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아침 일기

물의 순환

2021-03-18

by 조매영

엄지손가락 마디가 트더니 갈라졌다. 로션이나 오일을 발라도 좋아지질 않는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살았는데 왜 이런 걸까. 작년과 달랐던 점들을 생각해본다. 글을 많이 썼다. 우물에서 물을 퍼올리듯 마구잡이로 썼다. 산다는 것은 영혼을 증발시키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컴퓨터 화면에 반사되는 내 얼굴이 쾡하다. 근래에 너무 많은 영혼을 퍼올린 것은 아닐까.

혹시 물이라도 마시면 좋아질까 싶어 1.5L를 단번에 마셔보지만 소용없다. 내부가 망가지기 시작하면 외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좋은 책이 내 안을 적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사랑하는 시를 옮겨 적는다.



뒤늦은 대꾸

신기섭


빈 방, 탄불 꺼진 오스스 추운 방,

나는 여태 안산으로 돌아갈 생각도 않고,

며칠 전 당신이 눈을 감은 아랫목에,

질 나쁜 산소호흡기처럼 엎드려 있어요

내내 함께 있어준 후배는 아침에 서울로 갔어요

당신이 없으니 이제 천장에 닿을 듯한 그 따뜻한

밥 구경도 다 했다, 아쉬워하며 떠난 후배

보내고 오는 길에 주먹질 같은 눈을 맞았어요

불현듯 오래 전 당신이 하신 말씀; 기습아,

인제 내 없이도 너 혼자서 산다, 그 말씀,

생각이 나, 그때는 내가 할 수 없었던,

너무도 뒤늦게 새삼스레 이제야

큰 소리로 해보는 대꾸; 그럼요,

할머니, 나 혼자도 살 수 있어요,

살 수 있는데, 저 문틈 사이로 숭숭 들어오는,


눈치 없는

눈발

몇,


시를 옮겨 적고 나니 몸도 마음도 축축해졌다. 내게 있어 출발과도 같은 시였고 시인이었다. 내게서 증발했던 영혼이 깨끗한 비가 되어 내린다.


어제 제주 4.3 다크투어에 대해 찾아봤다. 조만간 제주에 내려가 하루에 유적지 한 곳을 보는 여행을 해야지. 죽은 사람의 증발한 대화와 산 사람의 고여있는 울음을 생각하며 마음속 그들의 비를 기다릴 것이다. 비가 온다면 나는 그곳에 놓여 있을 작은 돌을 볼 것이다. 그 돌은 돌무덤이 되지 못한 돌이거나, 돌무덤에서 굴러 떨어진 돌일 것이다. 도망가던 사람들의 발길질이 날아다니던 돌일 것이다. 총부리를 겨누던 사람의 걸음을 멈추게 했던 돌일 것이다. 그 멈춤으로 몇 명이 더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배고픔을 달래려 알사탕 대신 빨아먹던 돌일 수도 있다.


그곳에 가서 나는 돌을 쓸 것이다. 돌 안에 더 작은 물방울을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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