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다. 오랜만에 늦게 일어났다. 늦게 일어난 기념으로 실내 자전거 대신 산책을 한다. 어제 쓴 마스크를 쓸까 하다가 쓰레기봉투에 넣는다. 새로운 마스크를 쓴 채 힘껏 숨을 들이마신다.집 뒤에 산이 있어 그런지 공기가 차다. 겨울에도 길고양이는 돌아다니고 산새는 운다. 산으로 올가가 산새 울음 사이를 걸을까 생각한다. 그제 버스에서 넘어져 까진 무릎이 시큰하다. 길고양이를 따라 걷기로 한다. 길고양이는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걷는다. 길고양이가 뛰어넘은 담이나 인간에겐 건물과 건물 틈이지만 고양이에겐 골목인 곳들을 보며 걷는다. 나도 저곳을 뛰어넘거나 비집고 걷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 집 주변의 골목은 모두 익숙하다. 걸을 때마다 골목에서 느꼈던 감정이나 행동들이 떠오른다. 이 골목에서는 전화를 받았고 이 골목에서는 우울했다. 이 골목에서는 행복했고 이 골목에서는 내용까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떤 불길한 메모를 했다. 새로운 기억을 덮어 씌우기에는 빽빽한 장소들을 가로지르다 이내 질려 돌아선다. 강아지에게는 산책이 매일 새롭다는데 나는 산책이 권태롭기 그지없다. 매일 새로운 풍경을 마주하는 강아지를 질투하며 집으로 걷는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기억에 묻히는 일이라 했다. 많은 죽음 중에 기억에 익사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몇몇 사람은 여행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생소한 언어나 생활, 풍경이라는 기억의 백지를 얻기 위해, 거기에 넘치는 삶을 덜어두기 위해.
이제 본가에 갈 준비를 해야겠다. 어제 전화로 엄마에게 떡국 대신 닭볶음탕이 먹자고 했다. 우리 집은 따로 명절을 보내지 않는다. 큰집에는 가지 않은지 오래다. 어느 순간부터 아빠만 큰집에 가다, 큰 아버지가 돌아가고 나서부터는 아무도 모이지 않는다.
어릴 적에 큰아버지가 내 뺨을 때린 것을 잊지 못한다. 친가 친지가 모이는 명절은 한 번의 화끈거리는 뺨으로 다른 기억이 들어올 자리를 잃었다. 명절에 가족이 모인다는 것이 거북하다. 닭볶음탕을 먹고 금방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일상과 명절의 경계선을 지우기 위해서. 종종걸음으로 산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마음으로 본가 현관문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