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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물 Nov 02. 2022

작품의 완벽한 조화가 주는  부담

삼각점, 사선, 수평선 등 구도의 완벽함을 추구하는 듯한 조화가 주는 아름다움이 있다면, 어디선가 멀고 가까움과 수평의 조화마저 깨뜨려 버린 듯한 작품에서 평온함을 느끼기도 한다. 깨뜨릴 수 없는 공식의 틀속에 원근법과 대칭을 담고 색상의 변화마저 최소화한 작품 속에서 완벽주의 자의 결벽을 발견한다  


멋진 조형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면서도 결함을 찾을 수 없는 그 완벽함이 부담스럽다. 조금은 지적질하고 싶은 인간의 욕구를 차단당한 기분은 결코 잊을 수 없는 패배의 맛과 같지 않을까. 시대의 시류時流에 어울려 그 변화가 이루어지듯이 자유로운 영혼이 판치는 지금은 또 다른 규격의 틀로 들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모나리자의 미소나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같은 신의 작품처럼 모든 것을 다 갖춘 것의 부러움은 더없이 나약한 인간이 본성을 찾는 세계로 나가게 만들었다.




인간사도 같지 않은가. 너무 완벽한 것은 곁을 주지 않고 조금 느슨한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인간적이라는 말로 조금의 부족함을 더 높게 봐준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가장 완벽한 것이야 말로 가장 많은 허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닐까.


명화라는 가장 완벽한 작품들 앞에서 인간이 논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될까. 수십수백 년 동안 표현의 한계에 다다르며 칭찬한 작품 앞에서 누가 자신은 다른 시각으로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완벽함을 부정하는 순간이 있을 수나 있을까.


미술이라는 예술이라는 세계는 너무 오랫동안 완벽한 것에 대한 찬사를 읊어왔다. 더 이상 표현하면 안 될 것 같은 틀속에 가두었다. 과거의 시각에서 아직도 그 가치는 영원처럼 흘러가고 있다. 아니 그 시대에 멈추어선 명화 속의 마차다.




* 대문사진: 2022년 춘천 MBC 현대조각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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