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윌리엄 고드워드 <달콤한 게으름>
이리저리 부산한 하루에 녹초가 돼버린 내게 친구 B가 사진 한 장을 보냈다.
무표정한 얼굴의 핑크색 펭귄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사진을 보며 한참을 웃었다. 진짜 아무 생각이 없다기보다 너무 생각이 많아서 멍해져 버린 친구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시간을 축내고 있는 핑크색 펭귄 녀석이 부럽기도 했다. 하루쯤 마음껏 게으름 부리며 뒹굴뒹굴 빈둥거리고 싶지만 선뜻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사실 죄책감 때문이다. 해가 뉘엿뉘엿 져 갈 때 순식간에 몰려오는 무거운 죄책감. 세상에, 이렇게 비생산적인 하루를 보내다니. 나는 벌 받아야 해. 그리곤 다짐한다. 내일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부지런히 시간을 채워야지. 약간은 비장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며 되뇐다.
그런데 이거 참 이상한 일 아닌가. 하루정도 게으름 부린 게 죄책감까지 느낄 일일까.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죄책감은 저지른 잘못에 대해 책임을 느끼는 마음을 말한다. 나는 게으름을 '잘못'이라 여기고 있는 셈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죄책감을 이렇게 설명하기도 한다. 죄책감의 핵심에는 일종의 불안이 있으며, 이 불안에는 "만약 내가 누군가를 다치게 하면, 결국 나도 다칠 거야"라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다고. 나의 경우에 대입시켜 보면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오늘 내가 게으름을 부리면, 결국 내게 안 좋은 일이 생길 거야."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건 죄악에 가깝다고 교육받으며 자라왔으니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른다.
인간은 충족될 수 없는 욕구 앞에서 '대리만족'이라는 묘수를 쓴다. 게으른 하루를 보내고 나면 늘 불안했던 나는 우연히 마주친 그림 하나에 완벽한 대리만족을 느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널브러져 있는 여자. 그녀의 눈은 내게 말하고 있다. '너도 여기, 내 옆에 와서 누워 볼래?'
이 그림을 그린 이는 영국 출신 화가 존 윌리엄 고드워드(John William Godward,1861-1922). 복숭아빛 볼, 영롱하고 부드러운 눈동자, 뽀얀 피부. 하늘거리는 살구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어느 궁전 혹은 고급 저택에서 나른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물결 하나 일지 않는 인공 연못에는 하얀 연꽃들이 군데군데 피었다. 연못 뒤로 이어진 조그만 계단은 어디로 이어져 있을까. 단 세 칸에 불과한 나지막한 계단은 섬세한 기둥 두 개와 다채로운 모자이크로 장식된 가짜 문과 이어져 있다. 어딘가로 이동할 필요조차 없는 완벽한 게으름의 공간을 상징하는 장치다. 드레스 자락 밖으로 살짝 나온 여인의 발은 한없이 부드러워 보인다. 거친 자갈 바닥을 걸을 때는 결코 신을 수 없을 것 같은 말랑말랑한 가죽 샌들을 신기에 가장 적합한 발이다. 맹수들은 털이 벗겨진 채 여자 밑에 깔린 신세다. 이 공간 속 어떤 것도 그녀를 위협하지 않는다.
고드워드가 그림을 통해 나타내고자 한 것도 정확히 이런 분위기다.
그림의 제목부터 <Dolce Far Niente>다. 이탈리아어로 Sweet to do nothing, '하는 일 없이 지내는 즐거움'이란 뜻이다. 한 마디로 달콤한 게으름. 제목 그대로 그림 속 여자는 달콤하게, 게으르게, 어느 하루를 보내고 있다. 예쁘게 차려입고 화장까지 했지만 웬일인지 "나 이대로 좀 누워있을래"라고 말하는 듯하다. 우리도 그런 적 있지 않은가(솔직히 매우 빈번히 그런 일이 일어난다). 외출하려고 모든 준비를 다 했는데, 그냥 침대에 드러누워 게으름 피우고 싶은 날. 하지만 우리는 게으름에 못 이겨 약속을 취소했을 때, 후련함보다는 죄책감이 더 클 것임을 알기에 꾸역꾸역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1861년 영국의 윔블던에서 태어나고 자란 고드워드는 다섯 형제 중 맏이였다. 자식들에게 매우 엄격했던 부모님의 양육 방식 때문에 그는 부끄럼 많고 비사교적인 성향을 갖게 되었다. 26세가 되던 해, 로열 아카데미에 자신의 그림을 전시하며 화가의 길로 들어섰으나 가족들은 그의 직업을 인정하지 않았다. 런던에 있는 보험 회사(The Law Life Assurance Society)의 임원을 맡고 있었던 고드워드의 아버지는 맏아들이 늘 못마땅했다. 그럼에도 고드워드는 화가야말로 자신의 천직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사건건 간섭하고 강요하는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기란 쉽지 않았을 테지만 그는 그들이 반대하는 길을 걸었다. 고드워드가 화가로서 걸었던 길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의 그림은 신고전주의(Néo-Classicisme) 화풍이다. 신고전주의란 고전 양식의 부활을 목표로 하는 사조로 고대 그리스 로마의 엄격한 양식을 따른다. 신고전주의 화풍이 주를 이루었던 때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였으며 고드워드가 그림을 그리던 19세기 말에는 이미 한물 간 양식 취급을 받았다.
