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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oyd 고종석 May 23. 2017

크래쉬 1집 ENDLESS SUPPLY OF PAIN

다시 듣는 명반 시리즈

크래쉬 1집 ENDLESS SUPPLY OF PAIN

앨범 발매 이전 ‘내일은늦으리2’에 출연하며 주목받던 크래쉬의 데뷔 앨범이다. SKC 산하 레이블 메탈포스와 계약하며 유명 프로듀서 콜린 리차드슨과 함께 녹음되었다. 이 앨범을 계기로 한국 헤비메탈 신은 사운드와 톤, 제작방식 등의 변화를 도모하기 시작했다. 

     

송설 라이브 학원에서 결성하며 활동 시작

국내 최초의 스래쉬 메탈 곡은 「Friday Afternoon 34.55Min」에 수록된 데쉬의 <Crazy World Beyond The Wall(저 벽넘어 미친세상)>로 기록된다. 데쉬 이후 사운드와 스타일, 연주력의 한계로 인해 스래쉬 메탈을 지향하는 밴드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크래쉬는 데뷔 초부터 세풀투라(Sepultura), 판테라(Pantera)와 같은 새로운 스타일의 스래쉬 메탈을 구사하며 독보적인 밴드로 인정받았다. 크래쉬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였던 안흥찬(베이스, 보컬)과 이영호(기타)로부터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체계적인 음악 지식을 쌓기 위해 종암동에 위치한 송설 라이브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고, 그 곳에서 윤두병(기타)과 정용욱(드럼)을 만나 1991년에 크래쉬를 결성했다. 이후 크래쉬는 돈암동에 위치한 뮤직 아카데미와 인천을 오가며 여러 무대에 올랐다. 

앨범 발매 이전부터 최고의 인기 밴드로 각광

결성 초기부터 국내 밴드의 음악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의 사운드로 주목받았던 크래쉬는 1993년 SKC가 설립한 헤비메탈 전문 레이블 메탈포스와 계약을 체결한다. 같은 해 8월 비바 아트홀에서 열린 메탈포스 기념공연에서 크래쉬는 2부의 메인 밴드로 무대에 올랐다.


400명이 제한 수용 인원이었음에도 이 날 공연에는 750여 명이 운집하는 성황을 이뤘다. 크래쉬는 같은 해 11월 6일 국내 최고의 가수들이 모인 환경보전슈퍼콘서트인 ‘내일은 늦으리2’에 출연한다. 이 공연에서 크래쉬는 <최후의 날에>를 가창했고, 이 곡은 1993년에 발매된「93내일은 늦으리」앨범에 수록되었다. 크래쉬는 이 공연과 앨범을 통해 헤비메탈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일반 대중마저 자신들의 팬으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10월 20일부터 시작된 녹음은 11월 8일에 완료되었다. 특이한 점은 녹음 직전에 이영호가 군에 입대하면서 3인조로 녹음에 임했다는 점이다. 

대기업의 지원 속에서 해외 유명 프로듀서와 함께 작업

메탈포스는 삼성의 나이세스, LG의 LG미디어와 함께 대기업이 음반 제작과 유통을 위해 설립한 대표적인 레이블이었다. 나이세스와 LG미디어가 대중적인 음악에 집중했던 것과 달리 SKC는 각 장르에 맞춰서 하위 레이블을 두고 운영되었다. 


장르상 대중가요는 ‘메아리’, 클래식은 ‘뮤제트’, 그리고 ‘메탈포스’는 레이블명에서 묻어나듯 헤비메탈을 전문으로 제작하는 고유 브랜드였다. 국내 밴드와 뮤지션의 앨범 제작은 물론 해외 앨범 역시 국내에 유통시켰다. 메탈포스는 해외 레이블과의 연대와 투자 속에서 국내 제작 밴드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전까지 국내 헤비메탈 밴드들이 실력이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다소 외면을 받았던 이유는 사운드와 톤의 완성도 때문이었다. 크래쉬는 SKC의 지원 아래 카니발 콥스(Carnibal Corps)와 네이팜 데쓰(Napalm Death), 카르카스(Carcass) 등 정상급 밴드와 작업을 이뤘던 콜린 리차드슨(Collin Richardson)과 레코딩을 진행했다. 콜린 리차드슨을 프로듀서로 선정한 배경에는 메탈포스와 라이센스 계약을 맺고 있던 영국 레이블 이어레이크(Earache)의 추천이 존재한다. 콜린 리차드슨은 월간 록킷과의 크래쉬 관련 인터뷰에서 “1990년대 초반에 작업했던 앨범 가운데 가장 기대되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20여일 만에 마치면서 가장 단기간에 완료된 앨범이었다.”고 기억했다. 안흥찬은 1집 제작 당시 콜린 리차드슨과의 작업을 통해서 얻은 여러 경험과 지식을 통해 향후 전문 엔지니어로 활동하는 바탕을 마련했다.  


