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신혼생활은 12평 원룸에서 시작했다. 80년대 지어진 낡은 소형 아파트였다. 아내가 작은 집에서 시작하는 것을 혹시라도 꺼려할까 봐, 당시로선 정말 큰돈인 1,200만 원을 들여 호텔처럼 올수리했다. 하지만 집이 비좁고 낡은 물리적인 환경은 어쩔 수 없었다. 모서리에 부딪히지 않도록 정성스럽게 모서리 가드를 붙이고, 환풍구를 통해 들어오는 날파리들을 막기 위해 배수구 거름망을 뒤집어 씌었다.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여 아내의 환심을 사, 겨우 허락을 받고 입주할 수 있었다.
작은 집에서 신혼생활을 한 지 1년이 되어가던 어느 날, 아내가 혼수로 들여온 킹사이즈 침대에게, 원룸 대부분의 공간을 내주고, 마트에서 29,000원 주고 구입한 작은 접이식 밥상 앞에, 쪼그리고 마주 앉아 있었다. 저녁식사를 시작하려는 찰나, 갑자기 아내가 작은 온도계 같은 물건을 넓지 못한 내 가슴팍을 향해 집어던졌다. 처음 보는 물건이었는데, 가까이서 확인해 보니 임신테스트기였다. 선명하게 그어진 두줄, 임신이었다. 어떠한 예고도 없이 맞닥뜨린 아내의 임신 소식에 처음엔 놀랐지만, 이내 기쁨이라는 감정이 가슴속 깊숙한 곳에서 유전처럼 터져 나왔다. 당시 우리는 1년간 신혼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아이에 대한 생각 없이 그저 우리의 신혼생활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준비 없이 맞이한 선물이라 놀랍긴 했지만, 언제고 당연히 있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행복한 마음으로 테스트기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역시 두줄이었다.
서둘러 유명하다는 병원을 찾아 예약을 잡고 방문했다. 과도하게 친절하지 않고, 진정성이 묻어나는 따뜻한 말투의,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 선생님이었다. 그녀는 실제 임신이 맞고 아이는 무사히 안착했다고 이야기했다. 아내와 나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쁨을, 서로의 눈을 통해 확인했다. 아내는 건강한 체질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고생한다는 입덧도, 배가 고플 때만 속이 미슥거린다고 하여, 밥만 잘 차려주면 하지 않았다. 몸이 무거워 올수록 움직이기 불편해했던 것만 빼면, 임신기간 내내 컨디션도 좋고 스트레스도 없었다. 그저 배고프기 전에 밥만 잘 차려주면 되었다.
주기적으로 병원을 찾아 아이의 상태를 확인했고, 아이는 잘 자라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아이의 성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아들이었다. 그전까지 딸이든 아들이든 상관없다고, 아내를 다독이며 표정관리를 하고 있었지만, 듣고 싶은 결과를 들은 순간 뛸 듯이 기뻤다. 아내는 내심 서운한 것 같았지만...
사내아이를 원했었다. 같이 축구도 해주고, 블록도 만들고, 어렸을 적 내가 받고 싶었던 사랑의 표현들을 온전히 쏟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사우나에 가서 아들이 등을 밀어주는 상상을 하니 입가에 미소를 지울 수 없었다.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지금까지 신혼생활에서 큰 어려움 없이 12평 작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큰방과 골방으로 이루어진 좁은 집에서 육아를 하기가 어려웠다. 나로선 충분히 키울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아내의 생각은 달랐다. 매일 밤낮으로 시달리며 반드시 방법을 찾아야 했다.
부모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고 하지 않았던가? 먼저 말을 꺼낸 건 아니었다. 어머니가 조용히 자신의 집으로 불렀다. 아이가 태어나면 지금 사는 집이 좁을 테니, 집을 서로 맞바꾸자고 했다. 당시 우리가 살던 원룸 아파트는 어머니 명의의 집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내가 동생몫으로 사둔 아파트에서 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애기 태어나면, 애기 짐이 한가득이야."
"절대 거기서 못 키워"
"동생은 지방에서 회사 다니고, 주말에 와서 잠만 자고 가니 그냥 집을 바꿔 살자"
잔뜩 불쌍한 감정을 발끝부터 끄집어 올리고는 표정으로 표현하며 이야기했다.
"아니, 엄마한테 미안해서 그러지"
"아냐, 나는 원룸이 혼자 살기에 딱 맞아. 너네 사는 곳이 인테리어도 잘되어 있고"
"그럼, 그렇게 할까?"
"안 그래도 지금 사는 곳에선 좀 어려웠어"
"동생은 뭐라고 안 할려나? 걔 쓸 공간이 골방이라 거의 한평 남짓인데"
"걔는 어차피 주말에 잠깐 오니까, 괜찮아"
그렇게 거주지 맞교환 회담이 끝났다. 회담결과가 지방의 물류센터에서 근무 중인, 집주인이었던 동생에게 통보되었다. 상황을 이해하고 있던 동생은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하지만, 실제 주말에 머무르는 공간이 정말 한평 남짓의 감옥 같은 공간인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곤, 안색이 창백해졌다.
동생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형, 여기서 잘 수는 있는 거지?"
"이게 바른 자세로 누우면, 옆으로 못 돌아 누울 거 같아."
"그리고 왜 이렇게 어두워?"
나는 문제없다는 듯 너스레를 떨며 이야기했다.
"야 내 친구도 여기서 한번 잤었는데,
오히려 좁으니까 아늑한 맛이 있다고 하더라"
"또 여기가 북향이라 빚이 아얘 안 들어와서,
안막 효과가 있어 푹 잤대"
동생은 더 걱정이 되는 듯 물었다.
"이 작은 공간에 심지어 창문이 있는데,
진짜 TV에서 보던 독방 같아 보여"
창문을 가리키며 얘기했다.
"여기에 창문까지 없었으면, 잠을 못 자지,
환기도 되고 얼마나 좋아"
복도식 80년대 아파트에 복도 쪽으로 작은 창문이 있었고, 인테리어 당시 보안을 이유로 창살까지 새롭게 설치해서 실제로 감옥처럼 보였다. 그래도 주말만 자신이 희생하면, 가족이 다 편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으며, 동생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불편을 감수하기로 했다.
이사가 마무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은 그동안 치열하게 준비했던 이직에 성공했다. 근무지는 서울이었다. 이제 그 골방에서 독립할 때까지 살 운명이었다. 동생의 근무처는 거주지 주변 은행이었다. 처음 발령받고 출근한 날, 선배들이 집이 어딘지 물어보았다고 한다. 동생이 이사한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산다고 말하자, 신기하게도 그날부터 선배들이 계속 밥을 사준다고 한다. 대출 업무를 주로 보는 선배들은 동생이 사는 곳만 들어도 그 집의 평수부터 내부구조까지 알 수 있었다. 사는 집을 듣고 눈시울을 붉힌 그들이었다. 아마 그 때문인가? 동생은 그렇게 한 동안 밥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여하튼 동생의 희생으로, 조금 더 쾌적한 집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다만, 상황이 획기적으로 좋아진 건 아니었다. 이사 간 곳은 기존에 살던 곳보다 조금 넓은, 80년대 지어진 18평짜리 낡은 아파트였다. 방 하나 골방하나에서 방 하나 거실하나로 공간이 반발짝 승격했다. 새로운 곳에서 아들이 태어나길 기다리면 되었다.
부자(父子)의 탄생 그 서막이 열렸다.
다만, 18평 새로운 집으로 이삿날 큰 사건이 먼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