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가 네 살, 둘째가 두 살이 되던 여름에 똑같은 디자인의 칠부 내의를 여러 벌 사서 쌍둥이처럼 입혔다. 간식을 먹다가, 밥을 먹다가 옷이 더럽혀지기 십상인데도 꾸역꾸역 둘이 같이 벗기고 갈아입혔다.
깔끔하게 씻기고 로션을 보송보송 발라놓고 알록달록한 옷을 말끔히 입혀놓으면, 요리조리 뽈뽈 다니며 노는 것이 즐거운 큰 아이는 큰 아이대로, 온갖 것을 다 붙잡고 일어나 아장아장 걸음마를 하는 둘째는 둘째대로 귀엽기가 그지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똑같은 옷을 입히는 것이 좋았다. 아이들이 자라서 옷이 작아지면 또 큰 옷을 똑같이 사서 입혔다. 둘째는 첫째의 옷을 물려받을 새도 없이 형과 똑같은 옷을 입었다. 셋째가 태어나서 그 아이가 마지막 아이일 줄 알았을 때도 몇 벌은 그렇게 입혔다. 마치 잘 짜인 세트 구성마냥 보기가 좋았다.
아이들은 점점 자랐다. 첫째는 어느새 훌쩍 커버렸고 초등학교를 들어가는 것을 기점으로 동생들과 똑같은 옷을 입는 운명을 벗어날 수 있었다. 네가 많이 커서 형 옷을 입게 됐다, 축하한다는 엄마의 소란스러운 호들갑 한 마디면 어깨를 으쓱하며 군말 없이 형의 옷을 물려 입는 나의 아이들은 착하디 착했다.
아이들의 옷에는 기억이 묻어있다. 동생이 형의 옷을 입으면 형의 고운 순간이 생각나곤 한다. 그러려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옷 한벌에 너무나 많은 장면들을 담아버렸다. 그래서 그냥 천 쪼가리 하나일 뿐인데도 버리기가 미련스러웠다.
특히 내의가 그랬다. 자주 빨고 집에서 부비적 거리는 내의는 입고 입어 찢어질 때까지 버리지 않고 그냥 두었다. 밖에서 입는 겉옷보다 집에서 입는 내의가 더 눈에 선한 것은 아마 같이 지지고 볶고 부비적거려서 일거다.
불쑥 들어선 여름같은 날씨에 아이들은 칠부 내의를 입기 시작했다. 걸음마를 하는 넷째에게는 무얼 입힐까 생각하다가 곱게 개어놓은 아주 친숙한 디자인의 내의가 눈에 띄었다. 맞을까 싶어서 입혀보았더니 아주 딱이다. 해진데도 없고 멀쩡한데 바지의 고무줄은 약간 늘어나 있다.
그 옷을 입고 걸음마를 한 아기들이 떠올랐다. 통통한 손목과 발목이 기억났다. 비슷한 얼굴들의 아기들이 서랍장을 붙잡고 옆으로 옆으로 한 발씩 떼던 모습들이 생각났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벌떡 일어나 한걸음 두걸음을 걸으면 지금보다 훨씬 젊은 엄마인 내가 물개 박수를 쳤었다. 몇 번이고, 그랬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넷째를 남편과 함께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옷을 입은 아기는 이제 저 아기가 마지막이겠지. 아마 내년 여름까지는 입힐 수 있겠다. 그리고는, 해지지는 않은 채로 색이 많이 빠진 저 옷을, 뿌듯하게, 조금은 아쉬워하며 버릴 수 있겠다.
당분간은 저 칠부 내의를 입히면서, 늘어난 바지의 고무줄을 어쩔까 생각하면서, 더 꺼내볼 기억이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고 여길 것이다.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