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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 Jung Nov 29. 2019

얼렁뚱땅 산티아고 순례길 01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곳에 간거야?

언제나 그렇듯 내 인생의 색다르고 커다란 이벤트는 즉흥성이 가미되어야만 이루어진다. 그 즉흥의 시간을 넘기게 되면 고민하고 준비만 하다가 다른 이벤트에 밀리게 된다. 작정하고 찾을 때는 안 보이던 괜찮은 항공권이 별 기대 없이 이곳저곳 목적지를 넣어보던 항공권 사이트에서 눈에 띄었다. 작정하고 배재했던 오랜만의 유럽행이다. 유럽은 여행 목적지에서 항상 최후의 보루였다.


조금이라도 기운(?)이 더 있을 때 힘든 곳을 많이 다니자는 여행 철학(?)이라기보다는 본능에 충실한 여행의 결과였다. 이제 그 기운이라는 것도 빠져가는 게 느껴지고 인생의 다음 일정이 정해지지 않은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유럽에 갈 수 있는 자격 정도는 갖추었다고 생각했다. 막상 장기간 유럽을 가려고 하니 동선이 고민되었다. 


다른 나라, 다른 대륙은 시시 때때로 지도를 보며 상상의 여행을 수도 없이 다녔지만 유럽은 아니었다. 마침 2년 전에 사놓은 배낭이 떠올랐다. 그리고 숱하게 떠났던 방식은 배낭여행이지만 트렁크를 든 여행들이 떠올랐다. 거금을 들여 사놓은 멋진 배낭을 한 번도 안 쓰고 중고 나라에서 헐값에 넘길 수는 없었다. 이제 진짜 배낭을 멜 때가 된 것 같았다. 이왕 배낭을 멜 바에는 제대로 메 보자는 욕심이 생겼다.



나의 산티아고 순례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대만을 경유하는 비행기는 아침 7시 인천을 떠나 짧은 비행 후 타이베이에 도착한다. 파리로 가는 다음 비행은 자정 무렵에 출발한다. 타이베이에서 하루라는 시간이 온전히 남았다. 이제 와서 벼락치기 연습이라도 하듯 시내와 근교를 종일 걸었다. 다시 밤 새 비행을 해서 파리에 다음날 아침에 도착했다. 순례길을 시작하는 마을까지 가려면 중간에 다시 한 도시를 거쳐가야 했다.


그곳으로 가는 버스는 저녁 8시에 출발한다. 기차는 더 이른 시간에 있지만 하필 파업이란다. 벼락치기 이틀 차 연습지는 파리다. 결국 버스를 탈 때쯤에는 몸이 내 몸 같지 않았다. 몽롱한 가운데 전광판에 내가 탈 버스의 정보가 나타났다. 내가 내리는 곳이 종점이 아니었다. 버스는 내가 내릴 도시를 지나 내가 걸어갈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를 거쳐 순례길 이후 내가 여행하려고 하는 나라의 도시까지 가는 버스였다. 순간 환각 같은 유혹이 스쳤다. '자는 척 그냥 잠들면 되는 거야 종점에 갈 때까지...'


버스는 밤새 달려 새벽에 다음 도시에 도착했다. 나는 내렸고 악마는 다른 먹잇감을 찾아 떠났다. 이제 고지가 눈 앞이다. 이곳에서 한 시간만 가면 된다. 여기도 기차는 파업이다. 물어물어 버스표를 사고 드디어 산티아고 순례길 중 프랑스길이라 칭하는 길의 시작지인 생 장 피드 포르에 도착했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순례길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프랑스길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 걷는 길이다.)


원래 순례길의 시작은 이렇다. 생 장 피드 포르에 도착해서 순례자 사무실로 가서 길을 걷는 징표인 순례자 여권을 받고 숙소를 정한다. 순례길의 정보도 얻고 미흡했던 준비물들을 보완하며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일찍 길을 출발한다. 앞으로 매일매일이 힘듦의 연속이지만 특히 첫날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들어가는 험한 길인데다 처음에는 몸이 적응을 하지 못 해 더 힘들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시작하고 나도 당연히 그렇게 하려고 생각하고 이곳에 왔다. 그러나 언제나 팔랑귀가 문제였다. 배낭을 메는 건 고사하고 캐리어를 끌기도 버거워 보이는 버스에서 만난 일본인 '나호' 아줌마가 바로 출발한다고 하는 말에 흔들렸다.


'아줌마가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다.'


