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귀희 작가의 그림을 보면 자연의 경이로움을 보여준다면 이러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지에 번지듯 스며든 색의 농도에 따라 보는 이의 관점이 달라진다. 부드러운 여운과 함께 다가오는 은은한 뒷배경의 묵직한 느낌. 그것은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뭐지 하는 의문과 신비로움을 느끼게 하는 색이다. 수묵水墨이 주는 여운이다.
홍귀희, Self-so, 78*72.2cm, 2020, 개인소장
묵향 그윽한 이 작품은 2021년 7월 강원국제예술제와 서울옥션이 함께 진행한 경매(ZEROBASE × 강원트리엔날레)에 나온 작품이다. 위아래 두쪽으로 만들어졌다. 두개가 한작품이다. 한여름의 해가 지고 난 이후의 여운이 감도는 바다를 연상하게 만든다. 빛은 사라졌지만 산 너머에서 비춰주는 조명 같다. 또는 아스라이 밝아오는아침 여명인지도 모르겠다. 내 눈앞의 것들은 어둠에 싸여 있는데 저 멀리는 밝은 빛이 환하게 빛나는 풍경같은 분위기는 자연의 신비로움을 가득히 간직했다.
작가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먹을 갈아서 사용한다고 한다. 시중에 나오는 먹물을 이용해도 될 텐데 품이 들어가는 먹을 갈아서 사용한다. 먹을 가는 그 시간이 어쩌면 작가가 그리는 세상으로 다가가는 길목인지도 모르겠다. 길고 긴 시간 동안 집중해서 먹을 갈아야 하는 고통, 그것은 길 떠난 여행자의 시선과 다르지 않다. 먹의 농도에 따라 작품은 달라지고 그 한 획의 결정에 대해 수정이라는 말을 꺼낼 수 없는 한번 가면 되돌릴 수 없는 한지(韓紙) 재질에서 우리는 이미 세상에 경이로움을 던졌다.
작가의 이전 작품에는 나무가 나온다. 나무를 통해 시간의 경계선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나무가 사라졌다. 사물의 흔적을 지웠다. 사물 자체를 자연의 일부분으로 놓아 흡수시켜 버렸다. 색의 농도에 따라 그 분위기를 느끼게 만들어 놓음으로써 상상과 자연의 경이로움을 체험하게 했다.
작품 제목이 self-so 다. 자연 그 자체, 자체가 그러한 것이다. 옛 부터 존재했고 지금도 그러한, 그렇지만 있고 없음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다. 자연이라는 개체를 사실 그대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들어 온 것을 마음을 통해 다시 드러냄으로써 본연의 것은 사라지고 감성만 남았다.
덩어리를 빻아서 가루를 만든 후 고운 채로 쳐서 가루를 흩날리듯 거르고 거른 것이 남았다. 작가는 작품을 하기 위해 몇 시간씩 먹을 갈고 그것으로 일필휘지(一筆揮之)하듯 그림을 그린다. 의도하여 구도를 설정하지 않음으로써 반복되는 변화를 없애고 그때그때의 감성이 담겨 나온다.
자연을 그릴 때 누구는 강을 그리고, 누구는 산을 그리며, 누구는 바위와 꽃을 그리지만, 작가는 그 모든 것의 형상을 먹물에 담아 하나의 선으로 드러낸다. 그것은 바로 자연 그 현상 자체에 대한 표현이다. 작품을 보며 상상하는 것, 그림 속에서 유영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문학 속의 이야기가 된다.
부분확대 사진
그동안 몇 번의 전시에서 작가의 작품을 볼 기회가 있었지만 때로 너무 묵직한 분위기에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감으로 자리를 벗어나기도 했었다. 그 오랜 시간의 흐름을 통해 오늘 이 작품을 다시 바라보며 상상과 경이로움에 대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껴 본다.
이 푸른빛의 자연은 내 자신의 마음의 빛 인지도 모른다. 평화로움 일수도 있고 다가올 먹구름의 폭풍 전야일 수도 있으며, 아침의 여명을 알리는 기운 상승의 순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과 자연은 일체다. 인간의 모습을 자연에 빗대고 자연의 모습을 인간에 빗대어 스스로 경이로움을 만든다. 오늘 깨어나는 시간의 흐름, 공간의 기억을 바라보며 자연과 나를 떠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