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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달 May 29. 2019

27. 공감 : 장애물을 제거해야 성공이 싹튼다

지난 편 - 26. 미래가 요구하는 능력③: 연합력


 더 큰 성공은 자신과 주변의 연결에 달렸다. 연결의 수단은 공감이다. 하지만 공감을 가로막는 3가지 장애물이 있다.

      

 첫째, 공감력은 타고나는 재능이라는 착각

 둘째, 인간끼리의 연결을 가로막는 디지털 미디어

 셋째, 인류는 인종과 민족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생각     


 첫째, 공감력은 타고나는 재능이 아니다. 흔히 공감을 잘하는 사람을 마음이 따뜻하고 포근한 사람, 그 반대를 마음이 차갑고 딱딱한 사람이라 여긴다. 공감을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천성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공평하게 공감의 씨앗을 가진다.      


신이 내린 씨앗, 공감 뉴런과 공감 회로     


 1990년 이탈리아 파르마대학교의 지아코모 리졸라티 교수는 마카크원숭이 실험에서 거울 뉴런을 발견했다. 원숭이가 땅콩을 집어 들 때 반응하는 두뇌 부위가 있다. 그런데 그 부위는 원숭이 자신이 직접 땅콩을 집어 들지 않고, 다른 원숭이가 집어 드는 것만 봐도 반응했다. 상대가 움직였을 뿐인데, 뇌는 자신이 움직인 것처럼 반응한 것이다. 그 뇌 부위를 거울 뉴런이라 부른다. 상대방의 행위를 내가 한 것처럼 이해할 수 있기에 공감 능력의 바탕이 된다. 거울 뉴런은 사람에게도 발견됐다. 

 하지만 거울 뉴런의 존재가 곧 공감 능력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거울 뉴런을 지니지만, 공감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고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사이코패스도 있으니까. 거울 뉴런이 처음 발견된 마카크원숭이 또한 따뜻한 공감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성질 못된 녀석이다.

 거울 뉴런은 공감 회로의 일부분일 뿐이다.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심리학자 사이먼 배런 코언에 따르면, 공감 회로는 열 군데 이상의 뇌 부위에 걸친 훨씬 복잡한 체계다. 이 부위 중 어느 하나가 발달하지 못하거나 파괴되면 공감 능력에 손상을 입는다.

 누구에게나 씨앗은 있되, 씨앗을 키우는 건 각자의 몫이다. 어떻게 뇌를 쓰느냐에 따라, 뇌의 신경세포끼리 연결되고 끊어진다. 사망할 때까지 뇌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말랑말랑한 플라스틱처럼 잘 변한다고 해서, 이를 뇌 가소성(Brain-plasticity)이나 신경 가소성(Neuro-plasticity)이라 한다. 거울 뉴런이라는 씨앗은 공평히 가지지만, 공감 회로의 발전과 퇴보는 개인의 노력에 달렸다. 공감은 노력으로 키우는 후천적인 능력이다.      


공감은 능력을 극대화한다     


 공감의 힘은 뛰어나다. 첫째, 공감은 수행 능력을 높인다. 둘째, 공감은 창의성을 깨운다. 

 첫째, 공감으로 수행 능력을 높인 예를 살펴보자. 세계적인 석학 다니엘 핑크의 <새로운 미래가 온다>에는 의사의 공감 능력에 따라 생사가 갈린 두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미국의 우체국 탄저균 테러 사건이다. 우체국 직원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병원을 찾아가 비슷한 증상을 호소했다.

 한 사람은 자신의 병을 짐작하고도 목숨을 건지지 못했다. 그는 의사에게 자신의 몸이 좋지 않다고 털어놨는데, 최근 폐쇄된 한 우체국 시설에서 일하다가 탄저병에 걸린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의사는 관련 공중보건 기관에 전화를 걸었다. 그 기관에서는 탄저병은 치명적인 질병이 아니므로 항생제를 처방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의사는 규칙에 따라 그에게 타이레놀 몇 알을 처방해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는 며칠 후 탄저병으로 사망했다.

 한편 다른 우체국 직원은 병명은 짐작도 못 했지만 목숨을 건졌다. 의사는 그를 폐렴으로 진단했다. 그는 의사에게 자신이 우체국 시설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의사는 탄저병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뭔가 꺼림칙한 느낌에 다른 검사도 했다. 만약을 대비해서 탄저병 항생제 시프로(Cipro)를 처방했다. 그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감염성 질병 전문가를 불렀다. 그는 결국 탄저병으로 판명 났다. 의사는 그를 살릴 수 있었던 비결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저 환자의 말에 귀 기울였을 뿐이다.” 공감력이 경청으로 이어졌고, 한 사람을 살리게 한 것이다.      


