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하지 않은 자 고생할 지어다.
둘째날.
전날 9시 조금 넘어 침대에 누워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핸드폰을 보니 5시 50분이다. 다행히 아직 그동안의 규칙적인 기상 습관이 남아 있었다. 정말 죽은 듯이 잔 것 같았다. 3일 만의 제대로 된 잠이었다. 누워서 어둠에 익숙해지길 기다리며 머릿속으로 배낭을 챙기는 걸 시뮬레이션했다.
사실 자신이 없었다.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급속도로 조급 해지는 성격으로 물건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꼼꼼하게 집어넣는 것에 자신이 없어 그동안 배낭을 메지 않았었다. 결정적으로 침낭을 차분히 말아서 침낭 주머니에 쏙 들어가게 넣을 자신이 없었다. 인터넷에서 공부한 내용과 나름 등산 전문가에게 속성으로 배운 바에 의하면 '가장 가벼운 것을 배낭 밑에 넣어라'의 법칙 때문에 침낭을 잘 말아서 가장 밑에 넣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2층 침대의 짐들을 정리하고 사물함에서 배낭을 꺼내 창가로 갔다. 일단 침낭이 맨 밑에 들어가야 하니 배낭의 짐들을 다 꺼냈다. 바닥에 침낭을 쭉 펴고 집에서 연습한 대로 공기를 최대한 빼 가며 말았다. 역시나 마음이 급하니 말면 말 수록 침낭은 눈 사람처럼 커졌다. 분명 어제 꺼낼 때는 딱 맞았던 침낭 주머니가 너무 작아 보였다.
침낭을 말았다 폈다만 했는데 10분이 지났다. 결단을 내려야 할 것 같았다. 일단 그냥 이불을 개듯 접었다. 그리고 배낭 밑에 깔았다. 출발할 때 장기간 걷기에는 배낭이 너무 큰 거 아닌가 생각이 들었지만, 한 번도 안 쓴 배낭을 놔두고 또 살 수는 없어서 그냥 가져온 게 다행이었다. 침낭 위로 나머지 짐들을 배운 대로 차곡차곡 균형에 맞게 쌓았다. 꺼내 놓은 것들이 내 짐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낯설었지만 길을 떠나고 처음으로 모든 짐들을 꺼냈다가 다시 넣어서 배낭을 다시 꾸린 걸로 오늘은 만족이다. (이후로 이틀 정도 아침마다 침낭 접는 것을 시도하다가 포기했다. 순례길 끝날 때까지 침낭은 커버에 들어가지 못했다. ㅠㅠ)
짐 싸다가 30분이 지났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둠이지만 출발하기로 했다. 남들은 둘째 날이지만 나에게는 첫날이 마음의 준비도 없이 너무 정신없이 지났기 때문에 실질적인 첫날이기 때문이다. 내 걸음의 속도도 파악하고 순례길의 분위기도 파악하기 위해서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신발 보관소에서 내 것 맞나 싶은 아직은 어색한 신발을 찾아 신고 스틱을 챙기고 손전등을 들었다. (순례길의 숙소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신발을 벗는 일이고, 청결을 위해 따로 보관 장소에 놓고 편한 신발로 갈아 신어야 한다.)
매일 얼마나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어디에 어떤 마을이 있는지 등에 대한 공부를 하나도 하지 못해 오로지 믿고 있는 핸드폰 앱만 믿고 출발했다. 일단 길에 표시되어 있는 화살표를 믿어보기로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이드북이나 앱, 인터넷 등으로 통해 정보를 얻어 휴식과 식사 등을 결정한다. 마을에 숙소가 몇 개 있는지 또한 가격이 얼마고 침대가 몇 개 인지, 요리가 가능한지 등을 확인하고 숙박을 결정한다. (무선 인터넷 가능 여부도 중요하다.)
나름 순례길에는 표준 가이드가 존재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걸으며 나온 데이터를 바탕으로 만든 듯 보이는 26일, 32일, 40 일등이다. 그 가이드를 기준으로 자신의 체력과 속도에 맞게 비슷하게 적용해서 걸으면 도움이 된다. 그 기준은 나름 숙소에 가장 기준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너무 작은 마을에 많은 사람이 몰릴 경우 숙소가 모자라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마을로 더 이동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런 것들에 대한 아무 정보도 없이 일단 가장 표준 코스인 32일 코스로 지정되어 있는 가이드를 따라 둘째 날 숙박 도시인 Zubiri로 이동했다. 가면서 나름 맘에 드는 숙소를 속으로 찜해 놓았다. 거리는 21.34km. 평균적으로 한 시간에 4km를 계산하면 5시간 조금 넘으면 도착한다.
