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대표하는 음악인 재즈가 ‘피너츠’와 함께 한 이유
대한민국이 재즈와 월드뮤직에 취해 몸살을 앓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신해철의 2집 앨범 [Myself]의 수록곡 ‘재즈카페’는 재즈의 대중화를 먼저 읽고, 표현한 멋진 노래였다. 1990년대 초반 이후 수많은 재즈 관련 도서와 컴필레이션 음반들이 유통되기 시작했고, 카페와 미용실 등도 재즈와 관련된 상호를 사용하기도 했었다.
흔한 말로 ‘재즈를 입고, 재즈를 바르고, 재즈를 먹던 시기’가 있었다. 우리나라가 그 정도의 재즈 열풍이 일었던 시기가 있었듯, 재즈의 본고장인 미국의 흐름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컨트리와 블루스, 이지 리스닝 등 여러 대중음악이 탄생된 미국은 왜 여러 음악 가운데 유독 재즈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발달된 것일까?
미국 대중음악의 발달 과정과 그 안에서 빛나는 음악, 재즈
오랜 시간 동안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아온 신문연재만화의 대명사 ‘피너츠(Peanuts)’. 이 작품은 만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가 독자들에게 고르게 사랑을 받았던 덕분에 ‘스누피’, ‘찰리 브라운’, 우드스턱‘처럼 주요 캐릭터 이름을 작품의 제목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꽤 된다.
찰스 슐츠(Charles M. Schulz)가 1950년 10월 2일부터 연재를 시작한 ’피너츠‘는 미국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이며, 가장 모범적인 콘텐츠 벨류 체인을 형성한 미디어믹스로 통한다. ‘피너츠’의 연재가 시작된 1950년대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일의 강대국 위치에 올랐다. 한편으로는 공산 세력의 팽창에 위협을 느낀 가운데 매카시즘으로 대변되던 때였고, 노예 해방이 오래 전에 이루어졌음에도 여전히 인종 차별이 만연되기도 했다. 이 시기 미국 대중음악은 어떤 과정을 거쳤고, ‘피너츠’에 재즈는 왜 녹아내릴 수 있었던 걸까. 이에 대한 추적을 시작으로 재즈와 ‘피너츠’의 연관 관계를 알아보자.
음악적으로 미국의 대중음악은 흑인 음악과 오페라를 혼합한 미국만의 악극 양식인 ‘민스트럴 쇼(Minstre Show)’를 시작으로 ‘보드 빌(Vaude Ville)’과 해학에 기조한 장막극 형식의 ‘발레스크(Burlesque)’가 인기를 얻으면서 대중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후 1910년대 팽창한 레코드 산업과 미디어가 결합되면서 미국 대중문화는 본격적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 미국 대중음악의 중심은 20세기 전반에 걸쳐서 흑인 음악에 주해서 시도되고 발달되어 나온 것이 특징이다.
가스펠을 시작으로 재즈와 블루스로 이어진 흑인 음악은 대공황기였던 1920년대 말부터 1940년대까지 스윙의 붐을 일으키며 음악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더 부드럽고, 빠른 가운데 힘이 느껴지는 빅밴드 위주의 스윙은 춤추기 좋은 음악을 요구하던 당시의 대중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반면에 주요 지배층이었던 백인 음악은 유럽 음악 형식의 전통을 계승한 가운데 컨트리와 틴 팬 앨리, 블루그래스 등의 음악으로 확장되어 나왔다.
이후 백인 음악은 록큰롤과 이지 리스닝, 포크 음악으로 변형되며 현대의 팝 음악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 이처럼 미국 대중음악은 1940년대 이전까지 흑인 음악과 백인 음악이 뚜렷하게 구분되어 각각의 발전을 이룬 듯하지만, 대중성이라는 측면에서 두 틀은 공존하며 성장해 나왔다고 볼 수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20세기 미국 대중음악은 흑인 음악을 기초로 한 블루스와 재즈를 통해서 여러 하위 장르와 연관 음악으로 변형되어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재즈 안에서 성장한 미국 대중음악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미국 대중문화는 1950년대 이전에 대중음악의 중심이었던 재즈를 통해서 발달하고 변화를 모색할 수 있었다.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와 힌데미트(Paul Hindemith)와 같은 작곡가는 클래식에 재즈를 도입시킨 작품을 발표했으며, 미국에서는 초. 중.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아직도 재즈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미국의 민속음악이라고 칭해지는 재즈는 21세기에 들어와서 그 예술성까지 인정받음으로써 서양 예술 음악사의 클래식 음악과 나란히 연구되기도 한다. 이제 재즈라는 장르가 갖는 정의와 특징을 잠시 살펴보자.
