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낳고서 한 번쯤은 적어본다는 출산기를
아이를 넷이나 낳으면서도,
맘카페를 그렇게 들락날락거렸으면서도 써본 적이 없다.
그리하여 생각난 김에, 그리고 이제는 그만해야지 하는 다짐에 적어보는 4형제 출산기.
2012년,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강사로 일하고 있던 학원에 다시 출근했고 여느 때처럼 열심히 강의하고 신혼을 즐기고 있었다.
어느 날은 출근하면서 학원 밑에 있던 빵집에서 빵을 한 아름 사서 교무실에 있던 사람들에게 좀 나눠주고 내 자리에 앉아서 수업 준비를 하며 빵을 베어 무는데 옆 자리의 선생님이 툭 친다.
ㅡ쌤, 요즘 왜 이렇게 잘 먹어? 원래도 잘 먹긴 했는데 너무 먹는다~이상해! 임신한 거 아니야?
웃으면서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버리는 그녀의 뒤에서 빵을 열심히 오물거리던 나는 갑자기 생각이 많아졌고 곧 벌떡 일어나 임신테스트기를 사 왔다.
그리고 결혼 3개월 만에, 첫 아이를 임신했다.
그땐 먹고 싶은 것이 진짜로 아기가 먹고 싶어 하는 줄 알았고 남편도 그런 줄만 알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먹으며 임신 초반의 심한 입덧과 약간의 조산기 이외에는 무탈하고 마음 편한 임신기간을 보냈다.
40주가 다 되어갈 무렵 생각보다 아기의 머리둘레가 크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유도분만 계획을 잡았고 막판에는 고기를 매일 먹었다. 혹시 오늘 나오진 않을까, 고기 안 먹었다가 힘이 안 나서 못 낳으면 어쩌나 하면서.
결국 별 소식 없이 유도분만의 날이 왔고 그 당시 회사를 다니고 있던 남편을 출근시키고 혼자 씩씩하게 짐가방을 챙겨 병원으로 갔다.
관장, 제모 등의 준비를 착착하고 촉진제를 맞았다. 출근도장을 찍고 병원으로 온 남편과 함께 슬슬 오기 시작하는 진통을 맞았다. 아직 양수는 터지지 않은 상태였고 견딜만했다. 그래서 아침부터 굶은 남편을 점심 먹고 오라며 보냈는데 남편이 간지 10분 만에, 병원 복도를 어슬렁 거리며 걷고 있다가 양수가 터졌다.
남편은 연락을 받고 허겁지겁 돌아왔고 조금 있다가는 엄청난 진통이 10분 간격으로 오기 시작했다. 촉진제를 맞은 지 한 시간 정도 지난 상태였다.
난생처음 맛보는 아픔에 진땀과 눈물이 막 났지만 그런 나의 상황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나는 간호사가 내미는 짐볼 위에서 방방 뛰어야 했다. 아직 위에서 둥둥 떠 있는 아기가 내려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진통을 약 1시간 겪고 나서 의사가 들어왔고 내진을 했다. 내 몸이 어느 정도 벌어졌는지, 아기가 얼마나 내려왔는지 알기 위해 진행하는 내진은 나를 엄청나게 당황스럽고 아프게 했다.
남편은 언제쯤 출산할 수 있겠냐고 물었고 나는 진통이 오는 와중에도 정신을 차리고 의사의 대답을 들었다. 그녀는 시계를 보며 약 5시간 후 정도면 아기를 만날 수 있겠다고 했다.
나는 절망했다. 이 아픔을 5시간이나 더 겪어야 한다고?
그래서 더더욱 열심히 울부짖으며 짐볼 위를 굴렀다.
1시간 정도 더 진통을 하고 나니 나는 서서히 사람 꼴이 아니게 되었다. 항문에 수박이 낀 느낌이 나면 말해달라는 간호사의 말을 듣고 겁이 덜컥 났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진짜로 그 느낌이 났다.
나는 금방 분만실로 옮겨졌고 분만대에 누웠다. 남편은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폭풍처럼 들이치는 진통에 나는 거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숨도 제대로 안 쉬어졌다. 뱃속 아기가 힘들어한다며 내게 산소호흡기가 씌워졌다. 내 몸 위에 나보다 덩치가 더 큰 간호사 둘이 올라타 배를 눌렀다. 힘을 잘 주지 못하는 까닭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배를 보니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분만실에 들어간 지 10분 만에 몇 번 힘을 주고 따뜻한 것이 내 몸에서 빠져나가 우렁찬 울음소리를 내었다. 남편은 호출되어 분만실로 들어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곱창같이 질긴 탯줄을 잘랐다고 한다. 그리고 나가서는 조금 울었다고 했다.
