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살롱올립 Feb 21. 2020

운전에 대한 항변


운전을 하지 못한다. 아마도 평생 운전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시각장애인인 나에게 운전은 도전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두려움의 영역에 있다. 엄마는 언젠가 무인자동차가 상용화되면 나도 운전을 할 수 있을테니 필기시험이라도 쳐 보는게 어떻겠냐고 말하시지만, 내 생각에 그건 너무나 무책임한 행동이다. 나 하나 편하자고 무턱대로 아무일이나 저지를 수는 없는 일이다. 운좋게 필기시험을 통과한다해도 분명 나 같은 시각장애인에게 실기시험을 칠 자격이 주어질 것 같지는 않다. 저 멀리 신호등도 잘 안보여서 쩔쩔매는 내가 운전을 한다는 건 말이 안된다. 아무리 무인자동차라도 한낱 기계 덩어리만 믿고 눈을 감은 상태로 도로위를 질주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오래도록 건강하고 안전하게 살고 싶다. 인생에 무언가를 꼭 이루어 내야겠다는 욕심은 없지만 적어도 사랑하는 나의 사람들과 조금 더 오래도록 웃으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래서 운전을 하고 싶지 않다. 나에게는 타인의 건강과 안전을 해칠 위험을 무릅쓰고 무모한 모험을 할 권리가 없다. 나 하나쯤이야 운이 없어서 사고를 당한다 해도 그건 내 복이 여기까지 이겠거니, 이건 운명이겠거니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도로 위 통제할 수 없는 가변적인 상황에서 나의 모험심을 충족시키고 타인의 목숨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정말 하고 싶지 않다. 내 삶이 소중하기 때문에 타인의 삶 또한 얼마나 귀한지 어렴풋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운전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은 종종 꿈으로 구체화된다. 스트레스가 심한 날에는 주로 운전하는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나는 운전대를 잡고 있고 도로는 차들로 빼곡하다. 나는 신호가 잘 보이지 않아 패닉 상태에 빠진다. 달려오는 옆 차를 제 때 피하지 못하고 결국 차 선을 이탈한다. 일직선으로 달리는 도로 위에서 나는 사선으로, 옆으로 달린다. 그러다가 앞 차와 충돌하고 연쇄 충돌 사고가 발생하고, 사방에서 펑 펑 터지는 폭발소리가 들린다. 여기 저기서 불길이 치솟고 나는 도로 위의 무법자처럼 운전대를 마음가는 대로 마구 몰아 일단 그 도로 위를 빠져나왔다. 꿈의 마지막은 항상 뉴스 속보 장면이다. “최악의 연쇄 충돌사고가 있었습니다. 어느 미친 여자가 운전하던 차가 낸 사고로 인해 수십명이 죽고 많은 사람이 다쳤습니다. 지금 도로는 아비규환이며 복구는 당분간 불가능합니다.” 뉴스를 보면서 나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 몸을 벌벌 떨고 마음을 졸인다. 경찰에 붙잡히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나로 안해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고통받은 것이 겁났다. 죄책감과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마침내 몸 밖으로 신음이 새어 나올 때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었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이 편한 것이 좋다. 부채감이나 의무감 따위를 내려놓으면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이솝우화의 유명한 ‘여우와 신포도’이야기를 보자. 해결 불가능한 일에 스트레스를 받기 보다는 차라리 ‘그건 애초부터 내가 탐낼 만한 가치가 없는거야.’ 라는 식의 자기 합리화가 강박에서 벗어날 용기를 선물한다. 그러니까 운전은 위험하고 피곤한 일이며 언제든 사고의 위험에 노출되는 일이라고, 그래서 나는 운전을 탐낼 필요도 가치도 느끼지 못한다고 마음을 접어두었다. 게다가 운전을 하려면 돈도 많이 들고 환경에도 좋지 않으니까 사실 득보다 실이 훨씬 많다. 스트레스 원인도 애초에 차단하고 건강도 지키고 병들어가는 지구에도 모래알만큼의 선의를 배푸는 일이니 여러모로 운전을 하지 않는 것이 멋지게 느껴진다.


고백하던데 나는 이렇게 되뇌인다. ‘돈이 있으면 차라리 운전을 하지 말고 운전기사를 고용하자. 운전도 엄연히 노동인데 뭐 하러 에너지와 시간을 들여 운전을 하겠는가. 차라리 나는 남들이 운전해주는 차에 앉아 편하게 책을 읽거나 여유롭게 낮잠을 잘 거야. 튼튼한 이 두 다리로 걸어 다녀도 좋지.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원하는 만큼 딴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지하철에서 밀린 업무를 할 수도 있어. 그런데 운전을 하면 운전대를 잡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못하는 거잖아. 그야말로 시간낭비, 체력낭비, 돈낭비야!’

  다만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주변에 은근히 오지라퍼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나이 서른이 넘고 번듯한 직장도 있고 두 다리가 튼튼한데도 운전을 하지 않고 있다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고 생각해보면 참 좋으련만.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운전의 장점을 피력하며 ‘너도 운전을 꼭 해봐야 한다’는 식의 참견을 받을 때에는 솔직히 아주 난감하다. 전에 한 직장동료가 운전하는 차 조수석에 앉은 적이 있다. 그는 나의 상사였고 나보다 나이도 훨씬 많았고 어쨌건 나는 그의 노동력을 제공받아 편안하게 목적지까지 가는 친절을 받았으니, 진심을 조금 섞은 듣기 좋은 칭찬은 몇 번이고 더 해 줄 수도 있었다. 힘든 일이 아니었다.


