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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 Jung Dec 03. 2019

얼렁뚱땅 산티아고 순례길 04

길 위에도 낙이 있다. 오아시스 같은 대도시.

다섯째날.





피레네를 넘을 때 생겼던 의문이 있었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어제 마지막에 보았던 상황과 연관이 되며 다시 떠올랐다. 내 생각이 맞다면 일정을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왠지 마음이 조급해졌다. 첫날  정신이 아닌 상태로 한참 피레네 산맥을 넘고 있을 때 본 것은 바닥에 누군가가 붙여 놓은 듯한 깨끗하지 못한 종이 한 장이었다. 뜻밖의 한글이었다. 


'ㅇㅇ투어'


순간 내가 잘못 보았을 거라 생각했다설마 여기까지 투어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그런데 어제 마지막 힘을 다해 마을로 들어설 앞에 서로 일행처럼 보이는 여러 명이 걷고 있었다그리고 그들 중 한 명이 스피커로 음악을 크게 틀고 있었다내가 환청을 들었나 생각했다한국 노래였다조금 속도를 내어 다가가니 여러 명의 무리였다.


그전까지 한 번도 마주치거나 엇갈리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처음 볼까 잠시 고민해 보았다매일 일반적인 루트보다 조금씩  걸었고 거기에 처음으로 30km  넘게 걷다 보니 드디어 하루 전에 출발한 대부분의 사람들과 겹쳐진 것 같았다나는 처음 최고 기록을 경신하고 더 이상 기운이 없어 멈추었지만 그들은 계속 걸어 4km 이후의 다음 마을로 가는 것 같았다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정말 우리나라 투어가 있었다.


그들이 투어가 맞다면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른 건 숙소 걱정이었다그들과 같은 속도로 걷는다면  도시야 괜찮지만작은 마을은 아무래도 숙소가 여의치 않을 것 같은 걱정부터 들었다그래서 마음이 급해졌다한 시간을 걷자 많은 사람들이 묵었을  마을이 나타났다그리고 거기서부터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다그전까지 이렇게 많은 사람을 보지 못했는데 다들 어디서 나왔는지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정말 조금 과장해서 줄지어 순례길을 걷고 있었다.


 많은 사람 중에 한국인들도 무척 많았다 예상은 맞는 것 같았다아마도 내가 출발하기 전날이 걷기에 길일(?)이었나 보다사람이 많으니 이상하게  힘들게 느껴졌다나를 추월하거나 내가 추월할 때 서로 건네는 '올라 '부엔 까미노'라고 하는 인사마저도 에너지를 빼앗는  같았다거기에 지금까지 걸은  마을 간 거리가 가장  12km짜리 코스까지 있다 보니 발바닥에서는 불이 나고 어깨의 배낭은 돌덩이 같았다.


이를 악물고  걸었다하루 만에 다수의 무리들과 떨어지긴 힘들어도 조금씩  가야 마음이 편할  같았다다시 기록을 경신했다. 32.94km. 만약에 숙소가 없어서  가야 했다면 아마 순례길을 포기했을지도 모를 만큼 힘들었다.


Torres del Rio라는 경사가 아주 심한 작은 언덕 같은 마을에 숙소는 두 개뿐이었다. 이미 순례객들 도착 시간보다 늦은 시간이었고 도미토리의 좋은 자리(이층 침대의 아래층) 없었다. 2 침대로 올라갈 기운도 없을뿐더러 군대 시절부터 나타난 말 못 할 행군 고질병(?) 최고조에 달했다조금 허름한 숙소는 싱글룸이 없었고지은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깨끗한 숙소에 개인 욕실이 있다는 말에 저녁 식사비를 포함해 거금(?) 투자했다.



각자의 방법으로 순례길을 걷는다. 배낭을 메지 않고 수례처럼 만들어 허리에 걸고 끄는 방식. 획기적이다.







높은 산이나 언덕만 나오면 겁이 난다. 혹시 저걸 넘어야 하는 건가??




