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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매영 Dec 10. 2018

투병이 가벼운 농담처럼 시작되었다.


 응급실에 먼저 도착했다. 침대에 누워 엄마를 기다렸다.

 천장만 바라보고 있으니 동생들만 어린이집에 보내고 집에 혼자 있던 7살의 내가 떠올랐다. 나가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아빠와 보험회사에 다니는 엄마를 기다리던 날들. 창틀에 기댄 채 머리카락을 한 가닥씩 뽑아 태우며 놀았다. 머리카락이 타는 모습이 춤추는 것 같아 좋았다. 양껏 머리카락을 태우면 혼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기도 했다. 그러다 지쳐 잠에 들면 주술을 부린 것처럼 엄마가 곁에 있었다.

 엄마는 오지 않고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다리는 것뿐이다. 여기선 머리카락도 태울 수 없다. 손가락이라도 빨고 싶었다. 7살의 나보다 더 어려진 것 같았다.


 군의관은 담담했다. 내게 백혈병인 것 같다고 했다. 그러더니 보호자 연락처를 달라고 했다. 군의관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망설임 없이 백혈병이 의심된다고 말했다. 근처 연개 된 병원은 인수를 거부했다고 한다. 병원을 선택하면 그쪽으로 보내겠다고 했다. 어조가 마치 나를 마실 보내는 것 같았다. 옆 화이트보드에는 사격장에서 총기 사고로 병사 두 명이 근처 병원에 후송되었다고 쓰여 있었다. 총에 맞은 사람도 받아주는 병원이 나를 받아주지 않는다니, 총상보다 내가 더 심각하다는 걸까? 뜬금없이 군의관은 너도 성인이니 병을 견딜 수 있을 거라 말했다. 성인인 것과 병을 견디는 일은 어떤 상관이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는 돌팔이가 아닐까?


 운전병과 보조석에 앉은 간호장교가 나누는 이야기가 궁금했다.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멀미가 심한 체질인데 누워서 타는데도 멀미를 하지 않았다. 창밖을 보고 싶었지만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면 조잡한 의료기구와 졸고 있는 의무병만 보였다. 백혈병은 무엇일까? 나는 정말 백혈병에 걸린 게 맞는 걸까. 백혈병 하니 어릴 적에 봤던 가을동화가 생각났다. 하얀 얼굴, 보란 입술의 송혜교가 초췌해진 몰골로 송승헌 등에서 최후를 맞이하던. 얼굴도 까무잡잡하고 덩치도 곰 같은, 불과 일주일 전에 눈밭을 뒹굴며 훈련까지 해 악이 차오를 대로 차오른 내가 백혈병이라니 웃음이 나왔다. 간호장교가 돌아보는 통에 크게 웃을 수는 없었다. 군 병원은 엄살 환자가 많다는데 그래서 건강한 나를 못 알아본 것이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군의관이 돌팔이 같았다.


 간호장교는 나를 인계하고 돌아갔다. 혼자 침대에 누워 피를 뽑고 결과를 기다렸다. 배가 고팠다. 시계를 보니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다. 아침밥도 못 먹고 사단 의무대에서 국군병원으로, 국군병원에서 일반 병원 응급실로 보내진 터라 무언가 먹을 기회가 없었다.

 배가 고프니 모든 일이 별일이 아닌 것 같아졌다. 결과를 들고 온 응급실 레지던트에게 오진일 확률을 물었다. 거의 없다고 대답했다.


 자동문이 열리고 엄마가 보였다. 신병 위로 휴가 때 집에 들어선 내 표정도 저렇게 낯선 표정을 하고 있었을까? 평소처럼 툴툴거리며 엄마를 반겼다. 하얗게 질린 엄마를 보니 엄살도 피지 못 할 것 같았다. 엄마를 만난 레지던트는 더 큰 병원에 옮기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될 수 있으면 4대 병원으로 옮기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왼손에는 진단서, 오른손에는 링거를 들고 택시를 잡으러 나왔다.

대학 병원 중 집과 가까운 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얼마나 오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집과 가까운 것이 병원의 완치율보다 중요하게 느껴졌다. 엄마는 병원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 조언을 듣느라 늦게 나왔다. 울고 있었다. 조언이라고 듣고 온 것이 백혈병만큼 지랄 맞은 병도 없다는 이야기였다고 한다. 왜 우냐고 이게 울 일이냐고 다그치며 택시를 잡아탔다. 배가 더 고파졌다. 군대 밥이 아닌 맛있는 사제 밥을 먹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부풀었다. 엄마는 훌쩍이다 이내 진정이 되었는지 늦은 안부를 물었다. 나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고 했다. 나는 가서 검사가 끝나면 맛있는 것이나 먹자고 했다. 배가 고파지니 병원을 옮기는 일도 별 일 아니게 느껴졌다. 투병이 농담처럼 가볍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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