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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 Jung Jul 27. 2017

전자제품 죽이기와 기사단장 죽이기..

총체적 난국이라고나 할까..

난생처음 캠핑이란 걸 해보기로 결심했다. 물론 대문 밖은 위험해, 특히 주말에는 한 단계 더 위험해 주의자인 내가 남들처럼 캠핑장비를 바리바리 싸 들고 텐트를 치고 음식을 해 먹고 하는 캠핑을 해보기로 한건 아니었다. (사람 붐비는 곳을 잠깐 가기 위해 대문 밖을 나서는 것은 위험해 주의자이지만 장기간 멀리 떠나는 건 또 위험해도 해보자 주의자이다. 채식주의자로 치자면 완전 채식인 비건은 아니고 그 위 단계 정도랄까?)
아무튼 가끔씩 들여다보는 자동차 인테리어 블로그에서 내 차종에 맞춤형으로 제작한 텐트를 보고 나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캠핑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장차 시행될(?) 국토 종주 여행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리고 번거로운 캠핑이 아니고 간편하게 차 트렁크를 열고 혼자서도 설치하고 차 안에서 잘 수 있다는 홍보에 한참을 고민 끝에 텐트를 구매했다. 그리고 떠났다.

단순히 '날이 따듯하니 밖에서 자기 좋겠구나' 하는 매우 초보스러운 생각을 가지고 떠난 캠핑 아니 자동차 숙박 여행은 이렇게 더울 때는 밖에서 자는 거 아니라는 훌륭한 교훈을 안고 다음날 아침 눈뜨자마자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나는 비가 없는 곳을 찾아 다녀왔지만 집 근처는 폭우가 쏟아졌다. 화장실에 가려고 불을 켰는데 들어오지 않는다. '전구가 나갔나?' 하고 생각하며 주방의 불을 켜는데 들어오지 않는다. 거실의 불은 들어오고 코드가 꽂혀 있는 전기제품들은 잘 살아있다. 차단기 함을 확인했다. 역시나 차단기 하나가 내려가 있다.

차단기는 다시 올려도 올라가지 않았다. 퓨즈가 나간듯했다. 이것저것 분리해 보기가 취미이고 매뉴얼 공부하기 특기인 나지만 전기 관련된 것을 무섭다. 당장 차단기를 열고 퓨즈를 확인하는 게 겁나기도 하고 전체를 다 내리고 작업해야 하는데 그러면 전기제품들도 다 꺼지기 때문에 세팅해 놓은 거 다 리셋될 거 생각하니 귀찮기도 하다. 그래도 내일 철물점 가서 퓨즈 사려면 어떤 건지 확인은 해야겠기에 큰맘 먹고 전체를 내렸다. 드라이버를 들고 차단기를 여는데 오래되어서 그런지 잘 안 열린다. 몇 번을 시도하다 짜증이나 포기하고 전체를 올렸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려왔던 차단기를 올리니 전기가 들어온다. 퓨즈가 나가지 않아도 내려갔다 안 올라오는 경우도 있구나 하는 새로운 삶의 지혜를 배웠다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후 집에 구축해 놓은 파일 서버가 갑자기 느려졌다. 하드디스크 4개를 사용하는 파일서버는 사진, 음악, 영화 등을 집안의 컴퓨터들과 집 밖에서 핸드폰이나 태블릿, 컴퓨터로 공유할 수 있도록 구축해 놓은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느려졌는데 단순히 파일이 많아져서 느려졌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요즘은 더워서 거실에 자리 펴고 잠을 자는데 아침에 눈을 떴는데 노란 불이 깜빡거리는 게 보였다. 하드디스크 3번에서 들어온 불이었다. 그제야 하드에 문제가 있어서 느렸던 거라는 걸 알아차렸다. 2년 동안 한 번도 문제가 없었던 서버였다. 서버의 로그에는 문제가 있었지만 복구했다고 되어 있었다. 하지만 노란 불은 며칠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고 속도도 개선되지 않았다.

급기야 어제저녁에는 TV를 켰는데 방송 화면이 나오지 않았다.. 인터넷TV의 채널 정보는 화면에 써지는데 영상과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저녁 늦게 들어와서 그걸 알았기 때문에 어떻게 해볼 겨를도 없었다. 아침 알람을 TV를 이용하는데 다음날이 살짝 걱정되었다. 그래도 TV는 켜지니까 화면 밝아지는 걸로 깨야지 생각했다. 그리고 대망의 오늘 아침. TV가 아예 안 켜졌다.

아침에 서버의 하드 디스크를 꺼내 정성 들여 포장을 하고 AS를 보냈다. 센터에서는 한 달까지 걸릴 수 있다고 했다. 웬만하면 한 달을 기다릴 수 있는 내가 아니지만 하드가 워낙 비싸다. 일본은 한번 갔다 올 비행기 표 가격이기에 한 달을 꾹 참아 보기로 했다. TV도 AS 신청을 했고, 인터넷TV도 AS 신청을 했다. 그나마 인터넷은 되니 천만다행이다. 만약 인터넷마저 안되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저녁에 돌아와 인터넷 공유기의 세팅을 확인해 보고 펌웨어를 업데이트해 보았다. TV에서 소리는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인터넷TV는 문제가 아닌 걸로 확인됐다. 인터넷TV AS는 취소했다.

오늘 아침 TV 화면이 완전히 사망하고 나서야 갑자기 요 근래에 이런 일이 몰린 것에 대해 조금 깊이 생각해 보았다. 주변에 무언가 크게 달라진 건 없다. 그저 생뚱맞게 어설픈 캠핑을 생각했고, 폭우가 쏟아지던 날 집을 비웠다는 것 정도?

그때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미리 선주문 해놓았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가 캠핑 출발 며칠 전에 도착했다는 것, 그리고 캠핑 갈 때 가지고 가야지 해놓고 책을 집에다 놓고 갔다는 것이었다. 캠핑을 함께 가지 못한 '기사단장'이 나타나 우리 집의 전기제품들을 그가 가진 단검으로 하나씩 죽이고 있는 것일까?

갑자기 몇 년 전 꽤 오랜 기간 여행했던 중국에서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를 읽고 나서 겪었던 묘한 상황이 떠오르며, 지금의 상황이 나에게 전하는 어떤 메타포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기사단장 죽이기'의 2권 소제목이 '전이하는 메타포'이다.)
중국에서는 그 일이 있은 후 바로 그곳을 떠났는데 지금 이곳도 당장 떠나야 하는 것일까?

아무튼 당분간은 집에 돌아오면 전기제품 확인하는 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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