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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서도 깨달아요

눕기 위하여

by 조매영

나는 누워 있는 것이 좋다. 누워 있기 선수다. 내가 얼마나 눕는 것을 좋아하느냐면 내 깨달음의 반은 누움으로 배운 것이라 할 수 있다. 고추를 말리던 돗자리에 누워 매움은 맛이 아니라 고통이라는 것을 몸소 깨달았으며 입주가 아직 안된 신축 빌라의 옥탑 문 옆에서 누웠을 때에는 대리석이란 점퍼를 깔고 누워도 냉기를 뚫고 들어올 정도로 냉혹한 녀석이란 것도 알았으며 원통형 미끄럼틀 안에서 다리를 벌린 채 누웠을 때에는 생각보다 목에 걸린 가시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중학교 인조잔디에도 누워 있을 때에는 인조적으로 만들어진 것의 고약함을 냄새로 알게 되기도 했다. 물론 자의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눕는 것을 참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몸이 편해야 마음이 편하다 그랬다. 어디에서나 잘 눕고 잘 깨닫는 것은 축복일 것이다. 밥 먹고 바로 눕는 것도 무언가 깨달으려고 하는 것인데 매번 애인에게 혼난다. 애인에게 뒷덜미를 잡히던 도중에 핑계를 위해 쓰기 시작했다.

인생에 여러 누움이 있지만 제일 기억에 남는 누움을 생각해보면 구급차에 누워 있던 일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누운 채 움직이는 일이란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오진의 가능성을 생각하며 조금 우울해지려 했는데 산소 포화도 수치는 너무나 정상적이고 간호장교와 운전병의 대화는 유쾌했고 내 옆에 앉아 있는 의무병은 너무나 평온하게 졸고 있어 과반수의 편안함으로 인해 불편해하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역시 불리한 상황일 때에는 다수결을 따르는 것이 좋은 것 같기도.


쓰다 보니 더 기억에 남는 누움이 떠올랐다. 누워 이동하는 일이 즐겁지만 구급차 위에서 누워 있는 일은 배경의 변화를 느낄 수 없어 즐거움이 반감되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떠오른 것은 히크만 카테터를 수술받기 위해 침대에 누운 채 수술실 가던 일. 천장을 바라보며 형광등에 수시로 속된 말로 눈뽕 당하고 엘리베이터에서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는 수치사 할 것 같던 그 고난을 지나 수술실에 누웠던 상황이 기억에 남는다. 부끄럽고 고통스러웠을 것이 왜 즐겁게 기억이 남았느냐면 수술실에 누웠을 때가 진짜였다. 히크만 카테터를 수술하던 남선생님이 자신은 이 수술의 권위자라며 보조로 보이는 여 선생님에게 자랑하는 모습부터 누가 봐도 작업 거는 소리를 그대로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조형물도 아니고 배경도 아닌데 더구나 전신 마취도 아니고 부분 마취로 누워 있는 건데 너무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은 아닌가. 환자 앞에서도 사랑이 싹트는구나, 사랑 앞에 보이는 게 정말 없구나. 나 여기 있어요! 하며 손이라도 흔들어주고 싶었다. 내 병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번에도 다수결 과반수로 내 병은 아무것도 아닌 걸로 해야겠다. 침대에 실린 채 병동으로 올라오는 동안 내 입 꼬리가 자꾸 올라갔다.

그래도 진짜 권위자긴 권위자였던 것 같기도 하다. 동료 환자들이 감염으로 인해 교체하는 경우를 많이 봤었는데, 나는 모든 치료가 끝나는 동안 히크만 카테터를 잘 달고 있었으니.


이제 잘 시간이고 뒷덜미를 잡히지 않은 채 누울 수 있는 시간이다. 눕는 일은 단순한 안식은 아니다. 날카로워지는 감각을 선물 받는 순간이기도 하다. 핑계가 아니다. 뒷덜미가 서늘해진다. 빨리 누워야지. 프로 마인드로 잘 누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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