재즈는 흑인 노예들이 그들의 고통스런 현실을 한탄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던 가스펠과 한이 서린 음악으로 알려진 블루스, 그리고 랙타임의 흥겨운 멜로디 라인이 결합되며 시작된 음악이다. 현대 음악계에서 그나마 잘 알려진 가스펠과 블루스와 달리 랙타임은 1870년대부터 미국의 세인트루이스를 중심으로 술집과 무도장 등에서 흑인 피아니스트들이 연주하던 스타일이다. 1910년대까지 크게 유행했던 랙타임의 대표곡은 영화 ‘스팅’의 ‘The Entertainer’를 연상할 수 있고, 랙타임은 재즈와 시대를 초월해서 현재에까지 영향력을 지닌 음악으로 통하기도 한다.
재즈의 향취는 장르 본연의 즉흥(Improvisation)적이고 자유로운 음악적 색채와 심취하고 싶은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재즈는 한 사람이 같은 곡을 연주를 한다고 해도, 연주에 임하는 시점의 연주자가 지닌 상태에 따라 다른 분위기가 연출된다. 기존 멜로디와 감정이 때로는 불협화음의 흐름에도 아름다운 선율로 전달되는 특징을 지닌 재즈는 솔로 파트는 물론 조직의 연주 때마다 연출되는 구성원의 즉흥 연주가 절대적인 요소이다. 혼잡한 듯하지만, 규칙적인 나열로 진행되는 재즈의 즉흥 연주는 개개인의 음악적 감각과 개성이 구성원들을 통해 조화를 이루면서 대중과의 교감이 형성된다. 그렇다면, 재즈는 왜 미국을 대표하는 음악으로 성장하게 된 것일까?
대공황의 깊은 늪에서 서서히 벗어날 징조를 보이던 1935년 당시 스물여섯 살의 청년 베니 굿맨(Benny Goodman)의 등장은 미국 대중음악은 물론 전 세계 음악에 있어서 혁명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가 로스앤젤레스의 팔로마 볼룸에서 연주하는 동안 막 걷기 시작한 아이부터 팔순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객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베니 굿맨이 연주하는 스윙에 맞춰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음악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이것이 바로 미국의 음악이다.” 이 날 일어난 에피소드는 새로운 음악의 시대, 즉 스윙의 시대를 알렸다.
당시 미국 사회가 그의 음악과 스윙에 환호한 이유는 간단하다. 경제적인 활로가 개척된 현실에서 대중들은 뉴올리언즈와 시카고 재즈와 같은 불규칙적이고 다소 시끄러운 연주자 중심의 재즈보다, 대중 중심의 스윙에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랙타임을 기조로 한 도시적인 분위기의 밝은 사운드를 지닌 스윙은 감상이 아닌 즐김의 미학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형식적인 부분에서도 스윙은 지루하게 느껴지기 십상인 솔로 연주를 되도록 줄이고, 악단 전체의 호화로운 사운드에 중점을 두는 편곡을 통해 연주에 임했다. 그 결과 스윙은 재즈에 관심을 잃었던 대중들로부터 열렬한 호응을 얻었고, 이후 이어지는 비밥 시대와 미국을 대표하는 음악으로 자리할 수 있었다.
재즈와 ‘피너츠’, 그 함수관계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R&B 연주상’과 ‘최우수 그룹 재즈 연주상’ 등을 수상한 바 있는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램지 루이스(Ramsey Lewis)가 사회를 맡았던 TV 프로그램 ‘재즈의 전설들(Legends Of Jazz)‘이 지난 2005년 미국 PBS에서 방송된 바 있다.
