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해 이사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처음 어머니집에 갔을 때, 아내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어머니와 동생은 80년대 아파트가 지어질 당시 모습에서 크게 다르지 않게 살고 있었다. 잠깐 들르는 것과 거주를 목적으로 사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내키지 않았지만 대안이 없었던 아내는 복잡한 심정을 꼭꼭 숨긴 채 집안을 더 둘러보았다. 이윽고 다른 방보다 유독 작은 문의 손잡이를 잡아 힘껏 돌렸다. 화장실이었다.
오묘한 핑크빛 타일이 오래된 형광등 아래서 검은 때가 낀 줄눈 사이에 포위된 채로 외로이 반짝이고 있었다. 변기와 세면대는 세월을 안은 터줏대감이 바로 그들임을 증명하듯 누렇게 색이 바랜 채 웅크리고 있었다. 화장실 문을 열어 그 광경을 처음 봤을 때, 가장 먼저 마주친 녀석은 오랜 세월 동안 쌓인 물때 얼룩의 감시아래 희미하게 맞은편을 비춰주던 거울이었다. 뿌옇게 반사된 내 모습 뒤로 아내의 왼쪽 눈에 살짝 고인 눈물이 보였다. 순간 유명한 화가 리히텐슈타인의 '눈물'이라는 작품이 내 머릿속을 스쳐갔다.
예산 문제로 도배, 장판만 새로 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남겨둔 채 입주하고자 했으나, 아내의 슬픈 눈물을 보고 도저히 그렇게 하자고 말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비용이 적게 들어가는 필수적인 인테리어를 추가하기로 했다. 도배, 장판, 칠, LED 그리고 화장실 일부까지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적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인테리어만 선별적으로 기획했다.
주어진 예산 안에서 그 일을 수행할 업체를 선정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80년대 아파트와 나이가 같은 단지 내 상가 안쪽, 모든 공간을 골동품 같은 잡동사니에 내어준 작은 인테리어 업체가 눈에 띄었다. 가게 안은 도저히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다행히 가게 앞 유리문에 붙어있던 전화번호를 발견했다. 도대체 언제 붙여 놓은 건지 모를 뜯어진 모서리의 커팅시트를 따라 겨우 번호를 식별할 수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일정, 초조한 마음에 재빨리 전화를 걸었다. 협상은 쉽지 않았다. 우선 예산이 말이 안 되게 낮았다. 어쩔 수 없이 예산을 조금 추가하여 협상한 후 겨우 일정을 확정했다. 화장실 타일은 도저히 추가된 예산으로도 감당이 안되어 변기와 세면대 그리고 형광등만 LED로 교체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아내는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열심히 노력하는 남편을 보며 타협을 해준 것 같다. 그날의 눈물을 외면하지 않고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며 마음을 풀어준 것이 신의 한 수였다. 그렇게 아내의 재가를 받아 겨우 이삿날을 잡을 수 있었다.
손 없는 날 이사를 하는 것이라고 하여, 그날로 일정을 잡았다. 문제는 스케줄에 기록해 두지 못한 모임이 동시에 겹쳤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모임 멤버들이 당일 만날 것을 이야기하는 단체채팅창을 확인하고 등뒤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다. 그냥 모임을 안 가는 선택을 할 것이다. 하지만 모임통장에서 매달 3만 원씩 회비를 걷어 6개월 만에 만나는 모임이었다. 모임에 빠지면 6개월 치 회비를 써보지도 못하고 회원들에게 그대로 헌납하는 꼴이었다. 배알이 꼴렸다. 피 같은 돈을 그대로 날려먹을 수는 없었다. 당당하게 집안의 가장으로서 아내에게 다그쳤다.
"여보, 나 오늘 약속 있는 것을 까먹었네?"
"이따가 6시까지 약속장소로 가봐야 할 거 같아"
아내는 기가 차서 이야기했다.
"지금 무슨 소리지?"
"그래서 나가겠다고?"
약간 움찔하여 목소리를 줄여 대답했다.
