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그렇고 그런 거지 뭐
정신을 놓지 말자. 태어나 처음 술이 담긴 잔을 들고 한 생각이다.
아버지, 아니 아빠는 술을 먹으면 나를 후려 팼다. 사실 술을 먹지 않아도 나를 후려 팼다. 그래도 술을 먹으면 더 후려 팼다. 하수구에 머리를 박히거나 방 모서리에 몰린 채 맞으며 생각했다. 왜 맞는 걸까. 뻥이다. 맞을 때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울음만 나왔다. 반성이고 뭐고 생각도 울음에 밀려 나왔다. 맞고 나서 이불속에서 생각했다. 왜 맞은 걸까. 이미 다 맞았는데 왜 맞은 게 뭐가 중요할까. 나는 나는 저팔계 왜 나를 미워하나. 나는 나는 조매영 나는 정말 모르겠네. 저팔계 송을 부르다 보면 조금 기분이 나아진다. 나만 맞는 이유를 모르는 게 아닌 것 같아서 좋아졌다.
술을 넘기니 알코올 향이 역하다. 역해서였을까. 술을 안 먹은 날은 도대체 뭐가 그렇게 역한 것이었을까. 개소리다. 그냥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 잔에 술을 채우고 마셨다. 알코올 향이 그냥 역하다. 정신을 놓지 말자.
스무 살. 하루 용돈이 만 원이었다. 집과 학교는 4호선 끝과 끝이었다. 차비 왕복 사천 원을 제하면 내가 쓸 수 있는 돈은 하루 육천 원. 점심은 라면을 먹거나 동기에게 얻어먹었다. 학교 앞 마트에서 소주와 컵라면을 먹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거나 백반에 막걸리를 반주삼아 떠드는 동기들을 봤다. 저녁이면 술 약속이 없으면 혼자 막걸리와 두부 그리고 볶음김치를 사 텔레토비 동산이라고 불리던 학교 언덕으로 갔다. 사시사철 바람이 거세던 곳. 조명 앞에 앉아 흔들리는 나무를 보며 막걸리를 마셨다. 모두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예술이나 캠퍼스의 낭만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냥 좋은 핑계였을 뿐이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시는 더 이상 쓸 용기가 나지 않았고 그렇다고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필사만 했다. 필사는 시를 내 안에 밀랍 하는 작업이라 생각했다. 한 편 두 편 세 편 하면 할수록 내 안에 밀랍 되는 것은 시가 아니라 외면이었다. 결국 쓰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매일 술을 마셨다. 벤치에서 때로는 바닥에 드러누웠다. 누군가 나를 구원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무엇에게서 구원을 받고 싶은 걸까. 막연했다. 막연하게 구원받고 싶었다.
술을 마시면 좋은 점도 있다. 축지법을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 걸음 걸었다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면 멀리 와 있는 기분이란. 걸음 하나 만으로 어떤 깨달음을 얻은 도인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축지법이란 말 그대로 하루를 접어 넘길 수 있어 좋았다.
정기 2차 휴가. 중대장님께 휴가 신고를 하고도 소대장님을 한참이나 기다렸다. PX에서 술을 사기 위해서였다. 양주가 여러 개 있었지만 익숙한 이름의 스카치 블루를 부탁드렸다. 피부에 난 붉은 반점과 편도염이 심해 이번 휴가에는 못 마시겠지만 다음 휴가 때 학교에 들고 가 동기들과 거하게 마셔 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다음 휴가가 오기 전에 백혈병에 걸렸다.
항암을 하고 다음 항암을 기다리며 체력을 보충하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스카치 블루는 기억 속에 사라져 갔다. 아니 정확히는 술 자체와 멀어졌다. 환자가 그것도 백혈병 환자가 술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치료가 끝나고 국가 유공자건을 알아보며 좌절 했다. 내과 질환은 병의 원인을 증명하기 어려웠고 당연하게도 국가 유공자는 어려운 일이었다. 급성 골수성 백혈병은 1년 이내 치료를 하지 않으면 90%가 사망하는 질환이라 하는데 나는 상병이었다. 나는 어디에서 병이 걸린 걸까. 알 수 없었다. 비로소 술이 생각났다. 스카치 블루. 어디서 들었던 것 같은데 술은 유통기한이 없다고 했던 것 같다. 마시지는 못해도 보고 있으면 축지법은 몰라도 도인의 마음 수양을 흉내 낼 수는 있지 않을까.
술을 찾으니 엄마가 마셨다고 했다. 그것도 맥주잔으로. 앉은자리에서 한 병을 다 마셨다고 했다. 내가 병원에 있을 때라고 했다. 다음 날 숙취로 죽을 것 같았다는 말도 빼먹지 않았다. 첫 잔을 마실 때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걸까. 30도가 넘는 독한 술인데 그걸 다 마시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맛이 궁금했지만 맛을 물어보지는 않았다. 표정이 나쁘진 않았기 때문이다. 가끔 드라마나 영화에서 행복할 때나 우울의 끝에서 술을 마시는 장면을 보면 대부분의 등장인물은 술이 달다고 중얼거렸던 것을 생각하며 추측만 해 보았다. 엄마도 술을 마시면 축지법을 쓸까. 엄마는 실뜨기도 종이접기도 못 하니 땅도 시간도 접을 리 만무했다. 온전히 견뎌야 했을 것이다. 술도 국가유공자도 비워냈다. 이제 술을 마신다고 해도 나도 내일로 넘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냥 살아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