 둘째, 공감은 창의성을 깨운다. 세상에 없던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발명은 창의성의 꽃이다. 이 꽃은 공감에서 피어난다.

 제품 디자이너 패트리샤 무어는 보편적(universal) 디자인의 선구자다. 보편적 디자인은 어린이나 노약자도 사용하기 편한 디자인이다. 그녀는 스스로 노인으로 변신했다. 노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기 위해서였다. 얼굴에 라텍스를 여러 겹 입혀 늙고 주름진 얼굴을 만들었다. 뿌연 안경을 써서 시야를 흐리게 했다. 귀에 솜을 넣어 잘 들리지 않게 했다. 허리를 펴지 못하게 붕대로 다리와 허리를 연결했다. 꼬부랑 할머니로 변신한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팔다리에 부목을 대어 관절을 움직이기 힘들었다. 바닥이 울퉁불퉁한 신발을 신어, 지팡이를 짚고도 절뚝절뚝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노인의 몸으로 북미 116개 도시를 돌아다녔다.

 덕분에 그녀는 노인이 일상에서 겪는 장애물을 알아냈다. 디자인의 신세계를 개척했다. 그녀의 제품은 노인도 쉽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녀를 움직인 원동력은 금전적인 성공보다는 인간의 삶을 개선하고 싶다는 욕구였다. 그녀는 말한다. “보편적 디자인의 원동력은 공감이다.” 


 공감에 바탕을 둔 체계적인 창의력 사고법이 있다. 디자인 싱킹(Design Thinking)은 디자이너들이 무엇인가를 디자인하며 문제를 풀어가던 사고방식대로 사고하는 방법이다. 디자인 싱킹의 대표적인 방법은 세계적인 디자인 회사인 IDEO에서 제시한 5단계다. ‘공감 → 문제 정의 → 아이디어 → 시제품 → 테스트’다. 문제 해결력의 시작은 문제 정의가 아니라 공감이라는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엔지니어 헤이얀 장은 손 떨림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엠마 워치’를 개발했다. 파킨슨병에 걸려 손이 심하게 떨려 자신의 이름조차 쓰지 못하는 친구 엠마 로턴을 위해서였다. 엠마 워치는 갤럭시워치나 애플워치 같이 생겨 누구나 착용하기 쉽다. 헤이얀 장은 의학 전문 지식이 없는 자신이 이 기계를 발명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밝혔다. “사람들은 원래 못하던 걸 계속 못 할 때보다 원래는 할 수 있던 걸 못하게 됐을 때 더 크게 절망하잖아요. 저도 중국에서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랬거든요. 모국어로는 공부도 잘하고 친구랑도 잘 지냈었지만, 이곳에선 제 이름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 아이가 되어버렸으니까요. 나는 제 친구 엠마를 그런 절망감에서 꺼내 주고 싶었어요.” 헤이얀 장의 발명 원동력은 친구가 겪을 고통을 이해하고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친구 엠마 로턴 또한 화답했다. “헤이얀은 제품 속의 기술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제품을 넘어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공감의 대상은 인간에 그치지 않는다. 미셸 루트번스타인,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부부의 <생각의 탄생>에서는 공감의 범위가 인간과 동물을 넘어설 때 어떤 성취를 가져다주는지 보여준다.

 미국 생물학자 바버라 매클린턱은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그녀는 코넬대학 주변의 옥수수밭에서 동료 과학자들과 유전학 연구를 했다. 당초 옥수수의 절반 정도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꽃가루가 나올 것이라 예상했는데, 실제로는 삼 분의 일에 불과했다. 그 차이는 꽤 중요해서 매클린턱은 혼란에 빠졌다. 그녀는 옥수수밭을 떠나 언덕 위에 있는 연구실로 가면서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다가 30분쯤 후, 그녀는 펄쩍펄쩍 뛰며 옥수수밭으로 달려 내려갔다. “유레카, 답을 알아냈어! 왜 불임 꽃가루가 30%밖에 안 되는지 알아냈다고!”

 남들이 알아내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는 그녀만의 탁월한 비법이 있었다. 그녀는 밭에 있는 모든 옥수수를 한 줄기 한 줄기 다 알고 있었다. 그래야만 옥수수를 진정으로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했다. “옥수수를 연구할 때 나는 그들의 외부에 있지 않았다. 나는 그 안에서 그 체계의 일부로 존재했다. 나는 염색체 내부도 볼 수 있었다. 실제로 모든 것이 그 안에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내 친구처럼 느껴졌다. 나는 종종 나 자신을 잊어버렸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나 자신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연구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창의성의 원천이다.     


