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름도 있는데 제목 짓기는 왜 이리 어려울까
글을 쓰고 제목을 붙이는 일은 어렵다. 그럴듯한 제목은 그럴듯하기만 하고 쉬운 제목은 쉽기만 하다. 글을 아우르고 관통하는 제목을 붙이고 싶은데 쉽지 않다. 글을 쓰기 전에 제목부터 붙여놓을까 하는데 그건 더 어렵다. 글이 어떻게 뻗어갈 줄 알고 그럴까. 그런 생각까지 닿으니 문득 내 이름이 낯설어졌다. 이름은 삶이 완성되기 전에 지어진 제목이 아닌가.
어릴 적에 엄마에게 내 이름이 짓게 된 이유를 물었던 적이 있다. 엄마는 내 이름이 중학생 시절 짝사랑하던 사람의 이름이라고 말했었다. 농담이었는지 진담이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랬다. 당시에는 신기하다며 웃고 넘겼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름 덕분에 아빠가 나를 그렇게 때렸던 걸까 싶다. 엄마도 이름 때문에 나를 그렇게 안쓰러워했던 걸까 싶기도 하고.
주변에 개명을 한 사람이 몇 있다. 제목만 바꿔도 같은 내용의 글이 다르게 이해되거나 더욱 좋아지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럴 것이다. 별명이 몇 개나 되는 사람도 있다. 활동하는 영역에 따라 별명을 다르게 쓴다. 별명마다 내세우는 태도가 다르다고 했다. 그 사람들은 내게 별명을 붙여주고 싶어 했다. 나는 끝내 별명을 거부했다. 내 이름 하나도 감당하기 벅찼다. 나는 그들처럼 열정적이게 봉사를 하거나 환경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제목을 붙이지 않는 것도 방법이겠다. 외국은 모르겠고 한국에 이름은 없고 성만 있는 사람도 있을까. 중학교 때 친하지 않은 여자애에게 성을 붙이지 않고 이름만 불렀다고 사람들 앞에서 망신당한 적이 있었다. 그런 규칙이 있는지 몰랐는데 친하지 않으면 성도 붙여야 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김 씨나 조 씨처럼 성만 불린다는 것은 당신이 어떤 삶에 대해 궁금해하지도 간섭하지도 않는다는 뜻일까.
스승님은 시 제목이 무제인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정말 무제가 제목이 아니라 제목을 도피하기 위한 무제. 시는 세계에 대한 아주 작은 파문이니까. 방관이나 간섭하지 않는다는 선언이 아니니까. 그런 의미로 이야기하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 제목을 붙이지 않는 것을 선택하기란 제목을 붙이는 것보다 어렵다.
내 필명은 영매를 거꾸로 쓴 것이다. 브런치에 소개글인 가정 폭력에 노출되었던 '나'와 백혈병 투병을 했던 '나'가 만나 현재의 '나'가 되었습니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씁니다. 에 충실하기 위해선 죽은 마음을 내게 부르는 것보다 내가 찾아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에세이를 쓰는 것을 본명으로 짊어지고 싶지 않은 것도 있다. 필명은 나이면서 내가 아닌 것을 스스로 만든 것에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결국 짊어지는 것은 나겠지만 그것은 의자에 앉은 나라고 국한시킬 수 있으니까. 삼천포로 빠질 때 필명을 보며 방향을 잡을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