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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물 May 18. 2022

명화 속 공간을 생각하다.

그림이 주는 힘과 에너지 

사무실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보며 공간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누구나 간직하고픈 소중한 공간이 있다. 내가 살았던 살아가고 있는 현장, 내가 머무는 특정 공간, 지나쳤던 공간에 대한 기억. 그것은 어쩌면 긴 세월의 시간 흐름과 연결되어 있다. 이런 물리적 공간 영역과 아울러 내가 지닌 마음속 우주공간 같은 심리적 공간 세계를 포함한다.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존재적 공간이다. 공간은 이야기다.


내가 지니고 있는 수많은 공간엔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한 장 사진 속, 그림 속 공간, 상상의 공간은 현실이지만, 상상의 공간이 되는 내면이다. 스쳐가는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고향집 앞마당의 풍경엔 그곳을 거쳐간 사람과 그곳에서 일어났던 이야기가 남아있고, 지나온 길목의 고목 아래는 세월의 흐름을 듣는 공간이 된다.


그 공간의 흐름, 공간의 이야기를 가장 잘 풀어내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책을 읽으며 공간 속에서 함께 이야기하고 영화를 보면서 그 공간에서 자유를 즐긴다. 그림을 보면서 그 원색의 느낌을 통해 시간여행을 떠나 화가의 붓끝을 쫒는다. 그것이 공간을 즐기는 행복이다.


우리들이 사랑하는 그림에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 공간의 기억을 함께 즐기는 것만큼 재미난 일이 있을까. 작가가 바라본 공간을 함께 바라보며 나누는 이야기, 그 속에는 흙먼지 묻은 삶의 철학이 함께 있다. 작가가 가졌던 공간에 대해 자의적인 해석을 붙여본다. 고흐 그림의 벌판, 터너의 바다, 모네의 정원, 박수근의 나목, 김정희의 세한도 그 속에는 작가의 세심한 마음 씀씀이가 담겨있다. 애정이다. 그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의 부분이다.


  



클로드 모네 정원에는 사랑이 있다. 가족을 위해 꾸민 정원, 그 아름다운 공간은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은 나와 가족의 공간이다. 그 아름다운 공간을 자랑하고 싶고 남기고 싶어 진다. 그의 그림에 남아 있는 따뜻한 온기는 바로 가족 사랑의 열기다. 정원에 쏟아부은 열정의 에너지다. 그의 그림은 부드럽고 안락하다. 가족이 머무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모네의 그림에 나타난 정원은 생의 에너지가 담겨있는 자신의 분신이었고 그 분신은 다시 그림으로 드러나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어느 곳에 이곳보다 더 아름다운 정원이 있을까.


빈센트 반 고흐가 삶의 마지막에 눈 담았던 풍경, 그림이 된 풍경에서는 그의 이야기가 남아 있어 작가의 발길을 쫓는 이에게 새로운 감성을 일깨우는 공간이 된다. 마지막 삶에 대한 결단, 그 고뇌를 통해 상상과 동질성을 느껴보려고도 할 것이다. 그것은 연민이자 아픔을 나누는 사랑이다. 생의 마지막에 만난 공간이기에 작가의 수많은 이야기 중에 하나지만 그 공간이 다른 것과는 다르게 보이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윌리엄 터너는 잔잔한 바다든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든 다양하게 그리고자 했다고 한다. 바다는 그에게 색다른 공간이다. 생생한 바다를 그리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태풍을 맞이하는 미친 생각이 보인다. 부서지는 파도처럼 어느 순간 배와 함께 사라질지도 모르는 그 순간을 기억하는, 그것은 그 공간만이 지닌 힘 때문이다. 저 멀리서 바라보는 파도는 그저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뿐이지만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는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온몸으로 그것을 받아 들일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그 공간에 자신을 가두고 그 느낌을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광기일 뿐이라고 할 것인가. 작가는 그 느낌 그것으로 관객의 눈과 뇌를 혼란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박수근 화백의 나목에는 고향에 대한 그림움, 가족,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을 수도 있고 자신의 모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낙엽을 지웠지만 우뚝 선 그 모습으로 찬바람을 이겨내고 다시 잎과 꽃을 피워내는 강인한 삶의 상징물로 말이다. 아니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의지의 대상이었을 수도 있다. 당 시대의 모습을 통해 그 속에 마음을 놓고 함께 고통받고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것은 바로 나와 동질적인 공간을 가졌기 때문이다.

거목의 작품에는 세월 이야기가 남아있어 우리는 상상하며 그 이야기를 듣는 관객이 된다.

 

김정희의 간결하고 삭막하기까지 한 세한도에는 정쟁에 밀려난 늙은 관리의 처량함이 묻어 있을 수도 있다. 다시 부활하고자 하는 의지도 있을 수 있으며, 잊지 않고 기억해준 제자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이 담겨 있기도 할 것이다. 그 결한 표현에 대한 해석은 그 관계 그 공간에 대해 충분한 이해가 동반되고 있기에 해석되고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술적인 미학을 끄집어내는 즐거움은 관객의 몫이다. 우리는 당시의 그들이 남긴 글과 이야기, 그리고 추측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진화시켜 나간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에 대해 다가가는 방법의 하나일 것이다. 그렇게 좋은 것을 즐기는 마음이야말로 또 다른 미학이 아닐까. 그래서 예술은 끝이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 대문사진: 이승철 작가 닭 조형,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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