첫 출산은 진통 시간과 분만 시간을 포함해서 2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초고속 분만기록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초고속 분만, 그 전설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낳은 첫째가 첫돌을 맞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장이 난 것 같이 아픈 팔과 다리를 끌고 한의원엘 갔었다.
진맥을 하던 한의사가 대뜸 묻는다.
ㅡ혹시, 임신 가능성이 있나요?
나는 생각도 안 하고 대답했다.
ㅡ아니요. 그럴 리가 없는데요?
갸우뚱하는 한의사. 그리고 덧붙인다.
ㅡ아닌데.. 맥이 조금 이상한데.. 정말 임신 가능성이 없어요?
나는 조금 더 단호하게,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ㅡ아니요. 그럴 리가 없어요. 아니에요.
한의사는 더 뭐라고 덧붙이지 않았으나 침은 놓아줄 수 없다고 했다. 찜질과 적외선 치료만 받고 가라고 했다.
큰 마음먹고 아기 맡기고 온 건데 침을 못 맞는다니. 짜증부터 났다. 그래도 일단 시키는 대로 하고 누워서 치료를 받았다.
뭔가 잔뜩 찜찜해진 마음으로 일어나려는데 한의사가 갑자기 와서는 한 마디 툭 던지고 간다.
ㅡ병원 꼭 가보세요. 산부인과.
한의원에서 나와서 그 건물 1층의 약국에서 또 임신테스트기를 샀다.
결과는 두 줄.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던, 남편과의 사이에 생겨버린 둘째.
갓 돌이 지난 큰 아이를 돌보면서의 임신은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돌볼 것이 없었던 때는 그저 졸리면 누우면 되는 것이었고 몸이 힘들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면 되었다.
그러나 끼니를 맞춰 먹여야 하고 때를 맞춰 재워야 하고 놀아주고 닦아줘야 하는 아이가 있었기에 어떤 것도 뒤로 미뤄 놓을수가 없었다. 입덧을 하며 구토 후에 기운이 없어 쓰러져 있다가 억지로 몸을 일으켜 큰 아이를 돌봐야 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개인사업을 시작한 남편의 일이 그때 만약 성행하여 바빴더라면, 아마 나는 내 기억보다 곱절로 힘든 시기를 보냈을 것이다.
어쨌든 본의 아니게 한가해진 남편의 도움으로 둘째 임신과 첫째 육아의 모든 것을 혼자 감내하지는 않아도 되는 형편에서, 역시 별일 없이 순탄한 임신기간을 보냈고 예정일이 가까워왔다.
둘째 임신기간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환도가 선다고 표현하는 통증인데, 아직 어린 첫째를 안거나 들어 올릴 때는 물론이고 걷거나 조금 뛰기만 하여도 밑이 빠질 것 같은 고통이 들이친다.
경산부일수록 심해지는 그 통증은 다리 한쪽만 들어 올려도 눈물이 날만큼 소름이 끼치게 고통스러운데 출산을 함과 동시에 사라져 버린다.
한번 맛본 산고는 출산이 가까워오며 몸이 떨릴 정도의 공포를 주었고 역시 한번 맛본 출산의 기쁨 또한 기대가 되는 것이라 예쁜 아기를 만나게 될 설렘과 공존하는 두려움으로 기이하고 변덕스러운 마음가짐으로 시간을 보냈다.
예정일이 2주 정도 남은 어느 날은 아침부터 이상하리만치 큰 아이가 그야말로 진상을 부렸다. 잘 먹던 밥도 안 먹는다고 도리질을 하고 투정을 부렸다. 그야말로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정말 이상하다 싶을 정도였다.
그러다 화장실에서 소위 "이슬"이라는 분비물을 보았고 남편과 나는 갑자기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싸놓았던 짐가방을 들고 큰 아이를 데리고 10분 거리의 친정으로 갔다. 만약의 사태에 큰 아이를 맡기기 위해서였다.
일하러 나가신 친정엄마 대신 외할머니가 차려주신 진수성찬을 고봉으로 먹고 낮잠을 잤다. 큰 아이는 친정아빠와 남편과 함께 놀이터에 가있었다.
단잠을 자다가 생경하게 아파오는 배 때문에 눈이 번쩍 떠졌다. 일어나지도 않은 채로 진통 어플을 켜서 진통 주기를 체크했는데 15분, 20분 제멋대로이다. 그래도 그 주기가 꾸준했다.
