 로드스쿨러일 거예요. 그리고 제가 다시 학교에 다닌다고 해서 로드스쿨러가 아닌 건 아니듯, 넓은 의미로 이 단어를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정체성을 ‘글 쓰는 다큐멘터리스트’라고 정의하셨는데요. 영상을 택한 계기가 따로 있나요?
어렸을 때부터 다큐멘터리를 좋아했어요. 다른 아이들이 애니메이션을 볼 때 유독 다큐멘터리를 잘 봤던 것 같네요. 리모컨의 주도권도 제게 있었고.(웃음) 고래와 상어가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자랐어요. 엄마 아빠가 해주지 않는, 해줄 수 없는 세상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다큐멘터리가 재밌었어요. 엄마 아빠가 다른 문화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인지, 다른 사람들의 문화와 다른 세계를 마주하는 일이 저한테는 그리 어렵거나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경계를 넘나들면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다큐멘터리를 계속 보다가 ‘그럼 나도?’ 하면서 19살에 처음 다큐 작업을 시작한 거예요. 많이 어려웠고 힘들어서 그만둘까 했지만, 완성 후 사람들을 만나서 하는 이야기가 흥미로웠죠. 결국 작업을 좀 더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은 전공을 하며 작업하고 있는 거예요. 삼세 번 해보고 결정할 건데, 지금이 마지막 세 번째 도전이네요.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인가요?
촬영하면서 가장 힘든 것 같아요. 극영화는 그림을 다 만들고 나서 (시나리오, 배우 등) 그대로 만들면 되지만, 다큐멘터리는 내가 상상하는 스토리라인과 시놉시스를 두고 작업을 시작해도 현장에서 다 뒤집어지기도 해요. 이 사람이 A라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B라고 대답하는 경우도 있고, 갑자기 촬영을 거부하는 순간이 오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현장에서 뒤집어지는 일들이 많아서 불안감이 가중되죠. 그래서 촬영할 때 힘이 드나 봐요.
그런데 그게 다큐멘터리의 묘미이기도 해요. 왜냐하면 편집할 때 결국 이야기가 뒤집어지기도 하고 제가 가져온 그림들을 어떻게 쌓아나갈지 고민하게 되거든요. 편집 과정에서는 이야기를 테트리스하듯 맞춰볼 수 있어서 재밌어요. 촬영은 그 밑그림들을 가져오는 작업이니까, 그림들이 내 눈 앞에 보이지 않을 때는 두렵기도 해요.
긴 시간의 끝이 보여요. 마지막 질문인데요, 삶에 영향을 준 책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제가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스승님의 작업물이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전쟁과 여성>(김현아)을 보면 베트남전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학살당했는지, 그 안에서 여성은 어떤 기억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또 이 책 안에는 여러 전쟁이 나오는데요. 그 전쟁 속에서 여성들은 어떻게 기억을 하고 있고, 여성들의 기억이 왜 공적 기록이 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요. 여성은 소수자를 대표하는 개념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여성 혐오도 그 맥락에서 읽어낼 수 있고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배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누가? 왜 배제했을까? 배제된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를 추적하다 보면 세계가 보이는 것 같아요. 전쟁으로 뒤덮인 지구에서 소수자의 이야기를 읽는 건, 지구 전체를 읽는 거라고 생각하고요. 19살에 처음 읽었지만 여전히 중간중간 다시 읽으면서, 어떤 작업을 해야 할지, 불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을 어떻게 호명할지 메시지를 전달받아요.
# editor's comment
그는 자신이 택한 이야기가 재밌고 좋아서 하는 거라고 했다. 남들이 하지 않은 이야기, 우리가 모르고 있던 이야기, 하지만 너무도 같은 우리들의 이야기. 그리고 덧붙였다.
이야기가 저에게 스스로 다가오는 거죠. 작업을 하다 보면 제가 굳이 이야기를 찾아 나섰다기보다는요. 그럼 '나는 이 이야기를 해야 할 운명이구나'라고 생각해요. 그런 마음으로 작업하는 거고.
운명처럼 자신에게 온 이야기를 어르고 만지고 다듬어 꺼내는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한 권의 사람책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 반 전의 대화를 정리하는 지금도 비슷한 기분을 느낀다. 베트남전의 보이지 않는 목소리를 찾아 떠났던 그의 기록에 관한 기사*와 내게 CODA를 처음 알려준 영화**도 함께 추천한다.
* 관련 기사: 국가폭력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자화상 - 기억의 전쟁(씨네21, 2016.11.14)
** 미라클 벨리에(La Famille Belier, The Belier Family,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