당시 이 프로그램이 방영된 것은 이례적인 뉴스로 회자되었다. 그 이유는 재즈 연주를 보여주는 전문 재즈 방송이 정규 프로그램에 편성되어 방송된 것은 ‘The Subject is Jazz(1957년)’, ‘Goodyear Concert Series(1961년)’, ‘Jazz Scene(1962년)’, ‘Jazz Casual(1963년)’ 등 대표적인 재즈 프로그램이 방영된 1960년대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재즈의 본고장이라는 미국에서도 재즈에 대한 기억이 어느덧 낭만과 향수로 밀려있다는 점으로 해석될 수 있다.
퓰리쳐상 수상자이기도 한 윈튼 마살리스(Wynton Marsalis)는 1995년 아버지 엘리스 마샬리스(Ellis Marsalis), 브랜포드 마샬리스(Branford Marsalis) 등과 함께 만화 ‘피너츠’에 삽입되었던 곡을 재해석한 [Joe Cool's Blues]를 발표하면서 빌보드 재즈 차트 1위에 랭크된 적이 있다. 그는 당시 “내가 어렸을 때 TV를 통해 재즈를 접할 수 있는 시간은 ‘피너츠’를 보는 시간이 유일했다.”고 회상한 바 있다.
오늘의 주제인 ‘피너츠’는 이처럼 재즈의 역사와 함께 해 나오는 가운데, 재즈의 지난 세월을 아우르는 생명력까지 지닌 작품이다. ‘피너츠’에 뿌리깊게 녹아내린 재즈는 극 전반에 걸쳐서 흐르고 있으며, 긴장과 위트의 순간에도 늘 함께해 나왔다. ‘피너츠’의 등장은 시기적으로 스윙의 탄생은 물론 재즈의 대중화와 잘 맞아 떨어졌으며, 스윙에 내포된 다양한 감정의 격조는 ‘피너츠’의 극 전개에 제격이었다. 만일 ‘피너츠’에 삽입된 음악이 또 다른 미국의 음악이라 할 수 있는 블루스나, 컨트리, 더 나아가서 록큰롤이었다면, 오늘날 ‘피너츠’의 성공은 이 정도까지 장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렇듯 아이들의 동심을 자극하고, 어른들마저 빠져들며 공감할 수 있는 작품 ‘피너츠’의 음악은 당연히 재즈의 몫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특별히 한 장의 앨범을 통해 미국을 대표하는 음악인 재즈와 ‘피너츠’의 연관 관계를 소개한다. ‘피너츠’의 음악하면 가장 먼저 떠오른 이가 바로 빈스 과랄디(Vince Guaraldi)이다. 그의 트리오가 1965년에 발표했던 [A Charlie Brown Christmas] 앨범은 미국 CBS TV에서 특별판으로 제작한 ‘피너츠’의 시리즈물인 ‘찰리 브라운의 크리스마스’의 사운드 트랙으로 소개되며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크리스마스 시즌에 꾸준하게 판매와 리퀘스트를 잇고 있는 스테디셀러 앨범이다.
피아니스트 빈스 과랄디가 이끄는 트리오와 아이들의 해맑은 보이스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재즈의 형식을 띄는 가운데, 풍부한 감수성과 순수한 사운드가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경괘한 비트의 ‘My Little Drum’과 라이너스와 루시의 테마곡으로 알려진 ‘Linus And Lucy’, 그리고 영원한 캐롤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Green Sleeves’ 등 달콤한 노래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국내에서는 미국의 유명 얼터너티브 그룹인 스매싱 펌킨스(Smashing Pumpkins)의 기타리스트 제프 슈뢰더(Jeff Schroeder)의 프로듀서 아래 노브레인과 플라이 투 더 스카이 등이 참여한 컴필레이션 음반 [It’s Christmas Time In Seoul]이 발매된 바 있다. 프로듀서를 맡았던 제프는 “피너츠의 연재만화와 애니메이션 시리즈에서 찰리 브라운과 스누피 등 개성있는 친구들이 재미와 감동을 주었던 것을 기억하며 제작했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이외에도 상상밴드의 ‘피너츠송’과 그룹명에 ‘피너츠’의 주인공을 활용한 라이너스의 담요 등 국내에서도 다양한 음악 분야에서 ‘피너츠’의 향수와 감성은 함께 하고 있다.
미국 내에서 재즈가 갖는 위치와 그 재즈 음악을 활용한 ‘피너츠’에 대해 소개한 이 글을 통해 ‘피너츠’의 기억과 관련된 음악들에 한 번 즘 빠져 보는 건 어떨지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