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튼 리비에르 <망자를 위한 기도>
펫로스(pet loss) 증후군을 아시는지.
십여 년을 함께 보낸 반려동물이 세상을 떠난 후 슬픔과 공허함, 우울함 이 극에 달하는 마음의 병이다. 대부분 동물의 수명은 인간보다 짧고 반려동물로 가장 많이 키우는 강아지, 고양이의 수명은 길어도 15년을 넘기 힘들다. 개의 한 살이 인간의 7살이라는 말도 있듯, 우리 곁의 반려동물들은 생각보다 빨리 늙어가고 빨리 우리를 떠나간다. 한없는 기쁨과 행복을 주던 연약한 털 뭉치들은 그렇게 기쁨과 행복을 한껏 주고 훨훨 날아가버린다. 따각따각 발자국 소리, 얼굴을 핥아주던 따뜻한 혀의 감촉, 순하디 순한 눈동자, 촉촉하고 차가운 코. 그들이 떠난 빈자리는 무엇으로도 메꾸기 힘들다.
반려동물이 단지 귀엽고 예쁘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인간의 마음속에 알지 못할 따스함을 준다. 내가 아무리 못나고, 보잘것없어도 한결같이 나에게 맑은 눈빛을 보내주기 때문일까. 슬픔에 겨워 눈물 흘릴 때면 그저 곁에 앉아 눈물을 핥아주는 위안. 나의 기쁨, 고통, 불안을 고스란히 바라보고 공감해주는 친구. 이 모든 것을 떠올릴 때면 반려동물이야말로 순수하게 사랑할 줄 아는 존재가 아닌가 싶다. 상대가 아무리 나를 미워하고 혼내도 똑같이 미워하지 않는다. 그들의 진실된 마음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우리보다 수명이 짧은 반려동물이지만 간혹 그들이 사람보다 뒤에 남겨지기도 한다. 주인이 돌아오지 않아 이미 폐허가 된 집을 떠나지 못하거나, 주인의 무덤가를 맴도는 동물들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하염없는 기다림 속에서도 그들은 사랑했던 주인을 잊지 못한다. 영국 화가 브리튼 리비에르(Briton Riviere, 1840-1920)의 <망자를 위한 기도(Requiescat)>에는 앞으로 저 커다란 덩치의 개가 겪을 슬픔이 깊은 잔영을 드리운다. 개는 충성스러웠을 것이다. 주인과 사냥을 끝내고 돌아오면 저녁 놀을 바라보며 함께 꾸벅꾸벅 졸기도 했을 것이다. 영특한 저 개는 주인이 그저 잠든 것이 아님을 알고 있을까. "어서 일어나세요, 저는 당신이 일어날 때까지 이 자리를 떠나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하는 듯한 갈색 눈동자. 하지만 개는 무언가를 직감했다. 알 수 없는 긴장과 불안 때문에 뒤로 젖힌 귀가 그것을 말해준다.
리비에르는 옥스퍼드 대학의 미술 교수였던 아버지 윌리엄 리비에르(William Rivière, 1806–1876)에게 그림을 배웠다. 그 역시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해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23세부터 영국 로얄 아카데미 전시회에 그림을 전시했다. 이 당시 리비에르는 아카데미 화풍의 그림, 즉 왕실 취향의 우아한 그림들을 주로 그렸다. 영국 최고 작가로 칭송받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주제로 한 그림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진정 그리고 싶은 대상이 '동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리비에르는 동물 중에서도 특히 개를 사랑했다.
나는 항상 개를 좋아했다.
하지만 개들과 너무 오래, 많이 작업하다 보니 지친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개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개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면 결코 나는 그림을 완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어떻게 동물들을 그리는가(How I paint animals)'라는 내용으로 1897년 영국의 <첨스 보이스 애뉴얼(Chums Boys Annual)>이라는 잡지와 진행했던 인터뷰의 한 대목이다. 개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리비에르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할 것이다. 너무 사랑하지만, 한편으로 나를 힘들게도 하는 존재, 그러나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존재. 오히려 더더욱 사랑하게 되는 존재. 리비에르의 그림에도 이런 감정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동물만을 그리는 전문 화가들도 많이 있지만 리비에르는 그들과 달리 동물을 하나의 장식품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리비에르 그림 속 동물, 특히 강아지들은 매우 다채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기쁨, 슬픔, 외로움 등의 감정이 오롯이 얼굴과 몸짓에 드러나있다. 그의 그림에는 오랫동안 개와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만이 잡아낼 수 있는 미세한 부분들이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동물 중에서도 개는 유독 사람과 친밀한 감정을 공유한다. 두 눈을 바라보며 함께 누워있을 때면 아무 말하지 않아도 말이 통하는 기분이 든다. 사람이 무엇 때문에 슬퍼하는지는 알지 못해도, 슬퍼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보다 빨리 눈치 챈다. 따뜻한 몸을 동그랗게 말아 슬퍼하는 이의 옆구리에 밀착하고는 은근하게 신호를 보낸다. "내가 함께 있어요." 하지만 가슴 아픈 일은 그런 개들에게 어떠한 전언도 남길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먼저 가 있을 테니, 나중에 따라오렴." "조금 있다 보러 올 테니, 기다리고 있으렴." 이런 말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개들은 그저 눈 앞에 자신이 사랑하는 이가 없다는 것, 그리고 그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만 기억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은 언제까지고 기다린다. 사람이 자기를 버린 것인지,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떠난 것인지도 알지 못한 채.
<망자를 위한 기도>에서 주인의 시신 곁에 몸을 찰싹 붙이고 앉아 있는 개에게도 주인이 어떤 말을 남겼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나는 전쟁터에 나간단다.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 내가 없더라도 씩씩해야 한다." 그러나 개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야만 하는 저 갑옷 입은 기사의 마음 또한 무너질 테다.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는 말만은 꼭 남기고 싶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저 개가 오래 슬퍼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진실한 마음, 변함없는 그들에겐 모든 사랑을 다 쏟아부어도 모자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