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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Sep 19. 2017

이게 진짜 나야

수잔 발라동 <자화상>


번화한 거리에서 길거리 화가가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손님을 끌기 위해 연예인을 똑같이 그린 그림을 여러 장 걸어놓았다. 사진을 그대로 붙여놓은 거 아닐까 싶을 만큼 똑같은 그림들도 간혹 보인다. 누군지는 단번에 알겠는데 어딘지 미묘하게 다른 얼굴로 그려진 유명 연예인도 있다.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고객이 나타나면 화가는 심혈을 기울여 붓을 놀린다. 화가의 세심한 눈길, 지나가는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고스란히 받으며 캔버스 앞에 앉은 손님은 연신 입꼬리를 올리고 눈을 깜박인다. 어느새 화가와 모델을 둥글게 둘러싼 행인들은 소곤소곤 말한다. 얼마나 똑같이 잘 그릴까?  



재밌는 발견 한 가지. 대부분 화가들은 자기 앞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조금씩 미화한다는 사실. 완성된 초상화를 받아 든 사람이 짜증을 내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한 것 같다. 그들은 그래 내가 이 정도는 생겼지, 만족하며 그림값을 지불한다. 누구나 아름답고 싶다. 특히 남들 눈에 아름다워 보이고 싶다. 만일 내가 자화상을 그릴 수 있다면 외모의 단점은 열심히 감추고 장점은 눈에 띄게 윤색할지도 모른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고 나서 이런저런 보정을 거친 뒤 그것을 진짜 내 모습인 양 카카오톡 프로필에 올리는 것처럼. 사실 많이 각색된 모습이지만 그것을 '가짜'라고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독특한 여자가 있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화가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 1865~1938).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실물보다 못생기게 그렸다. 원래 미인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수잔 발라동은 화가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녀는 모델이었다.  

값싼 스튜디오와 아름다운 경치를 찾아 모여든 예술가들로 북적였던 몽마르트 언덕에서 발라동은 모델을 찾는 화가들에게 선택되길 기다리며 자신을 전시하던 수많은 모델 중 한 명이었다. 끼를 타고난 발라동은 모델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명 화가들의 뮤즈가 된다. 퓌비 드 샤반느(Pierr puvis de Chavanes, 1824-1898,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 1841-1919)의 뮤즈이자 연인이었고 자신보다 23세나 어린 음악가 에릭 사티(Éric Alfred Leslie Satie, 1866-1925)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특히 르누아르는 발라동의 아름다운 외모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르누아르 그림 속 발라동은 흰 피부와 풍만한 몸매의 청순한 여인이다. 촉촉하고 커다란 갈색 눈동자, 복숭아빛 볼, 하얗고 부드러운 목선과 어깨 그리고 가슴. 곁을 지나가는 누구라도 한 번쯤 뒤 돌아볼 만한 미인이다. 


르누아르, <발라동>, 1885



수잔 발라동의 본명은 마리 클레망틴 발라동(Marie-Clementine Valadon). 발라동의 어머니는 사생아로 태어난 딸을 안고 파리로 이주했다. 모녀는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고 발라동은 어린 나이부터 생계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약 15세기 되기 전까지 그녀는 웨이트리스, 곡예사, 가정부 등 돈이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 했다. 곡예를 하던 중 부상을 입고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발라동이 선택한 일이 바로 모델이었다. 아름다움을 타고난 발라동에게 모델은 천직이었을지 모른다. 수많은 화가들이 그녀에게 반했고, 그녀를 모델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 



모델로 승승장구했지만 발라동은 화가가 되고 싶었다. 자신을 뚫어지게 관찰하는 그들, 화가의 자리에 서고 싶었다. 유명 작가들이 어떻게 작업하는지 어깨너머로 배운 게 다 였지만 발라동은 왠지 자신 있었다. 예술가가 되는데 무슨 자격과 승인이 필요할까. 그녀는 화가를 꿈꿨고, 화가가 되었다. 화가로 데뷔한 후부터 사용한 예명이 바로 '수잔'이다. 이 이름은 그녀와 사랑에 빠졌던 화가들 중 한 명인 툴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 1864-1901)이 지어준 것이었다. 로트렉은 발라동에게 그림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녀를 지지해준 사람이기도 했다. 발라동과 로트렉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고 서로를 떠났지만, 발라동은 그가 지어준 수잔이라는 이름을 버리지 않았다. 



모델, 마리 클레망틴 발라동에서 화가, 수잔 발라동이 된 여자.

