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YEDITOR Mar 09. 2020

솔직하고, 유연하게

의미 있는 티키타카를 위하여  

 오랜만의 편지네요. 무려 두 달여 만에 보내는 답장이군요. 언젠가 J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죠. 매일 생각의 흐름이 바뀌어서 하루만 지나도 쓰고 싶은 말이 바뀐다고. 제게는 1월과 2월이 그런 시간이었어요.


 2019년 12월, 함께했던 회고*로 찐하게 젖어든 감상도 잠시, 어느새 2020년이 와 있더군요. 때 되면 오는 손님이라는 걸 알면서도 올해는 유독 불청객처럼 느껴졌어요. 마음의 문제겠죠. '지금쯤이면 뭔가 정해졌어야 하는데',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왜 갈수록 더 모르겠지?' 이런 생각이 벽에 부딪혀 튕겨 나오는 공처럼 머릿속을 휘휘 젓고 다녔달까요.

* 관련 글: 회고하는 사이 (2020.01.03)


 회사에 다닐 때는 신년 목표를 정하면 함께 어떤 그림을 그릴지 구상하고 각자 선을 그어가며 완성해 나가잖아요. 그런데 덜컥 소속 없는 존재가 되니 어디서부터 선을 그어야 할지 막막하더라고요. 아니, 선은커녕 점조차 찍을 수 없을 것 같은 날도 왜 이리 많은지. 2019년 4/4분기를 바쁘게 달리고 나니 진짜 고민이 시작되었죠.


 결국 '나는 무엇을 할 수 있고, 좋아하며,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일하며 성장하고 싶지?'까지 본격적으로 생각이 미쳤습니다. 이 광활한 질문에 나름의 답을 내놨던 시기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돌고 돌아 또 이 질문 앞에 서야 한다니. 먹고사니즘과 여러 질문이 뒤엉켜 오자 묘한 좌절감과 무기력함이 밀려왔어요. (이거 퇴사하고 3개월 정도 지나면 오는 증상 맞나요? (퇴사)슨배님?)


두 번째 플레이샵은 제주에서. 그런데 2박 3일간 둘이 같이 나온 사진이 이거 한 장...? 실화입니까 @jjinkim


 솔직히 말하면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명확한 선은 긋지 못했어요. 하지만 2월에 찍어본 몇 개의 점들이 저를 다독여주었죠. 그중 하나가 2월 초 제주도로 떠났던 플레이샵(playshop)이에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맛있었던 음식과 제주만의 고요한 풍경은 기본으로 치고, 지금 곱씹어 보니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세 장면이 있네요.


scene #1: 근사한 숙소에 들어서서 충분히 감탄하면서도 '어떤 요소가 왜 좋은지, 또 어떻게 고객 경험을 높여주는지' 관찰하고 경험하며 이야기 나눴던 순간

scene #2: 아이디어가 콘텐츠로 만들어지려면 어떤 뾰족함이 필요하고, 우리가 말하고 싶은 메시지와 어떻게 연결돼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질문하며 정의했던 순간

scene #3: 2020년에 따로 또 같이 일하기 위해 가지치기할 부분을 찾아 우선순위를 세우고, 실행 계획을 세운 순간


 세 장면의 공통점이 뭘까요? 마침 <일말의 희희>를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한 책에 이런 말이 나오더군요.


함께 협의해나가면서 '기분 좋게 설득당한다'라는 요소는 무척 중요한 부분이야. 왜냐하면 내가 놓치고 있던 부분을 깨우치거나, 혹은 미처 몰랐던 새로운 것을 배우면서 내 지평이 커지는 거니까. 거기에는 일을 잘하고 즐기는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어떤 지적인 쾌감 같은 것이 있지.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공정한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함께 일하면서 여러 가지 것들을 신뢰하게 될 거야.

-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124p


 서로를 향한 존중과 이해에서 나오는
'솔직함'과 '유연함'


 세 가지 순간을 통틀어 제가 느낀 것은 이 두 가지였어요. 언뜻 봐선 당연한 말인데, 경험의 옷을 입고 튀어나온 단어인 만큼 강렬하게 다가온 거죠.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이란 말을 쓰기는 쉽지만, 서로에게 '기분 좋게 설득당하는' 경험을 주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잖아요. 내 생각을 어필하면서도 상대가 생각을 펼칠 때는 최대한 귀를 기울여야 하죠. 이 모든 게 공동의 목표를 더 잘 이루기 위함이라는 사실도 잊지 않아야 하고요. (가끔 내 주장이 맞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오류에 빠지기도 해요) 그러려면 한 움큼의 여유도 지녀야겠죠. 설득할 때도 충분히 마음을 담아야 할 거고요.


 물론, 생략된 행간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고민하거나 아슬아슬한 경계를 타는 순간도 있겠죠. 하지만 2월의 제주에서는 신뢰를 쌓을 수 있는 솔직함과 유연함을 만날 수 있었달까요. 우리가 추구하는 소통은 '하고 싶은 말을 직구로 내던지는 솔직함'이나 '상황에 급급하게 맞춰 행동하는 유연함'이 아니라는 걸 한번 더 깨달았어요.

 

주차가 무서워 뚜벅이로 다닌 2월의 제주 (다음엔 차를 빌릴 것이다...)


 우리가, 또 우리와 함께하는 팀이나 파트너가 이런 방식으로 소통하면서 일할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신뢰하게 될까요? 그런 신뢰가 스며들어 만들어진 콘텐츠는 무엇이, 얼마나 다를까요? 얼마 전부터 보고 있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앱스트랙트: 디자인의 미학> 시즌1 나오는 일세 크로퍼드(인테리어 디자이너)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휴머니즘과 웰빙을 중요시하는 그와 그의 팀은 이케아와 활발히 협업하고 있습니다)


"질문하기와 감정 이입하기는 아주 처음부터 저와 함께했던 것들이에요. (중략) 질문과 감정 이입의 과정을 거치면 우리가 바라보는 사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요."

"좋은 제품을 만드는 일은 절대 간단치가 않아요. 스케치를 그려서 벽에 붙인다거나 제조사에 캐드 도면을 보내면 끝나는 게 아니에요. 디자인은 제조사와의 관계 속에 실현되니까요. 협업이 잘 이뤄질 때 늘 최상의 결과가 나오죠."


 자신의 이야기를 쌓아간 사람에게 나오는 확신의 언어를 들으니 조금 정신이 돌아오네요. 지금 제가 경험하는 것들이 쌓여 언젠가 나의 언어로 나올 테니까요. 저와 J의 찰진 티키타카, 그리고 각자의 분투가 우리만의 '확신의 언어'를 만드는 과정이라고도 생각해봐야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3월에도 일단 점을 찍어보려 합니다. J의 3월도 응원하면서요.


  

매거진의 이전글 회고하는 사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