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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물 Feb 28. 2022

봄날의 향기에 취하듯, 김현영 작가

Only one

 

낡은 패널 위 오래전 누군가의 그림이 남아 있는 듯한 느낌. 아니다. 아침햇살에 저 멀리 들판에 홀로 피어난 꽃처럼 아련히 흔들리고 있었다. 분칠을 한 듯 뽀얀 이미지는 수많은 세월의 흔적과 인연을 떠 올리게 한다. 이 작품을 처음 접한 첫인상이다. 작가는 왜 선명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거부했을까?     


얼핏 안경을 쓰던 사람이 안경을 벗어 버리고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의 그 황홀함 같은 게 어렴풋하다. 사물이 번져 보이며 흐릿한 영상이 주는 또 다른 세계다. 이미 각인되어 있는 일상의 모습은 새삼 뚜렷하게 영상이 맺히지 않는 것이 더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이다.     


사물의 윤곽을 뚜렷이 하지 않음으로써 더 가까이서 더 깊이 보아야만 작품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어쩌면 저 시각 너머에 맺혀있는 잔상을 끌어오는 노력을 해야만 작품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든 것이 아닐까.  

   

 “은연중에 스며들어 건넨 위로는 시각 너머의 이미지를 끌어온 잔상같이 각인되어 버렸다. “     


그러나 조금 더 작품을 바라보면 오래됨, 낡음을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이 수반되었는지 알게 된다. 칠하고 깎아낸 것은 세월을 뛰어넘은 흔적이다. 어느 세움 간판처럼 서 있었을 듯한 모습에서 그 흔적과 여운을 느끼게 만드는 그것은 바로 애착이자 그리움이다.     


수없이 중첩되어 칠하여진 그 표면을 문지르고 칠하고 칠하여 표면이 낡아버린 것 같은 작품은 시간은 현재지만 이미 과거를 지나 다시 현재를 보게 했다. 그 낡음으로 인해 보는 이는 낡음이 아닌 새것을 바라본다.     

어렴풋한 이미지가 아닌 더 깊이 베인 작품의 색을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다가선다. 형체마저 뚜렷하지 않은 커다란 꽃 한 송이가 주는 여운은 어느 수많은 꽃보다도 강하다. 아이들이 장난하듯 크레파스 칠을 해놓은 대문짝 위 그림처럼 지워지지 않는 모습으로 영원히 남아 있을 것 같다.     


누군가 그려놓은 한 송이 꽃을 본다. 다음 아이는 누가 그렸을까를 생각하며 Who are you.라고 물었다. 그리고 다음 아이는 또 다른 단어로 서로의 질문과 답을 찾아가던 그  장소 그 느낌. 나는 그 낙서의 흔적마저 만들어 낸 작가의 정신이 부럽다.  작가는 어떤 생각으로 이렇게 작업을 이어 나갈까. 어느 때는 풍경으로 어느 때는 자신만의 기호로 끝없이 만들어내는 부호는 그대로 작품이 되었다.    

 

아이들이 수없이 주고받은 대화의 내용이 담긴 그 대문짝을 덜렁 들어서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내 앞에 갖다 놓은 것처럼 작가는 시간을 거슬러 사물을 보여준다. 거스른 것이 아니라 앞서간다. 나는 흔적을 좇아 뒤따라간다. 부드럽지만 부드럽지 않고 연하지만 연하지 않은 작품이 주는 상상의 세계는 어쩌면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처음 볼 때보다 다시 보았을 때 더 흥미롭고 관심을 끄는 작품, 김현영 작가 그림은 잠깐 졸음 속에 용궁을 다녀온 토끼처럼 신비의 세계를 거닐게 한다. 몽환적인 분위기라는 단어 속에 그리움, 추억, 흔적, 사랑, 미래라는 단어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상상하는 자 그 꿈을 이루게 할 신비의 세계처럼 작품은 볼수록 깊은 안갯속으로 끌어들인다.      


오늘 내가 본 그 작품이 내일 내가 보았을 때 새롭게 느껴지듯이, 낡은 간판 위의 흔적처럼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그 낡음 속의 새로운 흔적이 안개처럼 깊게 감싸고 오랫동안 머물러 있다.     

"마음에 잔가지가 자랄 때 그림을 생각한다"라는 작가의 표현처럼 그림을 보는 이의 마음에도 그림이라는 잔가지가 자랄 때 그 그림은 아름답게 보인다. 작가의 작품 속에서는 은은한 감성이 묻어난다. 그림 속의 소재부터 표현까지 작가가 만들어 내고자 하는 이미지는 감성에 젖어있다. 일부는 슬프고 일부는 고민이고 일부는 활짝 핀 기쁨이며 일부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작가의 작품을 볼 때 선뜻 선택보다는 보고 또 보고 감성에 젖어들고픈 마음이 인다. 작품은 안개에 둘러싸인 숲과 같다. 사물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감추어놓은 형상의 추상이다. 어느 순간 환하게 밝아오며 공간을 활짝 열어 반겨줄 것 같은 몽환적 느낌, 은연중에 스며든 그 감정의 위로가 작품이 주는 선물이다.  그의 작품은 봄날의 향기같이 가슴에 스며든다.  그냥 따뜻한 햇살 받으며 한잠 자고 일어나면 될 것 같은 몽환적인 분위가 좋다.



Only one, 2019, mixed media, 90.9*72.7 2020년 12월 국립 춘천박물관 전시작품 촬영


*2020년 12월 국립 춘천박물관 전시 작품을 보고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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