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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매영 May 30. 2024

독수리 타법도 나쁘지 않다.

 때때로 익숙하다 믿었던 것이 낯선 얼굴로 변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것을 처음 접했던 순간을 생각하게 된다. 오늘은 타자를 치는 것이 영 어색하고 낯설다. 주먹을 쥔다. 나는 분명 아무 생각이 없는데 주먹을 보니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몸과 마음이 따로 놀 때가 있다고 느끼는데 오늘이 그런 날인 것 같다. 검지를 편다. 오랜만에 독수리 타법으로 글을 쓴다.


 처음 타자 치기를 배웠을 때를 기억한다. 2000년이었다. 학교에서 저소득 가정에 컴퓨터를 지원해 준다고 했었다. 컴퓨터를 지원해 주는 대신 의무적으로 컴퓨터 학원을 다니게 했다. 교육은 짧았고 타자 치기는 오래 시키던 곳이었다. 답답함에 독수리 타법을 쓰면 선생님은 독수리 같은 눈으로 나를 쳐다봤었지. 독수리 타법으로 글을 쓰니까 배덕감이 느껴진다.


 첫 이메일도 컴퓨터 학원에서 만들었다. 첫 이메일 아이디는 dkrnahs2000이었다. 당시 아구몬을 좋아했다. 그래서 아구몬을 영타로 쳤다. 뒤에 2000은 2000년이라고 붙였던 것이다. 시작이 중요하다는데 진짜 그런 것 같다 십 년간 아이디를 만들 때 저 아이디를 사용했었으니.

 생각난 김에 접속해보려고 하니 해킹당해 있다. 광고 도배를 했다며 정지되어 있다. 다시 사용하려면 휴대폰 인증을 하라길래 확인해 보니 아빠 휴대폰 번호가 쓰여 있다.


 내 주민등록번호보다 아빠 주민등록번호를 먼저 외웠다. 뭘 하려고 할 때마다 나이가 걸렸다. 아빠 주민등록번호로 가입을 참 많이 했었다. 얼마나 많이 썼었는지 이제는 아빠 주민등록번호는 필요 없는데 잊히지도 않는다. 집에서 15세 관람가 영화를 보며 언제 15살이 되지 중얼거리던 것도 떠올랐다. 15살이 되면 덜 맞지 않았을까 싶었던 것 같다. 미안하다. 어린 날의 나야  15살이 되어도 맞았단다.


 독수리는 자연 속 시체 청소부라고 한다. 독수리 타법도 꼴에 독수리라고 깊숙이 가라앉아 죽었다 생각한 기억을 잘도 끄집어내 떠먹여 준다. 마음을 다잡는다. 다시 원래의 타법으로 바꾼다. 독수리 타법을 얼마나 썼다고 벌써 원래의 타법도 어색하다. 새롭지 않은 것은 없는 것 같다. 새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만 있을 뿐. 단정 짓고 살지 않기로 한다. 가끔 독수리 타법으로 글을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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