벌떡 일어나서 남편을 호출하고 병원에 가야겠다고 했다. 친정아빠가 동행해주셨는데 차 안에서 내 전현재 보호자인 두 남자분은 계속 장난스럽게 빈정거렸다.
ㅡ그렇게 멀쩡한데 무슨 애를 낳는다고.
ㅡ분명히 집에 다시 가라고 할걸.
병원에 도착해서 내진을 하니, 웬걸. 3~40프로가 진행된 상태. 당장 입원을 하자고 한다.
그것 봐! 내가 이상하댔지!
의기양양하게 입원을 한 나는 문득 친정에 두고 온 큰 아이가 걱정됐다.
그러나 곧 진통이 시작되었다. 시작이다.
촉진제를 맞지 않은 자연진통은 확실히 촉진제를 맞고 나서의 진통보다는 수월한 것이었으나, 역시 참기는 힘든 것이었다.
이번에는 진행이 미친 듯이 빨랐다. 진통이 시작된 지 1시간 만에 바로 분만을 시도했고 체감하기로는 초주검이 된 상태에서 둘째를 만났다.
회음부 처치를 해주던 의사에게 예쁘게 꿰매 달라며 둘째 엄마의 너스레도 떨었다. 의사는 하나 더 낳아야지!라고 웃으며 말했는데, 그때는 꿈에도 몰랐다.
정확히 그 의사가 셋째 아이를 받아줄 그 사람인 줄은.
두 살 터울의 형제를 키운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기억이 희미할 정도로 힘겨운 것이었다. 아무리 기억을 하려고 해도 기억이 통째로 사라진 것처럼 깜깜하다.
나는 그 시기에 심한 산후우울증을 겪고 있었다. 첫째를 낳고 살이 다 빠지지 않은 상태에서 둘째를 낳고 불어난 몸에 자신감은 바닥이었다.
남편도 나도 아이를 둘이나 키우면서 급하게 어른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같은 느낌이었다. 돌봐야 하는 아이들, 해야 하는 일들, 참고 견뎌야 하는 일들에 사사건건 부딪혔다.
어느 날은 부부싸움을 아주 신명 나게 했다. 아이들을 재우고 집 옆 놀이터에서 울고 불며 날뛰었다. 그날따라 나는 감정 제어가 도통 힘들었다. 평소 하지 않는 과격한 행동이나 말들을 하면서 남편을 당황시켰다.
그리고 한 달에 한번 찾아와야 되는 손님이 찾아오지 않은 채로 보름이 지났다.
그리고 혼자, 임신임을 알게 됐다.
나중에서야 남편에게 털어놓은 이야기들이지만, 나는
그때 아기를 또 낳아 기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혼자 전전긍긍하며 며칠을 지냈다. 그러다 어느 오후, 팔자 좋게 낮잠을 자는 남편을 발로 차서 깨우며 며칠간 끙끙 앓았던 것들을 쏟아내어 남편에게 퍼부어버렸다.
여전히 자신 없어하는 나를 남편은 설득했다. 부모님에게도, 친구에게도 쉽사리 세번째 임신에 대해 말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때, 무조건적으로 축복받지 못하는 임신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지나가고 나서는 장장 5개월에 달하는, 처음 겪어보는 긴 입덧이 찾아왔고 두 아이를 키우면서 모든 것을 오롯이 견뎌내야 했다. 살이 죽죽 빠지기 시작했다.
쏟아질 것 같은 배로 두 아이를 돌봤다. 둘에서 셋이 된다는 것에 막연하고 엄청난 무게감이, 무거워지는 몸만치나 버거워지는 순간도 많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신생아를 낳는다는 것, 그래서 그 아기와 만나게 된다는 것이 환희에 찬 그 자체라고 생각했기에 뱃속의 아기가 곧 궁금해졌다. 첫째를 닮았을지 둘째를 닮았을지 갓 5살, 3살이 된 아이들과 함께 상상해보는 순간은 돌아보건대 분명히 보석 같은 순간이었다.
중기부터는 거의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뒤뚱거렸다. 셋째의 성별이 또 아들임을 알았을 때는 왠지 그것이 완전체를 알리는 신호인 것만 같았다.
비슷하게 셋째를 임신하고 낳은 이웃이 있었는데 그녀는 딸이 너무나 갖고 싶어서 위의 아들 둘에 막내는 딸이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랬었는데 결국 막내도 아들임을 알고 병원에서 대성통곡을 했다고 했다.
