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아 구르스키 <99 센트>
이례적으로 큰 태풍이 한국을 덮쳤던 수년 전 여름,
무섭게 휘몰아치는 바다를 바라보며 두려움에 떨었었다.
집채만한 파도가 끝없이 몰려오는 짙푸른 바다는 내가 알던 바다가 아니었다. 창문에 두 손과 얼굴을 바짝 붙인 채 홀린 듯 그 광경을 바라봤다. 무서웠지만 눈을 뗄 수 없었다. 도저히 한눈에 담을 수 없는 광활한 풍경을 마주하면 말문이 막힌다. 한 편으론 기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푸르다 못해 검은빛이 도는 드넓은 바다, 빨려 들어갈 듯 짙고 결코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은 우주, 만년설로 뒤 덮인 웅장한 산. 그런 거대한 것들 앞에 서면 어김없이 묵직한 두려움이 엄습한다. 가늠할 수 없는 압도적인 크기에 오금이 저린다. 한 번에 그 규모를 파악할 수 없는 자연의 위용은 실로 대단하다.
일상 속의 사물들에 익숙해져 있는 현대인들에게 거대한 자연이 내뿜는 힘은 낯설고 두렵지만 매혹적이다. 강한 태풍이 불던 날, 거세게 내리치는 빗줄기와 팽팽하게 불어대는 바람에도 불구하고 창문 앞을 떠나지 못했던 나는 아마 매혹당했던 것이리라.
자연이 지닌 웅장한 아름다움에 비해 일상 속의 장면들은 보잘것없어 보인다. 그런데 지극히 일상적인 현대 사회의 단면들을 압도적인 것으로 탈바꿈시킨 한 사람이 있다. 바로 독일 출신 사진작가 안드레아 구르스키(Andreas Gursky, 1955-)다. 그는 웅장한 자연처럼 거대한 형상을 담은 사진으로 확실하게 성공했다. 사진 한 장이 수십 억 원을 호가한다. 그림은 '단 한번'의 가치가 분명하다. 누군가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똑같이 복제해낸다 해도 미켈란젤로의 원작이 갖는 가치는 넘어설 수 없다. 그러나 사진은 그림과 다르다. 필름을 인화하는 방식으로 수 없이 복제가 가능하다. 그것도 완벽히 똑같은 형상으로. 구르스키의 사진이 그토록 비싼 값에 팔리는 이유가 궁금해진다.
구르스키는 높이 2미터, 폭이 5미터에 달하는 대형 인화 방식을 사용한다. 그림 속 장소가 별 볼일 없는 동네 마트일지라도 마치 위대한 자연인 양 우리 눈 앞에 펼쳐진다면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할 것이다. 거대한 사진 앞을 천천히 걸으며 그 장면 속으로 깊이 빠져들 때, 우리는 구르스키가 실제 마주했던 99센트 쇼핑몰(우리나라로 치자면 천냥 마트와 비슷할 것이다)을 함께 경험한다. 조잡한 색깔의 천 원짜리 과자봉지, 오렌지 주스, 포도 주스, 각종 통조림과 세제들이 종류별로 차곡차곡 쌓여있는 천냥 마트는 구르스키가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 전에 없던 웅장한 아름다움을 얻었다. 위에서 아래를 조감하는 카메라 앵글은 천냥 마트를 더욱 크고 넓어 보이게 만든다. 구르스키의 사진은 거대해짐으로써 아우라(Aura)를 획득한다.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 뒤셀도르프에서 자란 구르스키는 어릴 때부터 사진에 관심이 많았다. 성공한 상업 사진가였던 아버지, 초상 사진가였던 할아버지까지 자연스레 사진과 가까워질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스타일을 확고히 정립한 것은 1980년대 초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에서 베허 부부(Bernd & Hilla Becher)를 만난 뒤였다. 독일의 부부 사진가인 베허 부부는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의 교수로 독일 유형학 사진의 토대를 마련했다. 유형학 사진은 간단히 말해 비슷한 유형의 대상들을 모아놓은 사진을 일컫는다. 비슷하게 생긴 건축물들을 여러 장 찍어 나열한 베허 부부의 <급수탑>이 그 예다.