남성 작가들의 누드화 작업에 있어 매우 수동적인 위치(시선을 받는 대상이자 아름다워야만 하는 대상)였던 발라동은 자신의 작업에 있어서는 주체이자 보는 사람이 되는 급격한 전환을 겪는다. 이 경험에서 발라동은 '시선'을 소유한다는 것이 곧 대상을 판단하고 재단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니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발라동은 그 권력을 남용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남성 화가가 아름다운 여성 모델을 고용해 이상적이고 고전적인 외모를 가진 '여신'으로  그려내는 방식을 완전히 버린 것이다. 발라동은 대신 자신의 삶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진짜 여성, 현실에 발 딛고 서 있는 여성들의 진솔한 몸을 그렸다. 그것이 진짜라고 믿었다. 


 

수잔 발라동, <자화상>, 1927


자신의 얼굴 또한 예외는 없었다. 있는 그대로 그려진 발라동의 얼굴은 르누아르가 그린 그림 속 여인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각진 얼굴, 내려간 입꼬리, 움푹 파인 두 눈과 처진 눈매, 건조한 피부와 푸석푸석한 머릿결까지. 굵은 목에는 주름이 졌고 풍만했던 가슴은 옷 속에 감쳐줘 굴곡조차 보이지 않는다. 만나는 화가들마다 사랑에 빠질 정도로 매력적인 외모를 지녔던 발라동은 왜 자신을 전혀 아름답지 않은, 초췌해 보이기까지 하는 여자로 그린 것일까. 물론 달콤한 향내를 풍기는 젊은 시절의 자태는 세월을 따라 저 멀리 사라져 버렸기에 그 옛날의 모습과 똑같을 수는 없다. 그렇다 해도 자신의 단점을 감추려는 시도는 그림 속에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발라동은 모델로 활동하던 시절 내내, 아름다워야만 했다. 남성 화가들 눈에 매혹적인 여자로 보여야 했다. 그래야 모델일을 할 수 있었고, 돈을 벌 수 있었으니까. 그녀는 누드 사진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실제 발라동이 모델 시절 찍은 누드 사진을 보면 자신을 바라보는 남성화가(혹은 사진가)의 시선 앞에서 기꺼이 시선의 대상을 자처한 듯한 포즈와 눈빛을 볼 수 있다. 자신을 바라보는 남성 작가들의 시선 앞에서 행복한 여인을 연기하고, 뇌쇄적인 여인을 연기하고, 사랑에 빠진 여인을 연기해야만 했던 발라동. 그림을 배워,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뒤 그녀는 그 모든 굴레를 벗어버렸다. 매끈하게 포장되어 남들 앞에 서야만 했던 자신을 버리고, 꾸밈없이 진솔한 자신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내기 시작한다. 그동안 감추어야만 했던 단점들을 보란 듯이 캔버스에 쏟아낸다. 



그녀의 그림은 억압에서 벗어난 이의 속 시원한 고발이자 일종의 반란이다. '여성의 벗은 몸을 주제로 폭넓게 작업한 최초의 여성 미술가'이자 '여성 화가로서 최초로 남녀 누드를 그린 인물'이라는 수식어는 발라동이 모든 규범과 전통을 얼마나 신나게 깨부수었는지 보여주는 지표다. 




발라동은 재능 있는 예술가였으며 동시에 겁 없는 도전자였다. 그녀의 그림들을 보며 자문한다. 

 

진짜 내 모습, 숨기고 싶은 못난 모습들을 남들 앞에 당당히 내보일 수 있을까. 
분명 확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예쁘게 나온 사진 한 장을 건지기 위해 똑같은 각도로 수십 장의 사진을 찍어대는 이들(나를 비롯한)에겐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길거리 화가가 만일 내 얼굴을 적나라하게 정말 있는 그대로 그린 그림을 건넸다면 그림값은커녕 형편없는 그림 실력을 가졌다며 그를 나무랐을지도 모른다. 



발라동의 자화상은 분명 아름답지 않지만, 어떤 의미에선 아름다운 그림이다. 

세상에 의해 강요받았던 '아름다워야 할 의무'에서 뻔뻔할 만큼 자유로운 그림이기 때문에. 






수잔 발라동의 1927년작 자화상은

현재 누가, 어디에 소장 중인지 

어떤 정보도 알 수 없는 상태입니다.

알려지진 않았지만 누군가는 그녀의 자화상을 갖고 있겠지요.


전혀 아름답지 않은 한 여자의 자화상.

그것을 집 안 어딘가에 걸어둔다면

그림과 마주칠 때마다 여러 생각이 교차할 것 같네요.

젊음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

세상엔 아름다움과 추함이 공존한다는 사실,

그럼에도 우리는 나이를 먹고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한 때를 지나

언젠가는 그 아름다움이 모조리 사라져 버린 모습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까지.


수잔 발라동의 그림들을 훑어보며 가장 재미있었던 건

본인이 그린 자기 모습에 비해 남들이 그려준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는 거예요.


그녀는 어쩌면 '예쁜 수잔 발라동'이라는 타인들의 평가가

지긋지긋했던 걸까요. 

왠지 그녀의 그런 자신감과 용기가 부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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