"아니, 이거 못 나가면 6개월치 회비를 그대로 날려, 얼른 갔다 올게"
아내는 황당한 듯 보였지만, 너무나도 당당한 남편의 태도에 얼떨결에 허락을 해줬다. 오전부터 진행된 이사는 작은 집의 평수만큼이나 적은 살림들로 채워지며, 오후가 넘어가며 마무리되는 듯했다. 가스, 전기, 케이블 등 필수적인 이전 처리까지 정리하고 나니 5시가 넘어가는 상황이었다. 큰 규모의 이사는 종료가 되었다. 하지만 이사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세세하게 정리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남아있었다.
눈치를 보다 조용히 말을 꺼냈다.
"여보 나머진 대충 두면 내일 주말이니까, 내가 정리할게 오늘은 그냥 쉬어"
"오늘 빨리 들어와, 지금 이렇게 두고 나가는 게 말이 안 되는 거 알지?"
"당연히 알지, 비싸고 맛있는 거 위주로 먹고 얼른 올게"
"본전만 뽑고 올 거야~"
그렇게 만삭의 아내와 정리할 짐을 산더미처럼 남겨둔 채 기분 좋게 집을 나섰다. 18만 원이라는 돈을 허공에 날릴 뻔했는데, 바다와 같이 넓은 마음의 아내를 만나 돈을 지킬 수 있었다. 술자리를 하다 보면 다들 비슷한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오랜만에 만난 즐거움과 맛있는 음식, 달콤한 술 한잔이 이어졌다.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고 신선놀음에 빠져있던 나무꾼 마냥 시간을 사정없이 흘려보냈다.
어느덧 모임자리가 끝나고 취기가 잔뜩 오른 나무꾼은 집으로 향했다. 오늘 첫 입주한 아파트를 향해 흥에 취해 몸을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그리고 현관에서 장애물을 마주쳤다. 현관은 비밀번호를 눌러야 들어갈 수 있었다. 오늘이 이삿날이라 이사하는 동안 계속 열려있어서 미쳐 신경 쓰지 못했다. 비밀번호가 새롭게 설정되었는지 내가 알던 번호로 열리지 않았다. 변경된 번호를 아내가 알고 있을 것이다. 시간은 새벽으로 향해 치닫은 빛을 삼켜버린 늦은 밤이었다. 휴대폰을 보자 걱정된 마음이 담긴 아내의 부재중 전화 5통이 와 있었다. 술이 확 깼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조용히 전화기를 들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아내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조심스럽게 버튼을 눌렀다.
정말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조용히 입을 떼었다.
"여보, 자?"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화면을 바라보니 수신은 되어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용기 내어 이야기했다.
"여보 미안한데, 현관이 닫혀있는데 비밀번호 좀 알려줘"
수화기 너머로 차마 여기서 이야기할 수 없는 음성들이 쏟아져 나왔다. 결론은 본인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 몰라? 내일 관리사무소 가서 받아야겠네"
"여보 정말 미안한데 그럼 내려와서 안에서 열어줘"
무슨 욕을 먹을지는 알았지만, 당시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춥고 졸렸다. 얼른 들어가서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조용히 통화는 끊겼고, 안쪽에서 엘리베이터 음성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현관문 안쪽의 동향을 주시했다.
얼마 후 1층 엘리베이터문이 열렸다. 그곳에서 만삭의 아내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의 심정으로 조용히 현관문 밖에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쪽에서 버튼을 누르자 현관문이 열렸다. 생각보다 아내는 말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다시 엘리베이터로 들어갔고, 나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 마냥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엘리베이터문이 닫히고 다행히 생각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무서울 정도로 차가운 침묵만이 비좁은 엘리베이터 안의 분위기를 무겁게 채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슨 말을 해도 더 상대방을 열받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가만히 있었다.
결국 집안에 당도했다. 현관문이 닫히고,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무언가 머릿속이 번쩍이더니, 엉덩이의 감촉이 얼얼해지기 시작했다. 얼른 정신을 가다듬고 상황을 파악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내가 다시 자세를 잡고 있었다. 만삭의 몸으로 로우킥을 날려 통통하지 않은 내 엉덩이에 정확히 명중했다. 바로 싹싹 빌기 시작했다. 너무 피곤해서 상황이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이후로도 2대 정도 더 맞았던 것 같다. 그리고 겨우 용서를 받고 잠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새롭게 이사 간 우리 집에서 부자(父子)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꿈에 그리던 그날이 엉뚱한 사건과 함께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