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매영 Jan 15. 2021

반송된 편지

2012.09.16

 안녕하세요. 아저씨. 일단 죄송하다는 말부터 시작해야겠네요. 이렇게 늦게 편지를 쓰다니. 어젯밤에도 편지를 쓰긴 했는데 일어나니까 별로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일어나자마자 씻지도 않고 다시 편지를 씁니다. 편지에서 냄새난다고 구기지 마시고요.


 최근에 응급실을 또 다녀왔어요. 결석 때문이 아니라 이번엔 단순 혈뇨 때문이었어요. 이다루비신이라는 항암제 기억하시죠? 소변 누면 붉게 나오던 항암제. 그걸 맞은 것처럼 붉게 나오더라고요. 결석일 때는 그래도 옅게 피가 섞여 나왔는데 녹물 같아 보일 정도로 붉게 나오니 엄청 놀랐다니까요. 혹시 자다 깨서 붉게 보이는 건가 싶어 자는 동생 깨워 소변 색을 확인시키기까지 했어요. 그건 좀 즐겁더라고요. 처음 스스로 대변을 누고 내가 눈 똥이라며 사방팔방 자랑하는 어린아이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달까?


 동생에게 이건 꿈이지 않냐며 종용했지만 어림도 없죠. 현실은 냉정하더라고요. 우린 프로잖아요. 뭐 응급실 한 두 번 가는 것도 아니고 여유롭게 돗자리와 담요도 챙겼어요. 응급실이 어디 쉴 곳이 마땅치 않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저번에 결석 때문에 갔을 때에는 그럴 겨를도 없어 가지고, 너무너무 아파서 소리도 못 지르고 바닥에서 바둥거렸다니까요. 돗자리 깔고 누워 쉬고 있는 환자가 얼마나 부러웠던지 말도 말아요. 응급실에 들어가기 전에 불닭 오니기리도 사 먹었어요. 일단 응급실에 들어가면 금식이니까.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거잖아요.


 응급실 들어가기 전에 또 병동부터 들렸어요. 요즘 들어 외래 때도 병동에는 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아저씨와 제가 병원에 있을 때 있었던 간호사 누나들은 이제 없어요. 결혼도 하고, 공무원도 되고, 이직도 하며 하나 둘 떠났다고 하더라고요. 이 말을 쓰니 아저씨가 웃으면서 넌 뭐 그리 아는 게 많냐고 말하실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네요.

 병동에 들어가진 않았어요. 이제 저는 외부인이니까요. 우리가 누웠던 침대에도 누군가 누워있겠죠. 배선실에나 조금 앉아 있었어요. 보호자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분주하더라고요. 병동 문이 열릴 때마다 운동이랍시고 원사 아저씨와 아저씨 그리고 저 해서 세 명이서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던 게 생각나더라고요. 아련하네요.


 응급실에 가니 피검사와 소변검사 그리고 엑스레이 검사를 했는데 피검사를 할 때 알코올 솜이 아니라 포비돈을 바르고 거기다 멸균 장갑까지 끼고 하더라고요. 평소와 다르니 불안하더구먼요. 거기다 수혈할지도 모르니 혈액형 검사도 하겠다 하더군요. 검사를 하고 나서 벤치에 앉아 있으니 여러 생각이 들었어요. 재발인 걸까. 재발을 생각하니 머리카락이 아깝더라고요. 민 머리도 어울리긴 하는데 그래도 없는 것보다야 있는 게 좋은데 말이죠. 머리카락 이야기하니까 첫 항암 때 생각나네요. 아저씨가 저보고 머리카락 안 빠져서 신기하다 하셨잖아요. 기억나시려나. 그래서 저는 쿨해서 머리카락 안 빠진다고 그랬는데 다음 날 베개에 머리카락이 숲을 이뤘더랬죠. 다시 항암을 할지도 모르겠다니 쓸쓸해지네요. 아저씨가 항암 할 때나 고열로 누워 계실 때 그 정도 가지고 뻗었냐며 맨날 가서 놀리고 그랬는데 이젠 그러지 못하잖아요.


 전날 저녁까지 잘 드시고 평소처럼 농담도 던지고 그러셨다면서요. 간호사 누나들 다 울고 난리가 아니었다더라고요. 빌어먹을 면역력 때문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저씨가 조금 원망스러워요. 중환자실에서 아저씨 봤을 때 염증으로 보라색이 되신 손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제 손을 잡아주셨는데 의식이 있으셨을까요?


 항상 사람들을 만나면 재발을 염두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막상 재발일지도 모르겠다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검사 결과를 보니 결석은 아닌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결석 치고는 피가 너무 많이 섞여 있어 아마 다음 주에 방광 내시경을 해보는 게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어차피 비뇨기과가 예약되어 있으니까 다음 주에 병원 가서 또 이야기해 봐야죠. 다행히 혈액 수치는 좋았어요. 재발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거겠죠.


 평범하지 않은 것이 평범해버린 삶이 되었네요. 아저씨나 나나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어 했는데 말이죠. 알아요 우리가 바라던 평범함이 이게 아니라는 걸. 그래도 평범한 건 평범한 거잖아요. 기왕 다이내믹하고 스펙터클한 일상이라면 타임머신이라도 나타나 준다면 좋을 텐데 아쉽네요. 미래 가서 신약 들고 과거로 갈 수 있잖아요. 글이 너무 길어졌네요. 벌이예요. 한번 더 읽어주셔야 해요. 아저씨 아저씬 너무 갑자기 갔어요.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하게.

이전 15화 내 안에는 개가 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