나는 힘들게 임신기간을 보내고 출산을 하고 키워야 하는 임무들 앞에 멀뚱히 선 채 고작 그런걸로 절망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무거워지려는 마음을 가볍게 다잡았다. 아들인지 딸인지는 내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양쪽에 첫째와 둘째의 손을 잡고 부른 배로 동네를 다니다 보면 꼭 뱃속 아기의 성별을 묻는데 또 아들이라고 하면 으레 짓는 표정들이 나중에는 조금 지겨울 정도였다.
왜 꼭 딸이 필요하다고들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봐요들, 나처럼 지겹게 속 썩이는 딸도 있다고요.
어쨌든 또 슬슬 출산이 걱정되는 시기가 다가왔다.
진통이 언제 오게 될지, 첫째와 둘째는 어떡하나 하는 생각에 유도분만을 잡아야 될지도 고민했다. 내가 워낙 급속 분만을 해왔기 때문에 병원에서는 조금이라도 신호가 오면 바로 오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긴장 속의 만삭을 보냈다.
더운 어느 여름밤, 남편은 집안일과 아이들 케어를 해놓고 집 근처에 볼일이 있어 나갔고 나는 호젓하게 아이들을 재우고 TV를 보고 있었다. 가진통인지 싶은 알쏭달쏭한 것이 신경을 곤두세우게 했다. 오늘인가, 오늘은 아니겠지, 하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예정일까지는 약 2주가 남았다. 늦은 밤까지 잠이 오지 않았고 그대로라면 그렇게 동이 틀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20분 주기의 수축이 어느 정도 확실해졌다. 단잠을 주무시던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했고 그때 시간이 새벽 5시 정도였다.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아이들을 친정엄마에게 맡기고 아침에 어린이집에 보내기까지의 매뉴얼을 적어놓고 푸른 새벽에 남편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입원을 해서 가족분만실에 들어갔다. 바로 촉진제는 넣지 않기로 하고 기다려보기로 했다. 밤을 꼬박 새운 남편과 나는 기다리다 잠이 들었고 아침이 왔다. 아이들이 등원을 잘 마쳤다는 소식을 들은 후 촉진제를 넣었고 바로 진통이 왔다.
고통스러운 와중에 이번엔 남편에게, 쉽게 아기를 낳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살짝 눈을 까뒤집는 오버액션도 조금 했다.
역시 진통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으악, 내가 이걸 또 하고 있네 싶은 와중에 진행은 매우 빨랐다.
내진하러 온 간호사가 ㅡ히-익, 이 엄마 다 열렸네!ㅡ라고 말하길래 다 왔다 싶었다. 진통은 약 40분 정도 했고 간호사가 바로 의사를 호출했다. 둘째를 받아줬던 나이 지긋한 의사가 들어와서 힘을 세 번 정도 주고 셋째가 나왔다.
ㅡ손가락, 발가락 열 개씩 다 있나요?ㅡ라고 물었더니 그렇다며 걱정 말라는 말을 듣고는 눈물이 후두두둑 떨어졌다. 이제 나는 세 아들의 엄마구나.
그렇게 궁금했던 셋째가 가슴 위에 올려져 젖을 빠니 마음이 너무나도 편안해졌다.
ㅡ마지막이니까 예쁘게 꿰매 주세요.
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주책을 떨었다. 왜냐하면 그 의사의 마지막 한 마디가 걸작이었으므로.
ㅡ왜 마지막이야! 하나 더 낳아야지! 짝은 맞춰야지!
아들 셋의 엄마로 산다는 것은 전쟁 같은 매일과 가끔 밀려오는 설움과 허무함의 연속이었다.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고 속옷이 젖을 정도로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진이 빠졌다. 셋째를 안고 젖을 먹이며 첫째가 화장실에서 나를
부르면 가서 똥꼬를 닦아줘야 했다. 물론 셋째를 안은 채로.
기저귀를 떼기 시작한 둘째가 여기저기 쉬를 해놓으면 출처를 따라잡아 닦고 다녀야 했다. 역시 셋째에게 젖을 물린 채로.
갓 5살이 된 첫째는 첫째대로 아직도 아기인데 동생이 두 명이나 생겨버려 억지로 큰 형이 되어야 했고 3살인 둘째는 둘째대로 동생에게 가려져 엄마 눈에 하필 미운 짓 하는 것만 매번 보이는 트러블메이커가 되어버렸다.
