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 있는 모란 작품을 보니 고향집 목단이 생각난다. 고향집에는 오래된 목단이 있다. 언제 적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어릴 때부터 있었으니 그 세월의 깊이가 꽤 나갈 것이다. 언젠가는 밭 가장자리에 있었고 어느 때는 도랑가에 자리 잡았다가 어느 날에는 집으로 들어오는 입구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했다.
시간이 흐르고 주변의 풍경이 바뀌면서 목단도 자리를 옮겨 그 삶을 이어갔다. 어떤 때는 호박 줄기와 함께였고 어느 때는 회향목 사이로 꽃을 피웠다. 세월은 흘렀지만 꽃은 언제나 같은 모양이다. 작은 봉오리가 맺혔다 싶으면 어느새 양손을 펴도 모자랄 만큼 커다란 꽃봉오리를 보인다. 목단꽃은 활짝 피고 나면 어느새 꽃잎을 지운다. 며칠의 시간을 놓치면 볼 수 없는 짧은 시간만 관상을 허락한다
나는 이 꽃을 모란이란 이름보다 목단이라고 불렀다. 어린아이 키보다도 더 큰 커다란 가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보다 더 커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어느 정도 커지고 나면 가지는 삭정이를 만들고 다시 새로운 가지가 자라며 생명을 재생시키기 때문이다. 지난달 고향집을 찾았을 때 목단의 죽어 있는 가지들을 정리해주었다. 그냥 두어도 문제없이 크지만 정리해 주면 조금은 더 깔끔하게 피어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다. 그때 싹을 틔우듯 빨간 눈이 보였는데 지금쯤 봉우리를 만들었지 않을까 싶다.
목단은 부귀영화를 상징한다고 하여 귀하게 여겼다고 하지만 그것보다도 볼 때마다 화려하게 피어나는 큰 붉은 꽃잎과 꽃받침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모습이 너무 귀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 화사함은 어느 꽃도 쫓아오지 못할 정도로 풍부한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때를 놓치지 않고 피어나는 꽃이 감사함은 그 모습에 반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거실에 핀 모란꽃의 화사함이 내 고향집 마당에 피어난 꽃 같아 더욱 사랑스럽다. 작품속 긴 줄기를 이룬 모란은 아래쪽에 두 송이 꽃을 피우고 위쪽에 하나의 큰 봉오리를 활짝 피어 젖혔다. 수묵으로 피어난 모란은 그 대비를 통해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 모란이 꽃 중의 꽃이라고 하는 이유를 알겠다. 누구의 작품인지는 추측할 뿐이지만 작가의 명성이 무엇 중요할까. 보는 이 항상 기쁘니 그것이 최고다. 모란이 피어 있는 아침 밝은 햇살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