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멈추어 서 있지 않은 것이 있을까. 자연 그대로의 사물도 있고 인간의 인위적 움직임에 의해 머물러 있는 것도 있다. 그 나름대로 모두 이름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모든 것은 멈추어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멈추어 있지만 멈춘 것이 아닌 것 움직이지만 움직이는 것이 아닌 것이 혼재한 상태다.
가끔은 붙박이처럼 꼼짝없이 움직이지 않고 멈추고 싶은 순간이 생기기도 한다. 생각만 그렇다. 정말로 움직일 수 없다면 무서울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죽음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멈춤과 움직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하는 이는 드물다. 현재 다른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한 나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기계가 멈추고 꽃이 시들고 열매가 떨어지고 하는 것은 생물(?)에서 무생물로 바뀌는 것이다. 곧 더 이상 생명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왜 생명력을 상실했다고 할까 어딘가 활용된다면 아직은 생명력이 있는 것과 같지 않을까.
정물화는 생명력이 없는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죽은 고기, 화병, 시든 꽃, 책, 과일 등 다양한 것들이 등장한다. 그러면서 그 배열을 통해 생명력이 느껴지게 만든다. 그렇다면 그림은 살아있는 것이 될 수 있을까? 어쩌면 무생물이라는 의미조차 그림 속에서는 그 의미를 잊어버리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관객이 그림이 살아있다고 생각한다면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물화는 사실화다. 현상을 똑같이 재현해 사실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더 깊은 의미를 전하게 만든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고 더 깊은 심연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 잠시 휴식 시간이 필요할 때 정물을 바라보자. 자신도 정물이 된다. 하나의 정물을 보면서 또 다른 정물을 생각하는 그림. 그런 그림이 있다.
전시장 작품
이인숙 작가 작품은
맑은 느낌을 주는 수채화같다.
정물이지만 두텁지 않고 가벼운 느낌을 준다.
하나하나의 작품이 주는 선명함은 청량감마저 감돈다.
그런 느낌이 좋다.
밝고 신선한 느낌. 그것이 마음이다.
업어진 화분들 속에 홀로 자리 잡은 새싹이 있는 화분 하나. 모두가 사라져도 나는 피어난다는 무한의 힘. 희망을 준다.
테이블 가장자리에 반쯤 물이 담긴 컵이 위태롭게 쌓여있는 모습은 어쩌면 안정이라는 편안함을 주기도 한다. 백척간두 벼랑 끝에서 느끼는 안정감이란 무엇일까. 한 발짝 더 나가면, 조금만 기울면 떨어질 나락인데 무엇이 안정감을 줄 수 있을까. 모든 것을 버린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 평안이다. 잃을 것도 더 얻을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모두 포용한 마음이다.
백척간두의 위험 앞에선 나라 운명을 말하기도 하지만, 작가로서 마지막 자존감이다. 어지러운 나라의 위태로움을 나타냈다면, 저 그림은 영원히 위태로움에 머물러 있겠지만, 어느 날엔 그 위태로움이 자장 자연스러운 평온을 말하게 될 것이다. 꽃가지가 너무 무거워 옆으로 쓰러지는 꽃병은 내 삶의 무게만큼 위태로운 바깥 환경 탓일 것이다. 가만히 잘 서 있는 꽃병이 넘어진다는 것은 누군가 인위적 자극을 가했기 때문이나 꼭 넘어뜨릴 이유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꽃병은 위태롭다. 마지막 넘어지기 순간이다. 작가는 이 꽃을 넘어뜨리지 않았다. 아마도 오뚝이 마냥 일어설 수 있는 의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꽃병을 밑이 둥글고 넓게 표현했다. 누군가가 힘으로 밀어도 넘어질 듯 위태로움만 보여줄 뿐 실제는 곧 일어설 힘이 있음을 알린다. 정물 속에 위험과 평온함이 공존하는 그림. 연말 이인숙 작가 작품을 통해 마음의 소용돌이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는다.
* 20161228 글 옮김
이기적인 시선
갤러리쿱(현재, 아트버스카프)에서 전시되고 있는 이인숙 작가의 전시 '이기적인 시선' 은 한마디로 맑다. 정물의 느낌이 그렇고 색감이 그렇고 투명한 사물을 대하는 듯한 분위가 그렇다. 사진으로 보면 느낄 수 없는 분위기가 전시장에서 만난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보는 눈을 시원하게 하는 작품에서 웃음을 찾는다. 전시장의 작품은 큰 작품과 소품이 어울려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림 속 작은 사물이 캠퍼스 전체를 가득 채운 것처럼 정물은 흔들림 없이 공간을 장악했다. 큰 작품의 정물이 주는 이미지는 압도하기보다 공간을 더 넓게 만들어준다. 소품이 보여주는 소박함과 다름이다. 정물은 단순히 사물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지만 그 속에 무수한 의미를 담아낸다. 작가의 생각과 사회 모습을 반영하기도 하고 인간 욕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드러난 사물을 통해 의미를 일깨우는 것이다. 어떻든 간에 관객 입장에서는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니 좋은 것이다.
이인숙 작가의 '이기적인 시선'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보는 이 스스로 해석하기를 바라는 작가 의도대로 도자기, 꽃병, 꽃 등 그 하나하나를 풀고 묶어 관객들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면 그보다 좋은 해석은 없으리라.
어느 작품에선 꽃이 주인공이고 어느 작품에선 도자기가 주인이 되는 그렇지만 그 이야기에서 누군가 꽃과 도자기를 통해 바람과 소리를 만나고 때로 채워야 할 곳을 비워야 함을 일깨우는 진실의 이야기도 듣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정물을 '맑다'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도 좋겠다. 작품을 보는 순간 크리스탈의 투명함 맑고 깨끗한 소리가 들려오는 듯싶기 때문이다. 저 작품 하나가 내 공간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을, 내 삶을 맑게 정화해줄 듯하니. 싱그런 향기가 공간을 가득 채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