마침 남편은 일이 바빠져서 예전처럼 남편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기에 셋째가 돌을 맞을 때까지 혼자 대부분의 육아를 해내야 했다.
이상하리만치 갈증이 심했고 아이들을 재우고 잘 마시지 못하는 술 대신 이온음료를 한병 원샷하는 것이 하루의 낙이었다. 때로 딸 부잣집의 엄마들을 보며 외롭고 괴로운 나의 처지가 서럽기도 했다.
그렇게 셋째가 두 돌이 다되어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하고 나에게 주어진 낮시간 동안의 자유가 무척이나 달콤했다. 이제 이 세 아들을 잘 키우기만 하면 되는 거겠지.
그저 이 것이 내 소임이겠거니 겸허하게 받아들인 세 아들 키우기에도 점점 익숙해지고 세 아들의 엄마가 곧 나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가고 있었다.
두 살 터울의 아이들은 벌써 7살, 5살, 3살이 되었다.
어느 날, 나와 똑같이 아들 셋을 키우는 동네 언니가 임신을 했다. 기뻐하는 언니와 언니의 남편을 보며 축하했지만, 축하한다고 말했지만, 겁이 덜컥 났다. 나는 저렇게 기뻐할 자신이 없었기에, 나중에서야 고백하듯 말했지만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절대 저렇게 되고 싶지 않아서.
우스갯소리로 ㅡ너도 하나 더?ㅡ라는 말엔 정색으로 답했다.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미쳤냐고.
그리고 그런 확신은 보기좋게 오만이 되었다.
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6개월 전이었다.
가을의 어느 늦은 밤, 남편과 야식을 먹고 노닥거리다가 지나가듯 말했다.
ㅡ안 해. 벌써 2주가 다 되어가는데. 소식이 없어.
정말 지나가듯 말했다. 나는 그의 아무렇지 않은, 그저 피곤하고 스트레스받아서 조금 늦어지는 것이겠거니, 같은 반응을 기대했고 그것이 사실이기를 바랐다.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그러나 남편은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그 새벽에 벌떡 일어나 옷을 입고 나갔다. 그리고 임신테스트기를 두 개 사들고 들어왔다. 나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내가 기대했던 건 이런 게 아닌데.
나를 화장실로 보낸 남편은 문 밖에서 기다렸고 나는 왠지 처연해진 마음으로 테스트에 임했다. 그리고 하늘이 노래지는 느낌이 들었다.
두 줄이다. 혹시 몰라 다른 회사 것으로 하나 더 사 온 남편의 치밀함은 곧 두 줄이 뜬 테스트기 2개가 되어 덩그러니 세면대 위에 올려져 있었다.
남편, 너는 무엇을 기대하는 것이냐.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문 앞에 서있던 남편은 말없이 화장실을 나서는 내게 더 묻는 대신 직접 테스트기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식탁에 마주 앉음으로 표했고
나는 짐짓 강한 어조로 낳을 수 없다고 했다. 남편은 대답하지 않았고 생각해보자고 했다.
다음 날부터 나는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서 울기만 했다. 뱃속의 아이를 없앨 수 없다면 내가 없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현실이 너무나 가혹하고 버거웠다.
남편은 내가 무언가 먹기를 사정했다. 그의 결심은 확고했고 내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사실 내 의견이라는 건 나도 확실히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느 쪽도 자신이 없었다.
남편은 불도저 같이 엽산을 들이밀었다. 이기적이고 고집 센 그 앞에서 나는 악을 쓰고 울었다. 뵈는 것이 없었고 그저 나와 남편과 내 몸이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시간은 가고 있었다.
그리고 남편이 꾹꾹 눌러쓴 각서 앞에서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나는 크나큰 불안과 불편 위에 던져진 상태에서 조금 더 확실한 위로와 격려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미련하고 멍청하지만 분명한 전개였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튿날 병원에 가서 심장소리를 들었다. 젊은 우리는 이미 아이가 셋이나 있으면서도 처음인 것 같이 병원을 누볐다.
막막한데 들뜨기까지 하는 앞 뒤 맞지 않은 심산이었다.
입덧은 사상 최악이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먹으면 다 토해냈다.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가는데도 사정을 밝힐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임신 6~7개월이 될 때까지 숨겼다. 배가 많이 나오고서야 사람들이 알아보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이해시키는 것이, 특히 첫째에게 이해를 구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넷째의 성별을 알고 나서 첫째에게 동생이 하나 더 생긴다면 어떨 것 같냐고 물었더니 처음에는 동생은 그만 갖고 싶다며 난색을 표하다가, 엄마가 집에서 유일한 여자이기 때문에 엄마가 외롭지 않게 여자동생이었으면 좋겠다는 속 깊은 반응을 보여주었다.
