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아침 일기

찬물은 도저히 안될 것 같아

2021-01-10

by 조매영

온수가 나오지 않는다. 수전을 냉수로 돌리니 냉수는 나온다. 싱크대와 세면대 그리고 샤워기의 수전을 모두 온수 방향으로 돌려본다. 당연히 나오지 않는다. 사람은 그렇다. 안될 것을 알면서 해보는 것이다. 세면대에서 온수와 냉수를 번갈아 틀어본다. 냉수에서 온수로 가는 중간지점에 다다르자 다른 곳에서 물이 나온다. 온수일까? 냉수다. 원리가 궁금하다. 원리를 알려면 공구가 있어야겠지. 또한 망가져도 책임져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나는 나를 책임 질 생각은 1도 없다. 책임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학습되는 것 같다. 아버지는 무엇도 책임 진 적 없는 삶을 살았다. 물론 나를 책임지지 않았다. 그래도 좀 자기 자신은 책임지는 삶을 살지. 온수가 나오지 않지만 어찌 되었든 씻어야 한다. 밤새 시달린 꿈을 씻어내야 한다.


어릴 적에 나는 머리가 잘 깨지는 아이였다. 비행 연습하겠다고 무릎 높이에서 뛰어도 귀신같이 머리부터 떨어졌다. 아무렇게 날아오는 리모컨이나 빗자루도 귀신같이 머리에 맞았다. 도망가다 걸려 넘어진 적은 없는데 귀신같이 전봇대에 머리를 박았다. 뒤로 넘어져서 코가 깨진 적은 없지만 귀신같이 머리는 잘 깨졌다.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기분은 씻고 난 직후 같은 기분이다. 아직도 머리에 난 상처를 물로 씻어내고 소독해주던 그 거친 손을 잊지 못한다. 상처를 소독하며 당신은 어떤 기분이었습니까? 묻고 싶었는데 하수구까지 몰아세워놓고 밟아대던 것도 기억 못 하는 사람에게 너무 많은 바람 같다. 아들과 책임은 이음동의어가 아니지 않나. 왜 그랬어요?


어릴 적 꿈 중 오랜 시간 차지했던 것은 슈퍼맨이었다.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높아 높으면 백두산♬ 나는 기차나 비행기가 될 수 없으니 사람 형태인 슈퍼맨이 되어 백두산으로 숨고 싶었다. 귀신같이 머리는 하늘이 아니라 땅바닥으로 내팽개쳐졌지만 말이다.


나는 잘 씻지 않는 아이였다. 씻는 시간에 집에 있으면 그만큼 맞으니 씻을 시간에 집 밖으로 도망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덕분에 학창 시절에 고생을 좀 했다. 냄새나는 아이는 어디에서도 환영받기 힘들다. 아무도 그 아이의 환경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냥 냄새나는 아이는 냄새나는 아이일 뿐이다.

내가 집에서 배운 것은 눈치였다. 덜 맞기 위해 울음을 참는 법이라던가. 무언가 날아오기 전에 먼저 뛰쳐나가는 것 말이다. 하지만 눈치는 냄새를 지워주지 못했다. 씻겨주지 못했다. 아빠는 왜 새벽부터 일어나 있는 걸까. 교실은 시선이 날아오기 전에 뛰쳐나갈 수 없는 곳이었다.


찬물로 씻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냄비에 찬물을 담아 끓였다. 냄비에 펄펄 끓인 물을 보일러 온수관에 냅다 뿌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위험한 일이다. 보일러 고장을 유발할 수 있다고 한다.) 몇 번을 뿌리니 뜨거운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원리를 몰라도 해결이 되는 경우가 있다. 바로 이 경우가 그런 경우겠다. 뜨거운 물을 맞으며 시간이 약이다라는 문장을 되뇌었다. 비누칠을 하며 처음 자취하던 날 오랜 시간 씻었던 것을 생각했다. 비누를 씻겨내며 시간은 결코 약이 아니며 환경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생각했다. 온수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게 해 놓고 머리를 말리며 그 많은 땜빵은 어디 갔을까 고민했다. 다 마음에 있다. 나는 나를 방치해도 깨끗하게 방치하겠다. 다 씻었다. 전신 거울 앞에 잘 씻는 지금의 내가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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