디지털 미디어 남용은 공감 피로를 부른다      


 공감의 두 번째 장애물은 디지털 미디어다. 미국 UCLA 심리학과 패트리샤 그린필드 교수는 6학년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눠 실험했다. 한 그룹은 5일간 캠프 생활하며 스마트폰과 텔레비전 등의 디지털 화면을 보지 않고 서로 얼굴을 맞대고 지냈다. 다른 그룹은 5일간 평상시처럼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며 지냈다. 5일 후 디지털 화면을 보지 않았던 학생은 사진과 비디오에서 얼굴의 감정을 훨씬 잘 읽을 수 있었지만, 평상시와 다름없이 생활한 학생은 점수 차이가 없었다.  

 우리 몸은 적응력이 뛰어나다. 부모님의 음식점에서 일할 때였다. 갓 끓인 칼국수가 담긴 스테인리스 그릇이 뜨거웠다. 처음에는 그릇을 쥐려면 목장갑을 껴야만 했다. 하지만 바쁠 때는 일일이 목장갑을 끼고 벗으며 서빙할 수 없었다. 바쁠 때 한두 번씩 맨손으로 그릇을 잡다 보니 점점 더 맨손으로 잘 잡을 수 있게 됐다. 굳은살이 두껍게 박인 덕분이다. 하지만 굳은살이 박인 부위의 감각은 꽤 둔해졌다.

 감정을 느끼는 공감도 마찬가지다. 지나친 분노와 원망, 불신, 충격 등으로 가득한 드라마나 영화 등의 디지털 미디어를 많이 접할수록 감정에는 굳은살이 생긴다. 과도한 열에서 피부 세포를 보호하기 위해 굳은살이 생기듯, 지나친 감정적 사건에서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 굳은살이 생기는 것이다. 이를 공감 피로라 한다. 공감 능력에 굳은살이 생길수록 더 자극적인 디지털 미디어를 찾는다. 공감 능력은 갈수록 둔해진다.     


인류는 인종과 민족으로 나눌 수 없다
  

 공감의 세 번째 장애물은 인류를 인종과 민족으로 구분하려는 생각이다. 공감은 상대를 향한 이해다. 이해의 시작은 오해의 제거다. 상대가 나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두 가지 오해가 있다. 첫째, 인류는 인종으로 나뉜다. 둘째, 우리는 배달민족이다. 

 첫째, 인류는 인종으로 나뉠 수 없다. 인류에게 구분된 혈통이란 없다. 우리 또한 단일 민족이라 교육받았지만, 결코 순수 혈통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성은 김해 김씨다. 시조인 김수로의 부인인 허황옥은 인도지역 아요디아의 공주다. 허황옥이 가져온 파사 탑은 우리나라가 아닌 인도지역에서 나는 돌로 만든 것이다. 수로왕릉에는 물고기 두 마리가 마주 보는 쌍어 문양이 있다. 이는 아요디아 지역에서 내려오는 고유 문양이다. 김수로 역시 한반도 토착 세력이 아니라 철기를 다루는 북방 민족의 후예다. 이밖에도 혼혈의 역사는 셀 수 없다. 처용가로 유명한 신라의 처용은 아라비아인이다. 베트남의 왕자 이용상은 멸족을 피해 고려에 귀순해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배가 난파되어 조선에 정착한 네덜란드인 박연(얀 얀스 벨테브레)은 1남 1녀를 낳았다.

 굳이 일일이 역사를 들춰보지 않아도 된다. 과학은 명쾌하다. 애초에 한반도에서 생겨난 인간은 없다. 우리는 모두 외지인이다. 한반도에 2만 년 전 도착한 북방계와 3~4만 년 전 도착한 남방계의 혼혈이다. 유전자는 아프리카의 호모 사피엔스, 유럽의 네안데르탈인, 알타이산맥의 데니소바인 사이의 혼혈임을 증언한다. 즉, 우리는 한반도에서 생겨난 순혈이 아니고 아프리카와 유럽과 알타이에서 유입되어 만난 외지 혼혈인이다.      


