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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롱올립 Jan 17. 2020

소심한 여행자가 길치일 때 벌어지는 일

  길을 잃고 싶지 않다. 도착한  며칠 동안 남편이 유심카드를 사주지 않아서 부득이하게 밖에서 구글지도를  수가 없다. 비상시를 대비해 떠나오면서 신용카드를 챙겼지만, 독일어를  마디도   모르는 데서 오는 불안함이 크다. 남편이 없으면 사실 뭔가 실수를  것만 같다. 특히 유심카드 같은 것들은 설명을 제대로 듣지 않으면 사용기간이나 데이터를 충전하는 방법같이 중요한 정보를 놓칠   있다. 비겁한 변명이다.   브레멘은 아주 작은 도시라서 남편의 말에 따르면, 우리 신혼집 아파트 단지 정도 크기밖에  된단다. 그러니까 사실 지도가 없어도 조금  돌다 보면 결국엔 쉽게 길을 찾게  거라는 말이다. (이거 혹시 유심칩을 사주지 않으려는 심산인가?)  생각에  정도로 작은  같진 않고, 다만 함부르크나 뮌헨같은 도시들보다는 작은 도시이다. 작정하고 걸으면 하루만에  도시를  둘러볼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우리가 묵는 호텔은 시가지의 정중앙, 길목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동서남북으로 방향을 나누어 계획적으로 도시를 탐험하기에 최적의 숙소이다. 호텔 바로 옆에는  백화점이 있고, 백화점 지하에는 동네 주민들이 자주 들르는 ‘Edeka’라는 식료품점도 있다. 건너편에는 쇼핑점과 커피숍, 빵집, 밥집이 즐비한 아케이드가 있어서 여행자에게는 정말 안성맞춤인 곳이다.

  그럼에도 나는 길을 잃고 싶지 않다. 방향을 헛갈려 두리번거리고 싶지 않다. 괜히  것이 없는데도 여기저기 상점들 사이를 기웃거리고 싶지 않다. 커피를 사거나 점심식사를 해결해야겠다는 특정한 목적없이는  평화로운 도시를 여행자의 신분으로 그저 배회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이제 어느 장소에나 어느 사람에게 귀속되고 싶다. 그것은 여행을 와서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그저 정처없이 호기심을 충족하는 것이 좋았으나, 지금은   차분하게,   느긋하게 마치  곳에 원래부터 속해 있었던  마냥 모든 행동이 자연스러워지고 싶다.  조용한 사람들사이에서 눈에 띄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여기 사람들이 ‘ 여자는 어디서  걸까? 옷차림이나 하는 행동으로 봐서는 관광객같지 않은데? 직업이 뭘까? 여기서  하는 걸까?’라고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사회에 동화되기  쉬울  같다. 그래서 나는 길을 잃고 싶지 않다. 만약 지도가 없어서 길을 모른다면, 차라리 멀리 나가지 않는 편을 택할 것이다.

  어제는 처음으로 동네 산책을 했다. 얼어 죽지 않으려고 몸을 꽁꽁 싸메고 호텔밖을 나섰다. 30분을 가열차게 걸었더니 등에 땀이 살짝 났다. 며칠  남편과 저녁 식사를 하러 가면서 대충 익혀둔 방향으로 길을 잡고 걸었다. 호텔문을 나와 왼쪽으로 횡단보도를 두번 건넌 ,  블럭쯤 직진하면 왼쪽으로 연못이 보이고,  연못  가운데 낡고  풍차가  있다. 거기서부터 다시 직진하여 방향을 살짝 북동쪽으로 잡고 걸으면 이제 브레멘역이 보인다. 역앞에는 평일 대낮인데도 버스를 타고, 자전거를 타고, 역에서 기차를 타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런데 독일은 역시 독일이다. 활기차고 생기있다는 느낌은 없다. 날씨가 쌀쌀해서 사람들은 대부분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아주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적어도   사람들은 대화할때도 목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다. 낮고 빠르게 둔탁한 독일어로   없는 말을 주고 받으며  옆을 스쳐간다. 오후 1시쯤 되었는데 햇빛은 거의 저물어 가는 늦은 오후와 같이 자취를 감췄다. 도시와 거리에 따뜻한 온기가   필요해 보였다. (남편의 독일인 직장동료가 10 만에 날씨가 너무 따뜻하다고 했단다. 나는 천상 부산사람인가 보다.)

 두리번거리지 않고 머리와 발이 이끄는대로 그냥 걸어갔다. 열심히 외워둔 건물들을 기점으로  주변을 한바퀴 크게 돌아볼 계획이었다.  뒷편으로 커다란 공원이 있다고 해서 가보고 싶었다. 독일 사람들은 치아를 드러내고 입꼬리를 올리면서 크게 웃지를 않는  같다. 걸으면서 관찰한 그들은 감정 표현에 조금 인색한  같다. 그냥 다들 바쁘게, 춥게, 어디론가 발길을 옮긴다. 나도 어서 공원을 찾고 싶었다.  뒷편으로  블럭 걸어 들어가니 주택가가 나왔다. 한창 일할 시간이라 사람이  명도 없었다.   사는 동네 같았다. 집들이 발코니와 뒷뜰, 여러개의 층으로 멋지게  지어져 있었고 저마다  세개씩 자전거가 파킹되어 있었다. 자전거도 가격이  나가 보이는 것들이 많았다. 남편이  백칠십 만원짜리 자전거를 보면서, 자전거도 비싼  정말 비싸다는 것을 알았다. 너무 한적해서 조금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갑자기 추위가 느껴져서 공원은 다음에 보자고 생각하고 반대방향으로 주택가를 돌아나왔다. 다시 왔던 길대로  개의 횡단보도를 건너 직진하여 걸으면 호텔이 나오겠지 생각했다.

  이상하다, 똑같이 생긴 건물이 너무 많다. 독일 사람들은  창문을 죄다 병원건물처럼 일렬로 규격에 맞춰서 내었는지, 유리창은  어찌 그리 다들 비슷해 보이는지, 여기 브레멘의 길들은  매끈한 직사각형의 블럭형태가 아니라 모양도 짐작할  없는 다면체 형태인지, 그리고 나는 도대체 ! 독일어를 하나도 배우지 않았는지! 당혹감이  하고 밀려왔다. 정말 쉬운 길이다. 호텔까지   계산상으로는  방향대로  가면 된다. 그라면 다시 우리 호텔이 있는 쇼핑스트리트가 나올 것이고, 익숙한 동물 동상들이 보일 것이다. 일단  거리까지만 가면 브레멘을 상징하는 정겨운 동물 친구들이 나를 맞아줄 것이다. 고민하지 말자. 왔던  그대로 그냥 돌아가면 된다. 그런데 어쩐지  길이 아닌  같다. 이리로 가면    같다. 일단 한번 가보고, 아니면 다시 돌아 나오자! 내가  있는  자리로 다시 오면 된다. 다짐은 쉽게 하면서도 혹시 길을  잃게 될까 두려워서 쉽게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렇게 나는 길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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