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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매영 Jul 04. 2021

게으름쟁이의 여행 준비

 계약직 기간이 끝났다.      


 마지막 출근 날, 점심시간에 충동적으로 제주행 비행기를 예매했다. 며칠을 고민하다 포기했던 것이었다. 백수를 만끽하며 책이나 읽을까 했는데, 그냥 제주에서 쓰고 싶은 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기세 좋게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일기예보를 보니 장마전선이 북상하고 있다. 제주에 있는 날의 반은 축축하겠구나. 숙소를 예약하려고 창을 켜니 점심시간이 끝나 있었다.     


 여행 기간은 열흘로 잡았다. 많은 곳을 돌아다니기보다 한 곳씩 오래 있을 예정이다. 대부분 4.3 유적지가 될 것이다. 하루 혹은 이틀에 한 곳, 한 곳에서 한 방향, 한 방향에서 하나의 사물, 하나의 사물에서 하나의 마음을 마주할 것이다.     


 남들보다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 퇴근은 일찍 하라는 지시가 내려온 덕분이다. 작별 인사를 하는 동안 마음이 제주에 가 있는 것에 감사했다. 그렇지 않으면 많이 어색했을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았다. 숙소를 찾기 전 우비를 검색한다. 비는 마음에 파문을 주기도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게 만드는 핑곗거리가 되기도 한다. 특히나 여행지에서 만나는 비는 더욱 그렇다. 비가 오니 나가지 말아야지. 비가 오니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지. 우울해하기만 해야지.   

  

 당근 마켓에서 신품 우비를 발견해 약속을 잡았다. 이제 숙소를 검색해야 한다. 유적지 주변에 있는 곳, 사람이 없는 곳, 조용한 곳, 결정적으로 저렴한 곳. 적어도 두 가지는 부합되는 숙소를 찾고 싶은데 쉽지 않다. 


 불현듯 집에 침낭이 있는 것이 떠올랐다. 이불들을 헤집어 밑바닥에 깔려 있던 침낭을 꺼냈다. 그래도 펼쳐 보니 모양새가 나쁘지 않았다. 챙기기로 했다. 숙소가 해결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오래 방치된 터라 몸이 근질거렸다. 그만 좋아하고 세탁부터 하기로 했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다시 숙소를 검색했다. 텐트가 없었다. 집에 있는 텐트라고는 따수미 텐트뿐이었다. 저렴한 비행 시간대를 예약한 통에 저녁에 도착할 예정이다. 최소한 첫날은 숙소를 정해놓아야 했다.      


 숙소를 검색하는 일은 백지에 첫 문장을 쓰는 것과 닮아 있었다. 이것이 마음에 들면 저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이러니하게 그래서 안심이 되었다. 첫 문장이 다음 문장을 낳는 것처럼 숙소를 정하고 여행지를 걷다 보면 다음 행선지나 숙소가 선명해지지 않을까 싶어 졌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되겠지. 백수에게 무계획에 조급함은 독이다. 조급하다 보면 쉽게 도달하는 곳은 우울의 늪이다. 겨우 첫날 숙소를 예약하고 컴퓨터를 껐다. 무계획에 조급하지 않으면 최소한 우울의 늪에 빠지지는 않지 않을까. 어떻게든 되겠지. 혹시 모르니 침낭은 챙기기로 한다. 여행 준비가 끝났다. 


 될 대로 되라지. 다 쓰고 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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