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 잤다. 그래도 새벽 네시 반에 일어나 가볍게 실내 자전거를 탔다. 이제는 아침 일기를 쓰려한다. 천생 게으른 사람이라 루틴을 포기할 수 없었다. 포기하면 어떤 핑계라도 만들어 계속 포기할 것이 뻔했다.
토요일에 먹은 피부과 약이 원인이었다. 입 주변이 심하게 터서 처방받은 약이었다. 피부과 약이 독하다는 소리를 여기저기서 듣긴 했지만 소문보다 심한 것 같았다. 약을 먹고 얼마 되지 않아 졸음이 쏟아졌다. 쓰고 싶었던 것이 있어 버텨보자 했지만 버틸 수가 없었다. 졸음은 발끝부터 서서히 감각을 둔하게 만들었고 어느새 머리만 남긴 상황이었다. 눈이 자꾸 감겼다. 잠긴 눈을 두 손가락으로 억지로 열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8시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래, 잠시만 자자. 그렇게 눈을 감았다. 눈을 뜨니 다음 날 일요일 점심시간이었다.
황당했다. 잠시 누워 상황을 파악했다. 창 밖이 밝았다. 창 밖이 밝은 시간대에 깬 것은 얼마만이었을까. 암막커튼을 사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오늘 해야 할 것들을 고민했다. 실내 자전거를 탈까 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몸은 의지와 다르게 회복이 필요했다. 다음으로 아침 일기를 써야 할까 고민했다. 조금 늦게라도 쓰기로 한다. 아무리 못해도 하루에 한 편은 써야 했다. 아침이 증발했다. 아침이 증발했으니까 어느 시간도 아침이라 불러도 괜찮을 것 같았다. 글을 쓰는 데에는 핑계는 필요하지 않았다. 계획에 없던 본가에 다녀오기로 했다. 동물의 숲이 한참 유행할 때 해보려고 산 닌텐도를 챙겼다. 계륵이었다. 있으면 좋지만 할 시간이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망가질 때까지 쥐고 있었을 것이다. 놓을 때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이건 조금 대견스럽다. 집에 도착해 별 말없이 닌텐도를 티브이에 연결했다. 그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밥상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일기를 썼다.
늦잠에 황당했지만 당황스럽진 않았다. 이상했다. 나는 당황의 천재였다. 사람을 만나는 일에도 무언가 하는 일에도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누구보다 빠르게 당황을 했다. 익숙한 황당함이었다. 생각해보니 투병 때 진토제로 받은 아티반이 생각났다. 항암을 할 때 오심이 심하면 아티반을 받았다. 나중에 항진균제를 투약받는 동안에는 오심을 연기해 아티반을 받았다. 아티반을 먹으면 바로 잠에 들 수 있었다. 자는 동안에는 오심도 부작용도 잊을 수 있었다. 눈을 뜨면 투약이 끝나 있었고 고통도 잠시나마 없던 일이 되어 있었다. 매번 눈을 뜰 때마다 황당했다. 그랬다, 피부과 약을 먹고 잠들다 깬 점심도 완벽하진 않지만 비슷한 황당함이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효과적인 시간 여행. 일요일에는 피부과 약을 먹지 않았다.
약을 먹지 않으니 잘 수가 없었다. 내일 출근해야 한다며 일찍 누웠지만 정신이 너무 말짱했다. 어쩔 수 없이 양이라도 세는 기분으로 걷는 나를 상상했다. 걷다 보니 아티반 부작용으로 병동을 배회하던 내가 나왔다.
나중에야 아티반이 마약성 진통제라는 것을 알았다. 아티반을 먹은 날에는 밤에 잠을 자지 못했다. 당황해서 병동 복도를 유령처럼 배회했다. 모두가 자고 있는 병동은 대체로 고요했다. 그래도 가끔은 기도하는 소리가 들리거나 간호사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날도 있긴 했다. 나는 그것들을 가로질러 걸었다. 당황하게 되면 할 수 있는 일은 걷는 것 밖에 없다. 길을 잃은 아이처럼 무작정 걸었다. 앞으로 갔고 다시 돌아왔다. 모두 같은 꿈을 꾸고 있고, 그곳에서 나만 배척당하는 것 같았다. 부작용을 피한 일에도 부작용이 있었고 그 부작용을 견디면서도 부작용이 생겨났다.
아침에 일어나 실내 자전거를 타며 앞으로 남은 피부과 약도 먹지 않기로 결심했다. 애당초 의사가 약을 처방해줄 때 약을 먹겠냐고 물었다. 필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보습크림만 처방해주려고 했는데 빨리 좋아지고 싶은 욕심에 약을 내가 고집했다. 당황하지 않아 좋은 것은 생각할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자전거를 밟으며 아침 일기를 생각한다. 이제 무작정 걷지 않는다. 나는 이제 혼자 자고 혼자 꿈을 꾼다. 아침이 어느 때나 아침이 될 수 있듯 밤도 어느 때나 될 수 있다. 실내 자전거는 아무리 빨리 밟아도 제자리다. 하지만 내 안의 체지방은 타고 있을 것이다. 부작용을 부작용으로 덮는 것이 나쁘다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서서히 오는 변화가 지금은 더 좋다. 오늘 하루 피곤함을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견뎌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