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학 후 자취를 시작 한 곳은 안산 와동이었다. 학교 근처 동네로 자취방을 구하고 싶었지만 터무니없이 비쌌다. 집이 학교와 거리가 있다 보니 아무도 놀러 오지 않았다. 집에 가만히 누워있으면 유배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매일 동네를 산책했었다. 어떻게 살았는데, 어떻게 살아서 복학했는데 죽은 듯이 살고 싶지 않았다. 산책은 우울해지는 내게 하는 항의 표시였다. 그걸로도 모자랐다. 분식집에서 김밥을 한 줄 살 때도 골목슈퍼에서 자잘한 것을 사면서도 사장님들께 괜히 한마디를 더 건넸었다. 나 여기 살아있다고 어떻게든 알리고 싶었다.
최근에 동기가 안산에 다녀왔다며 사진을 보내주었는데 학교는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자주 갔던 카페나 음식점도 변함없었다. 늙는 것은 우리뿐이구나. 우리는 웃었다. 웃음이 깃발처럼 펄럭이는 것 같았다. 여기 있다고 우리 여기에 표류해 있다고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친구 덕분에 나도 안산이 가고 싶어 졌다. 로드뷰를 켰다. 전에 살던 집부터 찾아봤다.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외풍이 참 심한 빌라였다. 천천히 산책하는 마음으로 화살표를 천천히 눌렀다. 신축 빌라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없던 것들이 생긴 만큼 있던 것도 많이 없어졌다.
쫄면과 김밥이 괜찮았던 분식집은 흔적도 없구나. 한 번 먹고 단골집 삼아야지 했었는데, 다시 가니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열지 않았었다. 어느 날부턴가 분식집 셔터에는 포스트잇이 붙기 시작했다. 나 말고도 분식집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구나 싶어 읽어보니 분식집이 아니라 누군가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돌아오라고 기다린다고 어머님이 이름의 주인공을 기다린다는 내용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돌아와 줘서 고맙다는 포스티잇으로 바뀌었을 때에서야 나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 하는 분식집이었다는 것을 알아챘었지.
헬스장도 상호명이 바뀌었다. 생각났다. A4용지에 회원 두 명의 이름이 쓰여 있으며 명복을 빈다고 쓰여 있었지. 눈을 질끈 감는다. 눈을 감으니 더욱 그 날들이 선명해진다. 나는 매일 올림픽 공원을 다녀왔다. 그곳에는 방송이 이상하다고 울부짖던 유가족이 있었다. 조문을 온 시민들을 향해 울분을 토하며 당신들이 뭘 아냐고 울부짖던 단원고 학생도 있었다. 그 학생을 끌어안으며 달래던 다른 학생도 있었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조문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한 곳에선 주전부리를 팔던 옷가게도 정육점이 되어 있다. 분향소를 가지 않느냐는 질문에 단골 친구들이 거기 많이 있어 도저히 갈 수가 없다고 마음이 진정되면 가겠다고 하셨던 아저씨. 아저씨는 분향소에 가셨을까.
호수 공원도 매일 갔었지. 집에 있을 수 없었지. 장례식장은 왁자지껄해야 한다고 믿었지. 더욱 이웃들에게 실없는 소리를 하며 친한 척 굴었지. 우리는 실없이 웃었지. 실없이 살았지. 우리는 모든 희생자를 사랑했지. 사랑하면 닮는다던가. 모두 유령 같은 몰골들이었지.
현재와 과거가 뒤엉켜
나는 운다. 고개를 흔들며 울음을 깃발처럼 펄럭인다. 4월이 아니어도 나는 당신들을 기억한다고 너희가 갔던 고깃집, 헬스장, 분식집, pc방에 나도 있었다고 비록 나는 지금 여기 표류해있지만 언제라도 우리가 서로 스쳐 지나가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돌아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