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스무 살의 나는 갑자기 록 페스티벌이 가고 싶었다. 록에 대해 관심은 없었지만 페스티벌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손을 뻗은 채 뛰는 사람들에게서 젊음을 느꼈다. 맞아. 술 먹고 널브러져 예술 타령만 하는 게 젊음은 아니지.
무작정 록 페스티벌에 대해 검색하기 시작했었다. 그러나 그 열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비싼 티켓 가격을 보고 좌절했다. 당장 주머니 사정으로는 불가능한 돈이었다. 우울해졌다. 젊음에도 돈이 필요하구나. 돈이나 벌어야겠다 싶어 알바 자리를 알아봤다. 록 페스티벌 안전요원 모집이라는 글이 보였다. 사람은 죽으라는 법이 없구나. 죽어가던 열정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별다른 고민 없이 안전요원에 신청했다.
일하는 기간은 일주일 가까이 되고, 숙식 제공한다고 쓰여 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철제 펜스가 그렇게 무거운지 처음 알았다. 슬램 존을 만들어야 한다며 철제 펜스를 옮겼다. 슬램 존이 도대체 뭐 길래 나를 이렇게 고생시키는 걸까. 물을 마시면 바로 땀으로 배출되는 것 같았다. 거기다 여기 와서 알게 된 홍대에서 밴드를 하고 있다는 형은 뭐가 좋은지 일하는 내내 싱글벙글 이어서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일 끝나고 숙소에 돌아와 마시는 맥주만이 내게 유일한 구원이었다.
록 페스티벌이 시작하기 전 날 우리는 페스티벌이 진행되는 내내 있을 곳을 배치받았다. 서로 공연장과 가까운 곳에 배치받고 싶어 하는 눈치였는데 나는 혼자 있고 싶었다. 펜스는 무거웠고 페스티벌에 대한 관심은 펜스 밑에 깔린 지 오래였다. 배치될 때마다 사람들은 소리는 내지 않고 얼굴로 환호하고 절망했다. 나는 일거리가 없는 곳에 배치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제 내 배치만 기다리면 되는데 친척 누나에게 전화가 왔다. 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나는 관리자에게 상황을 이야기하고 장례식장으로 가기 위해 준비했다. 같이 일하며 친해진 형들에게 인사도 연락처도 주고받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걸어서 내려오는데 들려오는 리허설 소리가 좋았다. 막상 돌아가야 하니 아쉬웠다. 조금 기대되긴 했었나 보다.
페스티벌에서 고개를 흔들며 점프하는 사람들 대신 바닥에 고개를 박고 곡하는 사람들을 봤다. 슬램 존이 생각났다. 밴드를 하고 있다는 형이 슬램 존은 몸부림치는 곳이라고 설명해줬었다. 검은 옷을 입은 채 널브러져 우는 사람도 부축하는 친척들도 철제 펜스처럼 느껴졌다. 무거운 마음으로 장례식장에 왔겠지. 몸부림을 치다 진정이 되면 철제 펜스가 되는 거겠지. 큰 아버지 영정사진을 보면서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어릴 적 맞았던 뺨만 욱신거릴 뿐.
장례식장도 우울한 것만 빼면 록 페스티벌과 별반 다를 것 없어 보이는데 왜 친척 동생들도 나도 몇십 년은 더 늙은 기분이 드는 걸까. 젊음을 즐기는 것은 내게 너무 먼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