1시간이 지나자 역시 배낭의 무게가 짓눌러 온다. 아무 준비 없이 반팔, 반바지를 입고 걸은 첫날의 후유증이 피부를 통해 그대로 전해 온다. 5시간을 짜내듯 걷고 배낭이 돌덩이로 바뀔 때쯤 드디어 Zubiri에 도착했다.
숙소는 13시에 연다고 되어 있었는데 도착시간은 12시였다. 좀 일찍 가도 들여보내 주겠지 하는 마음은 나만의 생각이었다.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인기척도 없다. 다른 숙소도 마찬가지로 아직 문을 연 곳이 없다. 너무 일찍 출발하고 빨리 온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마을 중앙의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순례자 대부분은 여기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어도 시간은 아직 멀었다. 나처럼 일찍 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서 숙박을 하려는 듯 느긋했다. 하지만 나는 불안했다. 내가 묵으려는 숙소가 시간이 안돼서 안 여는 것인지, 문을 닫은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곳의 숙소들이 정확한 시간에 오픈을 한다는 걸 미리 공부를 했더라면 덜 불안했겠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걷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이곳에 온 나는 모든 것이 불안했다.
사람들이 많이 가는 숙소로 가는 건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앱을 보니 다음 괜찮아 보이는 마을까지는 6km. 일단 더 가보기로 했다. 무거운 배낭을 간신히 등에 매고 큰길을 따라 출발했다. 화살표가 안 보였지만 다행히 나와 같은 생각인 듯한 키가 훤칠한 유럽인 친구가 앞에 걷는 게 보인다.
일단 가다 보면 보이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누군가와 얘기하더니 다시 돌아온다. 이 길이 아니란다. 그렇게 파파 스머프 같은 수염을 멋지게 기른 크리스티앙과 첫 만남을 가졌다. 마을로 들어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서 화살표를 찾았다.
Larrasoana라는 마을에 도착해 찜해 놓은 침대가 몇 개 없는 작은 숙소를 찾았다. 주인아저씨가 문을 열더니 들어오라고 하지 않고 무어라 말을 한참 한다. 몇 번을 얘기해도 내가 못 알아듣자 일단 들어오란다. 그곳은 4인용 방 하나와 2인용 방 하나만 있는 아주 작은 곳이었다. 이곳은 다른 곳보다 조금 비싼 곳이었는데 처음에 내게 숙박비가 비싸다는 말을 한 것이었다.
그래도 사람이 별로 없는 곳이기에 이곳에서 묵기로 했다. 나중에 독일에서 오신 형님들 두 분이 2인용 방을 차지하고 결국 나는 그 방을 혼자 썼다. 샤워와 빨래를 하고 쉬고 있는데 주인아저씨가 나를 불렀다. 구글 번역기를 켜시더니 스페인어를 영어로 바꿔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나는 저녁에 Pamplona에 갈 것이다. (팜플로나는 순례길에서 처음 만나는 큰 도시이다.) 거기서 자고 오니까 내일 아침은 알아서 챙겨 먹어라.' 하며 음식 챙겨 먹는 법과 열쇠 반납하는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생각해보니 아저씨는 대도시에서 살면서 이곳에 숙박시설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집을 떠난 지 4일 만에 정말 차분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거실 겸 부엌에서 인터넷을 하며 휴식을 취하다가 밖으로 마을 구경을 나왔다. 마을이라고 해봐야 걸어서 5분이면 끝까지 갈 수 있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제대로 된 식당 같은 곳은 한 군데. 그곳에는 나와 같이 길을 헤맸던 크리스티앙이 다른 젊은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저녁 식사를 예약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순례길에 있는 마을 식당에는 대부분 순례자 메뉴라는 것을 팔았다. 일종의 그날의 메뉴다. 10~12유로 정도에 스타터, 메인, 디저트에 와인을 주는 메뉴다. 메뉴 고민할 필요 없어서 요리해 먹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주 유용하다. 특히 와인 좋아하는 사람은 더욱.)
순례길 첫날은 제정신이 아니어서 생각 못 했는데 한숨 돌리고 보니 스페인의 해는 참 길었다. 해가 기니 고민도 길었다. 내일은 얼마를 걷고 어디에서 자야 할까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