 둘째, 민족주의 또한 공감의 걸림돌이다. 민족은 일정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동안 언어와 문화로 형성된 집단이다. 그럴듯하지만, 민족의 정의는 모순이다. ‘일정한 지역’이라는 공간도 ‘오랜 세월’이라는 시간도 애매하기 그지없다. 피가 같다고 하나, 미국 이민 2세의 자유분방함은 우리와 정서가 다르다. 오히려 피가 섞였다고 하나, 한국에 정착한 혼혈 2세의 정서가 우리와 비슷하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제주도의 어르신보다는 서울말에 유창한 외국인이 서울 사람과 말이 잘 통한다. 인류를 민족으로 명확히 나눌 순 없다.     

 “민족은 상상의 정치 공동체다.” 미국 코넬대학 국제학과 교수 베네딕트 앤더슨의 말이다. 민족은 정치가가 국민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 만든 허상일 뿐이다. 나치즘과 같은 극단적인 민족주의가 없었다면, 독일은 유럽 침공 군대를 모으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나라도 민족주의가 없다면, 침략 군대를 모으지 못한다. 

 민족주의는 곧 민족 우월주의다. 자기 민족이 남보다 열등하다면 누가 민족주의에 빨려들겠는가. 민족주의는 자기 민족이 우월하다고 포장하는데 중점을 둔다. 12척으로 133척을 물리친 명량해전은 내세우지만, 고작 300명의 청군에게 10배가 넘는 조선군이 전사한 쌍령전투는 숨긴다. 일본은 영토를 넓힌 역사는 기록하고 향유하지만, 영토를 넓히며 벌인 온갖 만행은 숨기고 줄이기에 여념 없다. 

 민족 우월주의는 공감의 바탕인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을 훼손한다. 타민족을 업신여기게 한다. 국제 업무를 경험한 사람은 안다. 한국인은 무의식적으로 백인을 경외하고 동남아인을 무시하지만, 한국인보다 무능한 백인도 많고 유능한 동남아인도 많다는 것을. 외모도 국적도 능력과 무관하다. 인간에게 각기 분리된 혈통이나 민족 따위는 없다. 우리는 공통의 조상을 지닌 하나의 인류다.      


인간의 연결을 회복하기
 

 점차 인간성이 소멸하고 있다. 미디어의 침투도 한 원인이다. 이어폰은 인간의 귀를 막았고, 스마트폰은 인간의 눈까지 막아버렸다. 인간은 이제 서로를 바라보지도 듣지도 않는다. 길거리에도 대중교통에도 병원 대기실에서도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스마트폰만 바라본다. 볼수록 잘 알아지고, 보지 않을수록 낯설어진다. 인간은 이제 공감은커녕 서로가 낯설고 어색하다. 미디어에 빼앗긴 인간의 연결을 되찾자. 아이에게 인간끼리 연결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가 필요하다.     


 첫째, 일상에서의 인간 연결을 확대하기다. 일상의 사소한 행동 하나에서도 인간의 연결을 확대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부모가 모범을 보이면 된다. 문 잡아주기다. 자신이 문을 열고 지날 때 뒤따라오는 사람이 있으면 문을 잡아주자. 불과 몇 초의 시간과 소량의 칼로리만으로도 “고맙습니다”라는 감사와 “별말씀을요”라는 배려 그리고 소리 없이 짓는 담백한 미소를 주고받는 인간의 연결을 경험할 수 있다. 

 가장 어색한 공간이 가장 친근한 공간이 될 수 있다. 아파트 승강기다. 노인이나 유모차에 순서를 양보하고 재활용품 분리수거를 하는 주민이나 짐을 든 사람을 위해 열림 버튼을 눌러줄 수도 있다. 배려는 곧 존중이다. 상대를 존중하는 부모에게서 아이는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를 배운다. 

 상대를 존중하는 다른 방법은 질서 지키기다. 아직 우리나라의 질서는 부족하다. 차가 드물다는 이유만으로 빨간불에 횡단보도를 건너거나 무단횡단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지만 자신이 운전할 때는 신호를 어기고 불쑥 튀어나온 보행자를 탓한다. 노란불에 무리하게 꼬리를 물며 교차로에 진입하는 차도 적지 않다. 집 근처 초등학교 앞 횡단보도의 신호가 비보호 좌회전에서 좌회전 신호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신호 위반하는 차가 많다. 상대가 보이지 않더라도 서로의 약속인 규칙을 지키는 모습에서 상대와 사회를 존중하는 아이가 자라난다.

 게임에서도 질서를 익힐 수 있다. 일방적인 자기 페이스에만 몰두하는 실시간 디지털 게임보다는 차례를 주고받는 보드게임이 좋다. 나에게 차례가 오듯이 상대의 차례가 있다는 걸 익히고 상대의 권리를 존중하는 법을 배운다. 현란한 디지털 자극이 없기에 더 중요한 것에 집중할 수도 있다. 상대의 차례 동안 게임 전략을 가다듬으며 사고력을 키울 수 있다. 게임하며 상대와 눈빛을 나누고 함께 환호하고 손뼉을 치며 인간답게 연결될 수 있다.    

