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이라는 말속에는 허구 같은 느낌이 전해온다. 그렇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큰 것 속에서 껍질을 벗기고 남은 씨앗만 남아있는 결정체가 아닐까. 미술사의 흐름에서 추상은 사물의 변형과 단순화를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거나 철학이나 미학의 선언적인 표현이다. 다른 듯 하지만 하나다. 사실적이지 않은 것을 표현해 보이는 것이다. 추상抽象의 사전적 의미는 "여러 가지 사물이나 개념에서 공통되는 특성이나 속성 따위를 추출하여 파악하는 작용이다. 추상화抽象畫는 사물의 사실적 재현이 아니고 순수한 점ㆍ선ㆍ면ㆍ색채에 의한 표현을 목표로 한 그림. 일반적으로는 대상의 형태를 해체한 입체파 등의 회화도 포함한다."라고 한다.
우리나라 작가들 중에는 추상을 통해 자신의 미적 의미를 드러낸분들이 많다. 특히 서로 비슷한 방법으로 추상을 표현한 작가들이 있다. 김영주, 이응노, 남관 등은 추상에 문자를 결합한 표현을 보였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문자를 넣음으로써 확연한 의미 전달을 추구하였다.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이들은 우리 미술사의 근대화 1세대다. 서구의 미술 영향을 받아 그것을 자신의 내면으로 받아들여 작품으로 표현해 낸 세대인 것이다. 아마도 글자라는 것을 통해 서구의 문들 즉 수입된 추상 이마지를 따라가지 않고 우리 화 시켜 나가는 작업의 노력이 아니었을까. 앞선 자의 것을 따라가는 아류가 아니라 서구의 추상을 통해 우리 내면의 가차를 담아내는 노력의 결과라 생각된다. 그 결과로 이들은 자신만의 그림과 문자를 결합해 문자추상을 표현했다. 결국 같은 추상임에도 우리의 것이 스며들어 새로운 추상미술 형태를 만들어낸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추상은 작가의 사상을 압축하여 사물을 통해 드러내던가 아니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드러내는 작업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색을 통해 점과 선 면으로 보여주는 작업이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객과 작가는 교감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교감되지 않는 추상은 그냥 물감의 흔적에 불과하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추상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는 의미전달은 어떤 방식으로 이어질까.
가끔 서예 전시를 보면 한자를 추상적으로 표현하거나 그림같이 표현하는 작품을 본다. 작가 나름의 노력을 통해 창조해 내는 작품 속에는 글자를 단순한 문자가 아닌 그림으로 또는 추상적 표현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매체로 사용하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러한 노력은 결국 새로운 그림, 문자 추상의 영역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상형문자인 한자가 초기 의미전달을 위한 그림에서 시작되었듯이 예술이라는 것은 반복되고 반복되는 행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