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연극인 등 예술인을 만나보면 많은 분들이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작품이 팔리지 않아서,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이 없어서다. 여기에 예술을 후원하는 손길마저 부족하다는 것이다. 예술가는 가난하다고 했지만, 가난한 것은 예술가가 아닌 우리 자신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여기에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먹고살기도 바쁜데 그런데 쓸 돈이 어디 있냐고. 이제 조금 먹고살기 시작했으나 아직도 거기에 자신의 소득을 분배하기에는 여유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진정 먹고살기에 바쁘고 예술을 모르고 쓸 여력이 없다는 것이 이유가 될 수 있을까.
경제적 여유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이 아닐까. 물질적 풍요는 어느 정도 이루었지만 현실 속에서 정신적 여유는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불빛이 밤거리를 비추고, 해외로 나가는 사람이 공항을 가득 채우고 있다. 진실 그들에게 미술전시장이나 연극 관람은 일 년에 몇 번 가느냐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영화 관람객이 늘고 야구장이 가득 차고 가수의 콘서트가 가득 차지만 그것은 일부분이다. 그 이상은 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투자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정신적 내면의 충족보다는 남들에게 보여주어야만 하는 관종關心病 같은 남을 의식하는 욕구가 문제다.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고 그가 하는 행동에 대해 외부로 보이는 것에 대한 씀씀이는 커지고 있지만, 자신의 내면을 가꾸는 것에는 여유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외부로 보이는 것 이외의 것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관심이 없다.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화가의 전시회나 공연장에 와서 티켓을 사고, 그림을 사기보다는 따로 불러서 고급스러운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양주 한잔을 사는 것이 자신의 자존심을 세운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고급스러운 차를 사고, 비싼 옷과 장신구를 걸치면서도 공연 티켓 하나 사기를 아까워하고 그림 한점 사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직도 남아있는 배고픔에 대한 두려움일 수 있을 것이다.
개발의 시대를 겪어온 사람들은 당시의 가난한 아픔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창피해하고 더 잘살기 위해 땀을 흘렸다. 그렇지만 그것을 보여주는 데 있어 외형적인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큰 건물, 큰 차, 비싼 음식이 나를 더 높게 보이고 성공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영향은 의외로 오랜 시간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 있다. 과도기적 시대를 보내고 다음 세대가 사회의 중심이 되었을 때쯤 우리도 마음의 부자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은 거리를 걸으면서 풍경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며 물질적 풍요를 숭배하는 자들을 경시하거나 부담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자유로운 여행자가 될 것이고 그러면서 세상의 사람들과 문화와 예술, 내 고향의 아름다음에 대해 토론을 즐길 것이다.
비싼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자극하는 감성이 깃든 그림 한 점에 마음을 빼앗길 것이다. 대중가요 콘서트뿐만 아니라 오페라와 연극, 거리공연에 관심을 갖고 함께 참여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즐길 것이다. 그것은 돈이라는 경제적 풍요가 아니라 내 삶의 중심을 물질이 아닌 정신으로 돌려놓았기 때문이다. 그 삶은 어쩌면 우리 선조들이 유유자적(悠悠自適)했던 삶의 의미를 알기 때문이다.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삶은 죽었다는 것이다. 설혹 배가 좀 고플지라도 정신적 충족을 통해 그것을 이겨내는 삶의 지혜를 깨달은 때문이다.
그런 마음이 들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지만, 주위의 변화에 자신이 동화되어 감을 스스로 느끼는 그런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과감히 말할 수 있다. 타인이라는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한 판단을 우선 할 수 있는 그런 가치관이 살아난 것이다. 그것은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잠재의식(潛在意識) 속에 감추어졌다. 때가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변화는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