이번에도 남자 동생이라는 말에는 익살스럽게 웃어주는 첫째였다.
나 스스로는 꽤나 자조적인 시선으로 현 상황을 바라보았다. 어디까지나 자녀계획에 실패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책임져야 했다. 그랬기에 위의 세 아이를 돌보면서도 괴롭거나 힘들다고 투정할 자격이 없다고 부른 배를 안고 생각했다.
넷째 출산을 앞두고 이사를 했다. 집에서 10분 거리였던 친정이 한 시간 이상이 걸리게 멀어져서 당장 진통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태산 같았다.
지금까지의 패턴으로 봤을 때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등원시킨 다음 진통이 와주면 한 시간 안에 모든 것을 끝낼 수 있을 텐데 하며 시건방도 떨어보았다.
넷째라 조금 일찍 나와주지 않을까도 생각했지만 예정일이 다 되도록 소식은 없었다. 그런데 정확한 예정일, 씻다가 피를 보았고 바로 시어머니를 호출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진통이랄 것 없이 미미한 통증이 있었는데 마음이 급했다. 빨리 해결하고 싶었다. 그래서 시어머니께 세 아이를 맡기고 나오며 ㅡ동생 낳고 올게.ㅡ라고 인사했다.
입원을 했지만 주말 오후라 촉진제는 쓸 수 없었는데 피가 계속 조금씩 나왔다. 집에 갈 수도 없는데 진행은 더뎠다.
어느 정도 진행되고 무시무시한 통증이 오려고 할 즈음에 난생처음 무통주사를 맞았다. 무통주사는 위대한 것이었다. 하반신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두 다리에도 힘이 없어 축 쳐졌다. 그런데 계속 피가 흘렀다. 간호사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패드를 갈아주는데 뭐지 싶었다.
새벽이 되도록 70프로 진행이 되었다. 긴장도 풀렸겠다 피곤했던 나와 남편은 단잠을 자고 있었는데 태동 체크를 하고 있던 간호사와 의사가 갑자기 들이닥쳤다.
아기가 위험하다고 했다. 촉진제를 쓸 수 없다고 했던 의사는 이제 무통주사를 끄고 촉진제를 넣겠다고 했다. 무통주사를 끈다는 말이 사형선고 같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무통주사약은 끄고도 한 시간 반 정도는 효력이 있다고 했다.
나는 한 시간 반 안에 모든 것을 끝내야 하는 것이다.
촉진제를 넣고 한 10분 정도 있으니 바로 분만이 가능하다고 했다. 사상 최대로 분만실에 오래 머물렀다.
무통 기운이 있는 상태에서 힘을 주는 것은 또 색다른 느낌이었다.
진통이 있을 때 힘을 주는 건 지금 내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에 죽을 둥 살 둥 밀어내는 것이었는데 무통 상태에서 힘을 주는 건 왠지 이게 제대로 되고 있는 건지 싶을 정도로 아리송한 것이랄까. 고통을 맛보지 않고 분만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세 번 힘주기를 하고 넷째가 나왔다. 기진맥진한 와중에도 벗어두었던 안경을 더듬더듬 찾아 쓰고 아기를 보았다.
저 울음소리. 안녕, 많이 보고 싶었단다, 아가.
나는 그렇게 도합 4번의 자연분만을 했고 그 흔적은 고스란히 내 몸에 남아있다. 꼬박 8년간 4번의 임신과 출산을 겪었다. 조리는 꽤 잘한 편이지만 마냥 조리를 즐길 형편과 여건은 되지 않았기에 마흔하나의 젊다면 젊은 나이에도 체력이 많이 떨어져 예전 같지가 않다.
4명의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은 확실히 고된 일이다. 대단한 일이라고 다들 추켜세우지만 대단한 일 같지는 않다. 아직도 자의로, 타의로 공개되는 아들 넷이라는 스펙이 부담스럽고 쑥스럽다. 사람으로 키워내야 하는 아이가 넷인데, 정작 나도 부족한 사람인 것은 결정적인 함정이다.
출산을 결코 장려하지는 않지만 나는 넷이나 낳았다.
그리고 그럭저럭 살고 있다. 잘 살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누구보다 잘 살아내고 싶다.
하나도 둘도 셋도 아닌 넷, 나의 아이들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