이 조그만 마을에 수영장까지 있는 깔끔한 숙소




여섯째날.





처음으로 7시 넘어 일어났다. 컨디션이 갈수록 나빠진다. 이틀 연속 30km를 넘게 걷다 보니 발가락의 물집과 고질병(?)도 최고조에 달했다. 오늘은 마을 간의 거리도 너무 멀다. 마을 간의 거리가 4km를 넘어가면 그다음부터는 힘듦의 크기가 배수가 된다. 늦게 출발했더니 이미 길 위에는 순례객들이 다시 줄지어 있다.


마을이 많이 없으니 다들 계속 걷기 때문에 더더욱 많아 보인다. 평소에는 두 시간까지는 배낭의 무게를 잘 못 느끼는데 처음부터 배낭이 무겁게 느껴지고 신발에는 모래가 한가득 든 것 같다. 아무래도 오래 걷기 힘들 것 같았다. 10km를 걷고 마을에서 오렌지 주스와 콜라를 마시며 루트를 확인했다. 다시 10km 이후에 마을이 있고, 그다음은 12km이다. 도저히 30km 넘게 걸을 수 없을 것 같아 다음 마을에서 묵기로 했다. 제법 큰 도시 같았다. 작은 숙소 하나를 마음속으로 찜했다.

10km만 더 가면 된다고 생각하니 힘이 조금 났다. 마지막 언덕을 넘어 마을로 접어드는데 입구가 꽤 길다. 마을이 아니었다. Logrono라는 도시였다. (Pamplona 다음으로 순례길에서 두 번째 만나는 큰 도시였다.) 도시 입구에는 족욕이 가능한 커다란 탕이 있었고 많은 순례객들이 거기서 족욕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마음이 급해 그냥 지나쳤다. (나중에 깨달은 사실 중 하나는 족욕 기회가 있으면 무조건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발의 피로를 푸는 데는 정말 최고다.)


내가 찜 한 숙소는 성당이 있는 도시 중앙과 조금 떨어진 곳이었는데 침대가 몇 개 없는 소규모여서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미 자리가 없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차선책인 성당 주변의 큰 숙소를 찾아갔다. 저렴한 가격에 싱글룸이 있다는 정보를 보고 찾아갔지만 이미 예약이 다 끝났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도미토리를 선택했다. (이전까지는 당연히 무조건 선착순인 줄 알았는데 많은 숙소가, 특히 사람들이 선호하는 숙소는 예약이 가능하면 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샤워와 빨래를 마치고 나서도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성당 근처 광장의 벤치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광합성을 했다. 조금 더 가볼까 하고 걷는데 중국인 마트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국 라면을 발견하고 심봤다를 외쳤다.


성당을 벗어나 큰길로 나서자 엄청난 대로가 있고 꽤 길게 펼쳐져 있었다.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는 도시는 Leon 하나여서 거기까지 가서 usim을 사려고 했는데 물어물어 이곳에서 usim을 장착했다. 그리고 그 근처에서 내 눈을 번쩍 띄게 하는 패스트푸드점을 발견했다.


'버거킹'.


순례길을 시작하면서 이제 문명과는 당연히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너무 공부를 안 한 것이었다. 이런 줄 알았으면 지난번 도시인 Pamplona에서도 묵는 건데 라는 후회를 하며 버거킹에 들어가 주문을 했다. 햄버거 세트를 주문하며 콜라를 라지로 시켰다. '라지'인지 다시 묻는다. '라지'라고 또박또박 발음했다.


계산을 끝내자 아르바이트생이 커다란 빈 컵 하나를 준다. 음료가 셀프서비스였던 것이다. 그 말은 계속 리필해 먹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 말은 굳이 '라지'를 안 시켜도 된다는 뜻이다. 당했다. 하지만 비상식량 라면을 챙기고, 어디서나 사용 가능한 인터넷으로 무장하고, 얼음 가득한 시원한 콜라와 햄버거로 배까지 채우고 나자 내일부터 다시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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