베허 부부의 미학을 수용한 '베허 학파'로 불리는 구르스키는 그들의 사진처럼 피사체에 거리를 둔 채 객관적 시각으로 대상을 포착한다. 그러나 베허 부부의 사진과 달리 구르스키가 포착한 대상들은 어딘지 비현실적이다. 분명 현실 속에 존재하는 피사체를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구나 한 번쯤 멀리서 찍은 거대한 풍경 사진을 확대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전체적인 광경은 선명하지만 사실 사진 속 세부적인 요소들은 흐릿해 보이는 경우가 많다. 가까이 있는 것은 선명하게 보이고 멀리 있는 것은 흐릿하게 보이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르스키의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이러한 이치가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가까운 대상이든 멀리 있는 대상이든 모두 다 정밀하고 선명하게 보이도록 인위적인 보정 작업을 거쳐 사진을 완성했다.
구르스키가 의도적으로 사진에 부여한 비정상적인 선명함은 일상적이고 소소한 오브제들에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음을 넌지시 알려주는 듯하다. 압도적인 아우라를 자랑하는 천냥 마트의 가장 구석진 자리에 있는 과자 이름을 명확히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독특한 체험임에 틀림없다.
인간은 자신의 인지 범위로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자연이 바로 그러한 대상이다. 온갖 과학적 지식을 동원해 자연을 우리 손안에 담으려 해도 여전히 그것은 미지의 세계에 속해 있다. 그러나 두려워하던 대상이 간단히 파악될 수 있는 상태에 있다면 우리는 안심한다. 마음껏 그것을 감상한다. 잠수함 안에서 바라보는 어둡고 광활한 바닷속, 아주 먼 곳에서 회오리치는 토네이도처럼. 구르스키의 사진 속 피사체 역시 아무리 크고 웅장할지라도 시작과 끝이 있고, 위와 아래가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가 카메라 렌즈로 담아낸 세계를 두려움 없이 즐길 수 있다. 구르스키의 사진 속에는 우리를 결코 위협하지 않는 거대함과 그 거대함이 뿜어내는 아우라가 공존한다.
절대적으로 큰 것을
우리는 숭고하다고 부른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이 말이 구르스키의 사진이 갖는 매력을 설명해준다. 사막을 횡단하던 이들이, 새벽 해가 떠오를 때 눈 앞에 펼쳐진 끝없는 금빛 모래를 보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눈물을 터뜨리는 이유. 무한한 우주의 검은 물결에 가슴이 뛰는 이유. 거대한 구르스키의 사진에 홀려버리는 이유. 매일을 살아가는 평범한 공간, 평범한 것들은 구르스키의 사진 속에서 숭고한 것으로 승화된다. 별 볼 일 없는 것은 어떤 것도 없다.
안드레아 구르스키의 <99 cent>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 (Museum of Contemporary Art, Los Angeles)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은 줄여서 MOCA라고도 불리는 곳으로 다운타운의 그랜드 애비뉴(Grand Avenue)에 위치한 본관을 비롯해 리틀 도쿄와 웨스트 할리우스에 있는 분관까지 총 3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MOCA는 안드레아 구르스키를 비롯해 윌렘 드 쿠닝, 알베르토 자코메티, 앤디 워홀, 잭슨 폴록 등
세계 현대 미술을 이끌어 온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약 1만 여점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말 엄청난 규모네요.
천냥 마트를 무심히 찍은 구르스키의 <99 cent>는
쟁쟁한 거장들의 작품 속에서도 단연 돋보일 것 같아요.
그 거대한 스케일에 압도당하는 기분, 과연 어떨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