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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물 Apr 13. 2022

노텐티엔도Noteentiendo, 한영욱 작가

알루미늄에 얼굴



한영욱 작가 전시가 고향인 춘천에서 노텐티엔도Noteentiendo(알 수 없는 너)라는 제목으로 2022년 4월 7일 ~4월 30일까지 춘천문화예술회관에서 개최되었다. 공간을 가득 채운 대형작품은 이 공간에 저런 작품이 왔나 할 정도로 기분 좋게 전시장 분위기를 띄운다. 지역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전시 대작이라서 더 마음이 끌린다.


전시장을 가득메운 얼굴, 작품 속 얼굴은 실존 인물일까 아니면 가상인물일까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빛에 의해 반짝이는 표면과 선은 강렬하면서도 부드러운 이미지를 전한다. 작가의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수년 전이다)는 전율 같은 것을 느꼈었다. 페인팅이 아닌 판을 끍어 표현한 것 자체가 새롭고 그 작업 과정이 느껴지는 것 같아 몸에 전율이 흘렀다. 판을 끍어내는 소리가 그냥 전해 오는 듯한 것이었다. 가는 실선으로 표현된 작품은 정밀하면서도 아주 오랜 시간 투자해야 하는 고통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이번에 작가의 초기 과정까지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회를 만났다.


이번 전시처럼 2005년 초기 작품부터 근래 작품까지 다양한 작품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기회는 앞으로도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동안 국내 전시(2008, 2011, 2013, 이번이 네 번째)를 거의 하지 않았으니 더 귀중한 전시가 아니겠는가. 어쩌면 이 기회는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전염병이 만들어준 기회가 아닐까. 아무튼 작가의 고향에서 전문 전시관도 아닌 공간에서 작품 전시회를 열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귀한 시간을 주었다 할 것이다. 특히 이번 전시는 일부는 해외 갤러리 소장 작품이 들어오고, 일부는 박영덕화랑에 소장되어있던 먼지 묻은 초기 작품들까지 51개의 작품이 총망라해서 나온 것이라 한다.


7일, 오픈식에서 잠깐이나마 작가와 대화를 하며 작품 설명을 들었다. 그가 처했던 어려움부터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열정적으로 작업을 했는지, 그리고 기회를 얻기 위한 노력과 결국 기회를 잡고 세상으로 나갈 수 있었던 주변의 여건,  그 모든 것이 어쩌면 작가에게는 짧은 시간 완벽하리만큼 독보적인 자리를 잡았고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는 여력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기 작품들


어려운 시기에 작업했던 작품 중 소품에는 사람, 자전거, 자동차, 새, 가로등, 얼굴 등 주변의 모든 것을 표현했다. 그 속에는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그런 것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작가의 표현대로 마구 그어댔던? 시기 어둠을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치던 시기의 작품, 그것이 함께 있어 현재의 작품과 극명한 대비를 느끼며 작가의 성장과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 지금의 작품과 단순 비교하면 거친 상처로 가득한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특히, 슬리퍼를 신고 엉거주춤 서있는 사람, 전신상 작품은 무표정이다.  당시 사진을 찍어 작업을 했다고 하는데, 작가가 살던 근처에 고시방이 많았는데 그곳에서 지내며 하루벌이 노동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사람 중 한 명을 찍었다고 하는데, 하루를 빌어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희망이 보지 않는 그런 삶의 두려움이랄까. 삧어나온 발가락을 통해 그의 삶의 의지를 생각해 보게 하는 작품이다. 그러면서 작가도 어려운 시기를 보내던 시절이니 그의 모습에 자신의 탈출 의지도 오버랩되어 더욱 강렬하게 상처를 내어 작품을 표현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작가는 처음엔 은박지에 작업을 하다가 나중에 자신의 작품에 최적인 알루미늄판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것을 통해 정교한 인체의 모습을 발현한 것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실존인물이 아니다. 겹쳐진 이미지다. 다만 이번에 전시된 작품 중 어머니의 현재 모습과 결혼식 당시 모습은 실제 초상화라 한다. 이것은 사랑이다. 그리움일 것이다. 인간 자체에 대한 고뇌  삶의 모든 것이 드러나는 얼굴을 통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드러내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그의 작품에 드러난 얼굴은 어느 국가 어느 인종인가를 알 것 같으면서도 구분하기 어렵다. 중첩된 모습이기 때문일 것이다.