상업성과 평단의 고른 평가를 받은 앨범

1994년 11월, 팬들의 오랜 기다림 끝에 앨범이 발표되었다. 안흥찬의 그로울링 창법과 윤두병의 공격적이면서도 세심한 프레이즈, 그리고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평가받던 나티의 김태수를 능가하는 정용욱의 투베이스 드러밍은 찬사에 가까운 반응을 얻어냈다. 


당시 밴드의 막내 정용욱과 윤두병은 각각 만18세와 만19세의 나이였다. 그 어느 밴드보다 평균 연령이 낮았지만, 그래서 크래쉬 음악의 합과 맛은 더 대단하게 받아들여졌다. 경향신문에서 선정한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서 75위를 차지했던 이 앨범은 한 마디로 사운드의 질감과 전체적인 구성, 그리고 각 멤버들의 탁월한 실력을 바탕으로 완성된 작품이었다. 

버릴 것 없는 최상의 헤비메탈 앨범

1999년 트라이포트 록페스티벌에 참여했던 딥 퍼플(Deep Purple)은 자신들의 대표곡이며, 하드록 명곡 <Smoke On The Water>를 연주한 크래쉬의 음악에 놀라움을 표했다. 크래쉬의 데뷔 앨범에 유일한 리메이크곡인 이 곡은 여전히 크래쉬의 무대에서 연주되고 있다. 


안흥찬의 풍차돌리기 헤드뱅잉으로도 유명한 이 곡의 후반부 기타 솔로는 블랙 신드롬의 김재만이 연주를 담당했다. 이 앨범에서 청자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곡은 한국어와 영어 버전으로 수록된 <My Worst Enemy>이다. 스래쉬 메탈 특유의 강렬한 기타 리프와 드럼의 속도감, 그리고 안흥찬의 포효하는 보컬은 해외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얻어냈다. 이외에 무중력의 기타리스트 송창덕이 게스트로 참여하며 새롭게 녹음한 <최후의 날에>도 반응이 좋았다. 앨범 발매 이전부터 무대에서 자주 연주되었던 <Penalty>에는 수록곡 가운데 유일하게 배킹 보컬이 등장한다.  


기대에 못 미친 판매량이었지만파급력 컸던 앨범

이 앨범이 발표된 이후 한국 헤비메탈 신은 급속도로 변화를 맞이했다. 크래쉬의 음악을 모니터링한 여러 헤비메탈 밴드들은 해외 밴드의 사운드를 카피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서 자신들만의 사운드를 찾기 위한 시도와 방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클럽 락월드에서 크래쉬와 함께 활동하며 교류를 쌓았던 멍키헤드는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10만 장 이상 판매된 크래쉬의 데뷔 앨범 이후 멍키헤드는 2집 제작 당시에 콜린 리차드슨과 함께 최고의 프로듀서로 각광받던 플라밍 라스무센(Flemming Rasmussen)과 앨범을 녹음했다. 1990년대 초반 전 세계는 얼터너티브 계열의 헤비메탈이 인기를 얻던 시기였음에도 크래쉬의 성공을 통해 국내에는 스래쉬 메탈과 데쓰 메탈과 같은 과격한 사운드를 지향하는 밴드가 여럿 등장했다. 그리고 크래쉬의 사운드가 이슈가 되면서 이들이 앨범 제작에 사용했던 보스(Boss)사의 이펙터 ‘메탈 존(Metal Zone)’ 역시 판매열풍이 불었다.


해외 유명 프로듀서를 맞이해서 완성된 크래쉬의 데뷔 앨범은 헤비메탈 신에 새로운 변화와 영향을 끼친 작품이다. 헤비메탈의 대중성과 질적 향상을 가져온 이 앨범은 한국 대중음악사에 있어서 놓칠 수 없는 명반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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