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즐긴다는 것은 무엇일까.
누구는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고 누구는 듣는 것을 좋아한다. 미술품을 좋아하는 사람도 누군가는 자신이 직접 그리는 것이 좋고 누구는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을 즐긴다. 누구는 목공 작업을 좋아하고 누구는 운동을 좋아한다. 예술이란 것은 어쩌면 무한한 범위의 표현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모든 것이 하나의 예술 행위가 된다.
내 마음을 울리는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감탄하는 '아~~ 예술이다'는 표현은 자신의 감정이다.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느낌의 표출이다. 자신에게 충실했을 때 가능하다. 내가 지닌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중요하듯 타인이 이루어 놓은 것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 또한 중요하다. 그 모두가 즐기는 마음이 있을 때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예술이라는 단어가 만들어 내는 범위에 갇히어 그 틀을 생각한다. 스스로 즐길 수 있는 가치를 지녔는데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비교나 더 나은 것을 생각하며 그 가치를 폄하하고 있다. 자신의 가치를 끄집어내지 못한다. 우리는 무엇인가 멋진 것을 보거나 감탄할 상황에서는 예술이라고 말한다. 동조와 그 가치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다. 그렇다. 예술의 틀을 벗고 각자가 지니고 있는 가치를 드러내며 더 아름답게 변화시켜 나가는 노력이 필요할 때다. 누구와 비교가 아닌 나의 가치다. 예술은 항상 나와 함께 있었지만 꺼내지 못했던 시간을 되돌려보자. 그 가치를 끄집어내는 노력이 바로 이제 우리가 예술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해야 하는 이유가 되어야 한다.
오늘 내가 좋아하던 딱지 접기의 기술을 발휘하여 단단하고 균형 잡힌 것을 만들었다. 나의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된장 한 스푼으로 가장 맛있는 국을 만들어 낸 당신이 예술가다. 길을 걷다 주워 올린 돌 하나가 누군가에 감동을 줄 때 당신은 가장 아름다운 설치 예술가다. 집 앞에 예쁘게 가꾸어 놓은 정원 속의 꽃 하나가 누군가에 기쁨을 주었다면 당신은 가장 아름다운 정원 예술가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팝아트적인 작품들은 인간 내적인 모습을 가장 적극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품 중 하나라고 할 것이다. 자신의 감정에 구속받지 않은 형태로 직접적 또는 차용적 형식을 빌려 드러낸다. 그런 표현이 가볍고도 진솔한 모습으로 감정의 벽을 무너뜨린다. 묵직한 그림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을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 표현 방식이야 다양하지만 감정선에 닿는 순간 퍼져나가는 파동은 각자의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 오늘 수많은 작품 중 하나가 다가왔다. 느낌이다. 색과 그 구성이 알게 모르게 흥미를 끈다. 인연이라고 할까. 문득 다가오는 그 작품은 관심 가는 작품 옆에 무심히 있다가 어느 순간 관심의 대상이 바뀌며 선택의 순간에 선점된 것이다. 그것이 예술품이다. 선택되기 전에는 아무 의미를 담지 못하지만 선택되는 순간 이야기를 갖게 된다. 연결이다. 그 순간부터 작품의 이야기는 새로이 시작된다. 작가의 감성과 나의 감성이 합쳐져 또 다른 감성을 불러온다. 작품의 완성이다.
스테퍼스튜디오, 2024년 제2회 춘천아트페어 아르로드 작품
Stepper Studio 스테퍼 스튜디오의 ‘youth, play ground -64'은 게임의 한 장면이다. 청소년 시기 즐기던 미로 찾기다. 막히지 않는 길을 찾아 목적지에 다다르는 행동이다. 작품속 5마리의 강아지는 각자의 위치에서 길을 찾아가고 있다. 첫 입구의 당당함과 달리는 길은 막히기 일쑤고 시간은 흘러 조급해지는 순간에도 상황은 지속적으로 변해간다. 생문 하나 없는 미로가 된 듯이 길은 보이지 않고 미로는 움직일 때마다 변화를 이루며 생명체처럼 존재한다.
스스로 갇히기도 하고 누군가의 모함에 갇히기도 하는 미로는 인생의 길과도 닮았다. 때로는 죽음도 불사하는 위험한 곳이지만 게임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놀이가 된다. 게임의 부분 같지만 인생의 미로를 바라보는듯한 느낌이다. 팝아트 작품은 작가의 사실적 생각과 추상적 미래를 같이 담는다. 작가가 즐기던 놀이일 수도 있고 현재 상황이 미로처럼 복잡한 마음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 혼자가 아닌 많은 주변의 이들이 함께하고 있어 두렵지 않을 보여준다. 나만이 미로에 빠진 것이 아닌 모두가 같이 빠졌다고 생각하기에 힘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환상을 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저 옆에 있는 것이 타인이 아닌 나의 또 다른 모습이다. 나는 복사된 거울을 보듯 다른 사람처럼 의식하고 있었을 뿐이다. 누군가 미로를 찾아나가길 바라고 있었다. 이미 나 스스로가 아닌 누군가에 조종되는 인형처럼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고 있다. 미로에 들어선 순간 멈출 수 없는 모험을 각오해야 한다. 그 결말에 무엇이 있던 말이다. 내가 볼 수 있는 이 벽의 한계를 한눈에 바라보는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죽음일까 삶일까. 성공일까 실패일까. 즐거움일까 갈등일까. 이 환상은 꿈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내가 나를 조종하는 내 의식의 무한대를 시험하는 젊은 기운이다.
나이 든 내 모습을 잊고 젊은 시절의 나를 의식하는 자아의 회고이자 관찰이다. 그림은 컴퓨터 안의 게임 같기도 하고 종이 위에 그려진 작은 미로 같기도 하다. 늙은 몸을 움직이기보다 머리로만 생각하는 추억 속의 미로를 바라보고 있는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팝아트가 재미와 즐거움을 주는 것은 일상에서 내가 접했던 것들의 드러남이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했던 마음속 응어리를 작은 회화적 웃음으로 드러내는 그림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미로는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을 불태우는 놀이가 된다. 스트레스 해소의 탈출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