19세기 말, 유럽을 휩쓸었던 미술 사조는 인상주의와 입체파 등 모더니즘 회화였다. 전통 회화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미학에 사람들이 열광할 때 고드워드는 왜 신고전주의 화풍을 고집했던 걸까. 고드워드의 고집이었을 수도 있고 그가 가장 좋아했고 잘 그릴 수 있었던 그림이 바로 그런 그림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화가들이 모두 인상주의와 입체주의 그림을 그릴 때 신고전주의 그림을 그린 것을 그저 '고집'이었다고 뭉뚱그려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유행에 상관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무엇이 있기 마련이기에. 고드워드는 자신의 화풍을 포기하기보다 그것의 가치를 알아봐 줄 다른 장소를 찾기로 했다. 신고전주의 화풍이 목표로 삼았던 고전 양식의 발상지, 이탈리아로. 그는 긍정적인 평가를 기대했지만 이탈리아 역시 그의 그림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고드워드가 희망찬 미래를 꿈꾸며 이탈리아로 떠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아들과 모든 연락을 끊었으며 가족사진에서 그의 얼굴을 도려내버렸다. 이때 그의 나이 51세였으니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 가족들의 멸시와 비난 속에서 살아왔을지 짐작된다. 60세가 되던 해 고드워드는 이탈리아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년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세상은 나의 그림과 피카소의 그림을 모두 받아들일 만큼 크지 않다.
The world is not big enough for myself and a Picasso.
그가 유서에 남겼다고 알려진 글귀다. 피카소의 방식으로는 고드워드의 세계를 그릴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시간은 강물처럼 흐르고 사람들의 취향과 평가 또한 그에 맞게 흐르는 법이다. 살아있을 때 무시당했던 고드워드의 이름은 현재 소더비, 크리스티 등 세계적 경매 기업에서 19세기 유럽 미술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거론된다. 실제 크리스티는 2015년, 빅토리아 시대 여성의 아름다움을 재현한 다섯 작가 중 한 명으로 고드워드를 선택했다. 그의 그림은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인기 상품이다.
그의 아름다운 그림은 마치 고난의 시절 속에서 한 줄 한 줄 써 내려간 달콤한 시어(詩語) 같다. 그가 절실히 꿈꾸었으나 결코 가 닿을 수 없었던 이상향의 현전(現前)이다. 여유로움마저 사치가 돼버린 현대인들에게 고드워드 그림 속 메시지는 위안이 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지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만의 공간에서 오직 나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가 많지 않은가. 게으름이 불안한 나도 이 그림을 보며 잠시 달콤한 게으름에 젖는다. 비록 찰나일지라도.
존 윌리엄 고드워드의 1904년작 <Dolce Far Niente>는
개인 소장품(Private collection)입니다.
아쉽게도 공공 미술관에서는 이 작품을 만날 수 없네요.
고드워드는 '달콤한 게으름'이라는 동일한 주제로 세 가지 버전의 그림을 남겼습니다.
1897년작과 앞서 보신 1904년작, 그리고 1906년작이 그것인데요.
재미있게도 세 작품 모두 개인이 소장하고 있어요.
동양의 옛 선비들은 와유(臥遊)를 즐겼습니다.
'누워서 유람한다'는 뜻으로 안방에 누워 명승이나 고적을 그린 그림을 보며
상상 여행을 하는 거예요.
보통 직접 가 볼 수 없는 이상향, 무릉도원 같은 곳을 와유합니다.
고드워드의 그림을 소장한 이 또한 숨 돌릴 틈 없이 바쁜 일상을 보내는 사람 아닐까요.
달콤한 게으름이 마음껏 허용되는 곳을 상상으로나마 여행하고 싶은 그런 사람 말이죠.
실물을 볼 수는 없지만
화면으로나마 우리도 와유해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