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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우지니 Jan 31. 2021

엄마의 시간

친정엄마

오전 10시. 찬하가 아빠랑 유치원에 가고 마침 주하도 잠이 들었다.

엄마와 마주 보고 커피를 함께 마시는 이 시간이 소중하다 느껴졌다. 평온하고 행복했다.


엄마는 근처에 있던 그림책 <고릴라 할머니>를 끄집어와 찬찬히 읽으셨다. 고릴라 할머니는 엄마의 과거를 끌어왔다. 서운했지만, 억울했지만 삼키고 살았던 이야기. 언젠가 한 번 속 시원히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끝내 다 하지 못했던 이야기.

복숭아꽃처럼 고왔던

새 각시가 집안일에 육아에 어른들 모시기까지..

그렇게 몇 해가 지나

얼굴이 쭈글쭈글

고릴라 할머니가 되었다는 이야기.

엄마의 과거를 끌어다 주었다.



엄마는 많은 형제들 사이에 가장 운이 없는 편이었다. 엄마가 한창 학교 다닐 시기에 할아버지 사업이 뜻대로 되지 않아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다 스무 살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 집에 세 들어 살던, 기타를 치던 28살 총각이랑 결혼을 했다. 아빠의 사업은 아주 잘 되었다. 엄마는 우리를 한창 키우던 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고 했다. 아빠의 사업은 주위의 부러움을 살만큼 형편이 좋았다. 하지만 두세 번의 실패를 겪으면서 예뻤던 엄마 손에 언제나 함께할 것 같았던 화려한 장신구들은 더 이상 엄마의 일상에서 필요한 물건들이 아니게 되었다.




둘째가 생기고 조리원을 나오자마자 엄마는 우리 집으로 오셨다. 중간에 잠시 울산에  해결할 일이 있어 가셨다가도 내가 힘들다고 하면 언제든 또 와주셨다. 오실 때마다 백팩과 캐리어에 먹을 것을 잔뜩 가지고 오셨다. 여기서도 다 구할 수 있는 것들인데 항상 그렇게 무겁게 들고 다니시는 게 못마땅해서 그때마다 나는 잔소리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엄마의 의도만 생각했다.


엄마는 항상 마음이 분주한 사람이었다. 이걸 하면서도 다음 걸 계획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느라 머릿속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거 같았다. 그러다가 이따금씩 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좀 쉬시라고, 엄마는 너무 쉴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좀 맡겨놓고 신경 좀 끄시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엄마가 한 숨을 무겁게 내뱉는 그 순간 무엇이 엄마의 가슴을 답답하게 했는지 알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말하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커피를 다 마시고 외출 준비를 했다. 이사 오고 처음으로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스터디 모임이 생겼다. 코로나는 이미 일상이 된 듯했고 언제까지나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미룰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항상 편한 옷차림에서 벗어나 이 날은 조금 신경 쓴다. 나랑 달리 패션감각이 좋은 엄마는 내가 입고 나온 티셔츠를 보고 다른 걸 입어보라고 했다. 티셔츠를 입을 때 이건 좀 아닌 거 같다고 생각은 했다.

토 달지 않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티셔츠를 벗고 적당한 블라우스를 찾아서 입었다.

내가 봐도 아까보다 나은 모습이었다. 신발은 여름이면 즐겨 신던 샌들. 이 샌들에도 엄마의 시간이 묻어있다. 밑창이 다 떨어져서 버려야 하나 했는데 지난번 울산에 가실 때 잘 아는 곳이 있다며 굳이 들고 가셨다. 번거롭게 뭐하러 그러냐고 했지만 나는 내심 엄마가 그래 주길 바랐다. 그냥 집에 두면 더 이상 신을 수 없는 샌들이 될 게 뻔했다. 그렇게 엄마는 약속대로 밑창을 새로 바꿔다 주셨다. 샌들을 신으면서 한층 더 폭신해졌다고 느꼈다.                                         

       

''다녀올게 엄마~''하며 나서는데 지금 이 순간의 엄마와 주하를 남기고 싶어서 다시 샌들을 벗었다. "찰칵" 엄마는 이 소리를 듣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엄마의 청력이 약해졌다. 왜 이렇게 못 알아듣느냐며 내가 짜증 내는 정도도 약해졌다. 혼자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나는 네비에 약속 장소를 찍고 페달을 밟으면서 생각했다. 오늘도 나는 엄마의 시간을 이렇게 마음껏 쓰고 있구나..


모임을 마치고 곧장 집으로 달려왔다. 엄마는 울산에서 가져오신 콩을 삶고 갈아 콩국을 만들고 우뭇가사리를 손질해 금세 우뭇가사리 콩국을 점심으로 준비해 주셨다. 엄마가 여름에 즐겨먹는 음식인데  나는 한 번도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드실 때마다 내게 권했지만 나는 항상 거절했다. 무슨 맛으로 먹느냐며, 난 안 먹을 거라고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맛있겠다며, 이건 칼로리도 낮겠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열무김치를 곁들여 먹는데 아주 맛있다. 마지막 깨 한 톨까지 싹싹 비웠다.


나는 이제 철이 들었나 보다. 이 한 그릇에는 엄마의 시간이 많이 담겼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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