“어머, 선생님! 운전을 정말 잘하시네요! 운전을 꽤 오래 하셨나봐요?” 그랬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어메이징하다. “자기야, 자기도 운전을 해. 왜 운전을 안해? 운전을 하면... 인생을 좀 더 독립적이고 주도적으로 살 수 있어. 그리고 그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거야. 주도적으로 사는 거 말야. 운전을 꼭 배워.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에 언제든지 갈 수 있어야 인생이 비로소 자유로워지지 않겠어?” “아... 네... 그렇죠, 하하.” “나는 이 차를 타고 미국을 횡단했어. 우리 남편이랑 애들을 위에 태우고 밤을 꼬박 새면서 미국의 끝도 없는 고속도로를 달렸지. 우리 남편은 운전을 못하거든. 그래서 내가 운전을 다 했지 뭐야. 지금도 우리 남편이 나한테 찍 소리 못하잖아. 내가 운전을 하거든.”


'뭐지? 나는 운전을 못하기 때문에 주도적으로 살 수 없다는 말인가요? 아 그전에, 제가 뚜벅이로 걸어 다니는게 선생님 눈에는 좀 힘들어 보였군요. 남의 일에 참 관심도 많으십니다. 제 인생은 제가 충분히 주도적으로 잘 설계해서 살고 있으니 괜한 걱정은 접어두세요. 그리고 선생님, 실은 제가 시각장애인이예요. 겉으로 티가 잘 안 나서 모르실 수도 있는데, 저 시각장애 5급입니다. 그러니까 운전은 하고 싶어도 못하는 거죠. 참 안타까운 일이예요.’ 확 그렇게 말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때로는 솔직한 것이 최고의 복수가 될 때가 있다. 그 때가 바로 그랬는데, 그런 상황에 놓이면 또 ‘착한 척’ 하는 병이 돋아 상대방을 배려하고 만다.


이런 꼰대들을 배려하는 방법은 그저 침묵하는 것이다. 감당하지 못하는 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아직 감정을 싣지 않고 팩트 그대로만 남겨 나의 장애를 고백할 수 있는 내공이 없다. 그렇다면 나의 말에 돋힐 가시와 자기연민과 과장된 분노로부터 상대방을 보호해 주어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는 표면적으로는 아무 일 없었던 사이, 그냥 그럭저럭 잘 지낼 수 있는 사이로 남을 것이다. 그녀는 그저 운전을 하지 않는 새내기 직장 후배에게 운전의 장점과 필요성을 알려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건 어떻게 보면 꽤 친절한 관심의 표현일텐데 내가 난데없이 신체의 불능을 고백하면 그녀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그녀는 분명 당황할 테고 그녀와 나는 대화의 끝에 오는 관계의 어색함과 버거움을 이 좁은 차 안에서 어디로 피할 데도 없이 견뎌내고 있어야 할 것이다. 나도 그런 어색한 상황에 놓이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 싶다. 상대의 거듭되는 사과를 받는 것이 어색하고 민망하다. 그러다가 결국은 혼자 무엇인가 잘못한 기분마저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반대로 그녀가 미안해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문제다. 어떻게 사람이 자기가 뱉은 말의 파장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건 분명 잘못된 것이다. 내가 당신의 말로 인해 마음이 불편했고 찰나의 번민을 삼키고 결국에는 서로 얼굴을 붉히지 않아도 될 최선의 방법을 찾아서, 이렇게 지극히 개인적인 어려움을 당신에게 고백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서로의 오해를 풀고 관계의 진정성을 회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런데 만약 그녀가 사과는 커녕 공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안하무인에 얼굴 두꺼운 사람이라면? 나에겐 '충고는 당신 몫이지만 인생은 내 몫이니 알아서 잘 살겠다'고 쿨하게 받아칠 베포와 여유가 부족하다. 나는 대신에 서운하고 화가 나서 눈물이 날 것이다. 나의 가볍지 않은 고백이 결코 가볍지 않은 고민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상대방이 알아주길 바란다. 투박한 위로 한 마디면 그걸로 족할 것이다. 내가 나를 내어 보이는 만큼의 용기를 내어 상대에게 마음을 열었다면 상대도 비슷한 마음의 무게로 답해주면 좋겠다. 그래야 우리가 정말 대화라는 것을 할 수 있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온갖 경계를 넘어서서 친구가 될 수도 있을 테니.

  
 그러니까 내가 운전을 하든, 운전을 하지 않든 나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정받고 싶다. 나의 불능에 대해 주눅들지 싶지 않다. 나의 불능을 연민하는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다. 응원도 격려도 필요하지 않다. 선을 넘는 참견은 더더욱 사양한다. 나는 그저 운전을 하지 않는 사람일 뿐이다. 그것은 '오늘 무엇을 먹었고, 누구를 만났고, 날씨는 어떻다' 라는 것처럼 그냥 평범한 일반 명제일 뿐이다. 거기에 감정이 섞이고 호기심이 침범을 하고 동정이 끼어드는 것은 금지한다. 운전을 못한다고 해서 초라하지 않고, 역으로 의기양양하지도 않는다. 대신에 사람들이 나의 태도를 봐주었으면 한다. 내가 슬퍼하는지, 안타까워 하는지, 아니면 정말로 완벽하게 괜찮은지에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번씩 운전을 하고 싶어지는 날에 내가 의기소침해 있으면 누군가 무심하게 ,  어깨를 건드려 주면 좋겠다.  어떤 날에 운전을 하지 않아도 정말 괜찮아 보이는 날에는 ‘그래, 네가 괜찮으니까 그걸로 되었다.’ 말해주면 좋겠다. 나는 운전을 하지 않는 시각장애인이다. 공감은 언제나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참견은, 글쎄올시다.

이전 06화 눈을 감고 보는 공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