 

 둘째, 단체 활동 참여다. 축구 등의 단체 운동은 아이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팀으로서 존재를 느끼고 팀원 전체와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번 경기에서 몇 골 넣었어?”라는 개인의 성과를 묻는 말보다는 아이가 팀에 어떤 기여를 했느냐는 질문이 좋다. 그럼 아이는 자신의 패스를 시작으로 여러 동료의 발끝을 거쳐 결국 골로 연결되었다는 걸 들려줄 것이다. 자신이 상대 공격수에 바짝 따라붙어 수비한 덕분에, 공격수가 패스조차 잘 받지 못했고 이게 팀의 승리로 이어졌다는 말을 해줄 것이다. 

 공연장은 퍼포먼스의 장 이전에, 공감의 씨앗이 쑥쑥 자라는 밭이다. 연극은 자신이 아닌 배역에 공감하고 몰입하며 상대방과 교감해야만 한다. 낯선 역할에의 몰입과 상대방과의 교감은 공감 능력을 키우는 훌륭한 경험이다. 연기뿐만 아니라 합주, 합창, 율동과 같은 공연도 공감 능력을 키울 훌륭한 기회다. 자신이 연주하고 노래하고 몸짓하는 박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 팀의 흐름에 온전히 몰입한다. 공연을 하는 동안 자신의 존재는 어느덧 팀의 부분이 되고 아이가 느끼는 존재감은 개인에서 팀으로 확장된다.      


공감은 마음이 아니라 마음의 접점을 공유하는 것이다   

  

 흔히 겉에서 보기에 비슷한 경험이면, 같은 경험이고 같은 감정이라 여긴다. ‘내가 실연을 겪어봐서 아는데’와 같은 잘못된 사고를 할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 다 같은 실연이라도, 얕게 스치다 헤어지는 바람둥이의 실연과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준 사람의 실연은 다르다. 만약 바람둥이가 사랑에 모든 것을 바친 사람에게 “그깟 이별 한 번 했다고 슬퍼하기는!”이라고 말한다면, 공감이 아닌 실소로 응답할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경험으로만 판단하는 사람은 실수를 저지른다. 펜 한 자루를 잃어버리고 풀이 죽은 사람에게 말한다. “뭐, 펜 한 자루 잃어버린 게 대수라고. 내가 여태까지 잃어버린 펜은 한 박스는 될 걸. 그딴 거 다시 사면되지.” 하지만 그 펜이 소중한 사람의 유일한 유품이라면 어떨까? 그는 한 자루의 펜이 아니라 하나의 세상을 잃은 것이다.


 공감은 상대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와 내 마음의 접점을 공유하는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우리는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각자 살아온 경험이 모두 다르기에 단어 하나, 물건 하나, 생각 하나하나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경험은 비슷할 수 있어도 감정은 비슷하기 어렵다. 비슷한 경험은 공감을 향한 첫걸음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숭산 선사는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캄보디아의 고사난다, 베트남의 틱낫한과 더불어 4대 생불로 불렸다. 그는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오직 모를 뿐!” 현재의 깨달음에 머물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라는 격려다. 앎의 횃불 밖의 무한한 무지를 향하라는 진군의 북소리다. 

 “오직 모를 뿐”은 무책임한 말이 아니다. 오히려 무한한 책임감이다. 주변을 살펴보면 ‘이건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고 큰소리치는 사람이 더러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 치고 제대로 일하는 사람은 드물다. 반대로 비슷한 경험이 있어도 긴장을 놓지 않는 사람도 있다. 자신이 간과한 부분은 없는지 경계하고 신중하게 접근한다. 이런 사람이 맡은 일은 대부분 결말이 좋다. 자신이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모르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마음은 성과를 높이는 무한한 책임의식이다.

 지혜를 추구하는 나침반인 “오직 모를 뿐”은 공감에도 적용된다. 인간은 상대를 절대로 알 수 없다. 아무리 당신이 백 번, 천 번 다시 태어나고 죽는다 해도 상대를 완전히 이해할 순 없다. 살아온 경험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공감은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구나’라고 파악하는 마음이 아니라, ‘아직도 그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아’라는 모르는 마음에서 싹튼다.  


다음 편 - 28. 주변과의 갈등도 성공으로 바꾸는 연금술


글로는 전하기 힘들었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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