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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 Jung Nov 02. 2019

블랙홀에서의 하루 - 쿠바 - 하바나(HAVANA)

친구야!


간밤에 서울은 비가 너무 많이 내렸나 봐 아침에 뉴스가 온통 비 피해 소식인걸 보니.


출근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피해 상황들이 추가되는데 서울이 온통 난리가 났더라고. 많은 길들이 물에 잠기고, 차들도 잠기고, 산사태도 나고.


인터넷에 속속 올라오는 물에 잠긴 도로의 사진들을 봤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통과하지 못하고 되돌아 갔겠지? 분명 한 마디씩 불평을 하기도 했을 거야 아마.


'오늘 지각이군.'

'배수 공사를 어떻게 한 거야?'

'그냥 통과하면 어떻게 될까?'

'내일도 설마 못 지나가는 건 아니겠지?'


사진을 보며 길을 되돌아 갔을 사람들에 대한 공상을 하다 보니 문득 떠오른 영화가 있었어.





'사랑의 블랙홀' 이란 영화야.


세상에서 시크한 남자의 역할이 가장 잘 어울리는 ‘빌 머레이’가 나오는 영화지.


원래 제목은 'Groundhog day'인데 우리나라에서 개봉할 때 '사랑의 블랙홀'이라고 붙였더라고. 원제목을 각색해서 붙인 것 중에는 몇 안되게 잘 지은 제목 같아.


왜 이 영화가 떠올랐는지 알아?


이 영화도 주인공이 눈 때문에 길을 지나지 못하고 되돌아가게 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거든. 그런데 재밌는 건 주인공이 그 길을 통과하지 못하면서 그날도 통과하지 못한다는 거야.


그러니까 이 사람은 매일 같은 날이 반복되는 거지.


상상해봐!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다시 어제가 되는 거야. 오늘 자고 일어나도 다시 7월 27일인 거고 내일 자고 일어나도 7월 27 일인 거지.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반복되는 날이 아닌 거야, 그냥 많은 날들 중에 하나인 거지.


나만 매일매일의 7월 27일을 기억하는 거지. 어제인 7월 27일과, 그제인 7월 27일과, 긋그제인 7월 27일을.


한 달 전의 7월 27일과 두 달 전의 7월 27일과 세 달 전의 7월 27일을 말이야.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내 공상은 꼬리를 하나 더 물고 늘어지더라고. 알자나 내 공상은 항상 이런 식인 걸 말이야.


그 새로운 공상은 말이지 나한테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언제가 매일 반복되었으면 좋을까 하는 거였어.


그걸 떠올리는데 별로 오래 걸리지 않더라고.


어느 때인지 상상할 수 있겠어?







그건 바로 쿠바에 갔을 때야.


아침에 눈을 뜨면 쿠바노 주인 할머니가 주시는 우유를 듬뿍 넣은 커피에 열대 과일을 먹고, 낡은 베란다의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척하며 깜박 졸기도 하지. 그리고 점심때쯤 되면 집을 나서지.


그렇게 올드 하바나의 낡은 건물들 사이를 무작정 걷다가 배가 고파지면 길거리에서 몇 백 원짜리 어설픈 주스에 어설픈 샌드위치를 줄을 서서 사 먹고 배가 든든해지면 다시 걷는 거야.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나는 말레콘에 있게 될 거고, 방파제 위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파도 구경, 사람 구경을 하다 보면 어느새 석양이 지고 바다 위로 해가 지는 모습을 보게 되지.


그러면 쿠바는 옷을 갈아입고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는 거야.


밤의 쿠바가.


거리의 모든 바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음악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든 춤판이 벌어지는 거야.


그럼 나는 하바나의 오비스포 거리를 어슬렁 거리며 마치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처럼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다가 물(?) 좋은 집으로 들어가는 거야. 그리고 그곳의 외로운 누님들의 살사 파트너가 되어 주는 거지.


사실 고백하는데 나는 이미 물 좋은 곳을 알고 있어. 왜냐면 나는 오늘이 매일 반복되는 사람이자나.


근데 살사를 출 줄 아냐고?


당연하지. 나는 이미 베테랑 댄서거든. 매일매일 반복되는 날인데 내가 뭘 못 배우겠어?


그니까 나는 이곳에서 지내는 그 수많은 7월 27일 동안 계속 춤을 배워온 거야. 그래서 오늘 7월 27일은 이미 나는 춤의 고수가 된 거거든.


영화에서도 빌 머레이가 그러잖아.


어느(같은) 날 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모차르트 소나타를 듣더니 '나도 피아노나 한번 배워볼까?' 하고.


그러더니 처음엔 '도레미'부터 시작해서 결국은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까지 마스터 하자나.


그 선생님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해.


이제 어느 정도 고수가 된 빌이 레슨 받으러 처음 온날 라흐마니노프를 치니까 ‘정말 처음 레슨 받는 거 맞냐고?’ 하는 표정이.


당연하지 선생님에게는 오늘이 처음이니까. 빌에게야 반복이지만.


그런데 한참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제가 하나 있더라고. 어떻게 그날을 벗어나느냐 하는.


영화에서는 어떻게 됐냐고?


글쎄. 정말 영화처럼 벗어나야 한다면.


나는 어쩌면 영원히 7월 27일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도 몰라.


니가 옆에 없다면 말이지.





모히토 주문하는 손님이 많아서 이렇게 미리 준비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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