작품 속에 드러나는 얼굴은 남녀를 불문하고 보는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인다. 아예 중첩된 구조를 통해 입체적 표현임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작품은 날카로운 송곳에 의해 표현되었기에 그 날카로움과 색의 조화에 의해 다르게 느껴진다. 초기 작품은 색감이 없는 차가운 은박지에 알루미늄 위의 작품으로 선을 통해 음각을 표현하고 그 감정을 드러냈다면 지금은 다양한 색을 통해 그 이미지를 더 정교하게 표현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의 작품을 조명이 없는 암실에서 그 작품만 드러냈을 때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날카로운 끍힘의 표현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작품의 원래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배경을 없애고 얼굴만 바라보는 그 시선 속에는 오직 작가의 손길이 머문 흔적을 통한 형태만 남아있다.

 

어쩌면 한영욱의 작품은 빛에 의해 작품이 완성된다고 할 것이다. 빛의 각도에 따라 밝기에 따라 작품의 이미지와 관객의 감정이 달라질 수 있다. 결국 보는 방향과 빛의 노출에 따라 작품은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를 거듭하는 것이다. 이것이 작가가 원하는 작품의 완성도 아닐까 싶다. 알루미늄이라는 차운 사물을 통해 전달하는 이미지 그것도 얼굴은 차가울 수밖에 없을 것인데 포근하다. 그것은 날카로움 속에 역동적으로 느낄 만큼 작품이 보여주는 입체적 모습에 기인한다.



그의 작품 중 인물은 모두 관객과 눈을 마주치고 있다. 반짝이는 눈동자는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울만한데도 그렇지 않음은 차가 철판 위의 작품이 부드러움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탕을 확대해보면 그 날가운 선들에 손이 베일듯하지만 그 아름다운 곡선과 직선 그리고 얽히고설킨 선들이 자아내는 흐름에 눈길을 뗄 수가 없다. 결국 정면, 한쪽에서만 작품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든다. 이리저리 움직이며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며 작품 전체를 꼼꼼히 살피지 않으면 작품을 놓칠 것 같은 감이 드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다양한 모습들이 집단으로 보일 때 작품은 전혀 다른 의미를 내포한 듯 보인다. 각자의 낮선 표정 속에 드러나는 군중의 심리는 하나의 얼굴에서 느낄 수 없었던 긴박감과 다양성을 읽을 수 있다. 이번 전시에 걸린 가로 880센티 초대형작품(Stranger)의 수많은 군중, 각자의 표정, 그러나 표정이 없는 듯한 얼굴에서 이 사회의 속성을 한번 들여다본다. 사회인의 감정을 충분히 살리고 있다.


한영욱의 작품은 결국 얼굴을 통해 인간 내면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그 얼굴은 특정인의 초상이 아니다. 세상 모든 이들의 얼굴을 겹쳐서 드러낸 중첩적 이미지다. 중첩된 이미지는 세상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 속에 드러난 순진무구한 어린아이 표정에서부터 늙고 주름진 노인의 얼굴, 성숙한 여인의 모습까지 우리 삶의 한 부분을 변화의 과정을 그려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보다 빛의 각도를 쫓아 바라볼 때 제대로 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인간 본연의 얼굴보다는 그 이면의 모습까지 바라보아야 할 이야기를 드러냈다. 나의 얼굴이면서 타인의 얼굴이기도 하고 얼굴 없는 무면 같은 얼굴인 것이다.


작가는 그동안 15여 년 갤러리 전속작가로서 활동해오던 것을 접고 홀로서기를 통해 세계로 나가려 한다고 했다. 코로나라는 암초를 만났지만 그동안의 기반을 바탕으로 더 넓은 공간에서 세상 사람들의 얼굴을 담았으면 좋겠다. 그의 작품에 드러나는 세상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작품처럼 그렇게 보이고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노텐티엔도Noteentiendo(알 수 없는 너)

*20220408 춘천문화예술관 개인전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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