이미 마음이 가는 쪽으로 기울어진 채 여권을 사러 순례자 사무실로 갔다. 거기서 아줌마의 비밀이 밝혀졌다. 당연히 피레네 산맥을 넘는 줄 알았는데 여기서 2~3시간만 가면 있는 유일한 작은 산장에서 하루를 잔다는 것이었다. 어쩐지 아줌마가 너무 자신 있어 보인다 했다. 자원봉사자 할아버지가 내게 오늘 어디서 잘 거냐고 물었다. 나는 나호 아줌마를 따라 그곳으로 갈 거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곳은 예약하지 않으면 잘 수 없다고 했다. 나호 아줌마를 바라보니 미리 예약을 했다고 했다.


그때 한 발 물러서야 했는데 혹시나 하고 오늘 피레네 산맥을 넘을 수 있냐고 물었다. 당연히 할아버지가 말릴 줄 알았다. 말린다면 마지못한 척하며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 빨리 가면 해지기 전에 넘을 수 있다고 했다. 그때가 오전 10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는데, 심지어 할아버지가 내어 준 한글로 된 안내서에도 버젓이 무조건 8시 전에 출발하라고 되어 있었다.


이럴 땐 꼭 생각의 방향은 한쪽으로만 움직인다. 이미 오늘 떠나는 데에만 집중되고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이 길을 걷지 못할 것 같았다. 마음이 급해졌다. 더 이상 고민하는 것보다 빨리 출발하는 게 최선이라 생각되었다. 선크림이 어디에 들어 있는지, 수건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어색한 새 배낭을 꽉 당겨 메고 이틀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은 몸뚱이를 끌고 대장정에 올랐다. 그나마 배낭의 허리끈에 챙겨 놓은 미니 초코바가 있음에 위안을 삼고 마을의 마지막 슈퍼에서 작은 물을 한 통 샀다.










배낭의 무게는 처음에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1시간이 넘어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느껴지기 시작한다. 2시간 후부터는 정말 돌덩이를 지고 있는 느낌이 든다. 그건 신기하게 배낭의 무게와 비례하지는 않는다. 그냥 뭐든지 뒤에 메고만 있으면 다 돌덩이처럼 느껴지게 된다. 아마 솜뭉치여도 그럴 거라 생각된다.


마을을 벗어나면서 시작되는 가파른 오르막과 뜨거운 태양, 반팔 옷에 아무 보호 장비도 못한 피부는 익어가기 시작한다. 그때 작은 산장이 나타났다. 나호 아줌마가 말한 곳이었다. 이제 이곳을 지나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것도 없다. (그것도 목적지에 도착하고서야 알았다.)


이틀 동안 제대로 된 식사도 못해 음식이 당겼지만 그럴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콜라를 연거푸 두 병을 마시고 바로 일어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을 한 통 더 샀다. 아마 이 물을 안 샀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상상도 하기 싫다. 아무튼 신의 한 수였다.


다들 왜 피레네, 피레네 하는지 걸으며 깨달아 갔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불행 중 다행이지는 몰라도 페이스를 조절하는 방법도, 지도를 보는 방법도, 휴식을 취하는 방법도 잘 모르는 백지상태에서 언젠간 도착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냥 화살표만 보며 걸었기에 오히려 덜 힘들게 느껴지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군데군데 눈의 흔적이 남아 있는 피레네를 끝도 없이 오르며 처음에는 주위에 아무도 없었는데 사람들이 눈 앞에 한 명씩 나타날 때마다 이제 내가 마지막이 아니구나 하는 위안을 얻었다.



결국 두병의 물을 아껴 먹으며 배낭 앞주머니의 작은 초코바를 다 비우고 나서 첫날의 숙소가 있는 수도원에 도착했다. 만신창이가 된 몸과 배낭을 끌고 들어간 숙소는 그나마 붙들고 있던 멘털을 한방에 날려 버렸다. 이렇게 큰 공동 숙소가 있다니. 266번 침대를 배정받고 짐을 풀었는데 샤워할 엄두가 안 났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있던 곳은 침대 사이에 칸막이라도 있는 곳인데 더 늦게 오면 지하의 어마어마한 수용시설(?)에서 잔다고 한다.)


엄두가 안나는 샤워를 간신히 마치고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하니 대책을 세울 필요성을 느꼈다. 첫날은 피레네 산맥을 넘느라 다들 여기서 자지만 내일부터는 그날그날의 목적지와 숙소를 선택해야 했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표준 코스가 있지만 그곳은 이곳처럼 사람들이 넘쳐나기 때문에 마을의 크기와 숙소의 숫자 크기에 맞게 목적지를 정하고 출발 시간을 정할 필요를 느꼈다.


오늘 나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인 시원한 콜라를 원샷하고 266번 침대에 누웠다. 만약 꿈에서라도 나를 만나게 되면 '준비를 제대로 하고 오던지, 파리에서 버스표를 찢고 다른 데로 가라고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말려야지' 하는 다짐을 하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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