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이모의 손에 이끌려 난생처음 신당이라는 곳에 가 본 적이 있다. 5년전쯤 이었던가, 안팎으로 일이 참 안 풀릴 때였다. 엄마가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장기입원을 했고, 남동생은 울산으로 학교를 다녀서 왕래가 거의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졸지에 가장이 된 나를 막내이모는 늘 안쓰럽게 여겼다. 평소 독실한 불교 신자인 이모는 그 날 어찌된 일로 내 손을 잡아 끌고 자신이 잘 아는 용하다는 신당에 가보자고 했다. 평소 무소유, 내려놓음 뭐 이런 불교 관련 베스트셀러 서적을 탐독하던 우리 이모, 맑고 순수한 소녀 감성의 소유자, 그런 그녀가 평소 잘 아는 신당이 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꽤 놀라운 일이었는데, 그 때에는 사는게 힘에 부쳐서 별 생각이 없었다.
집 근처의 지하철역 앞 대로변에 난 작은 철문, 그 위로 빛을 잃은 더러운 간판이 걸려 있었다. 길가에서 건물 안으로 바로 이어지는 좁고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과연 이곳이 그 무시무시한 신당이라는 말인가!’ 하는 생각과는 정반대로 아주 깔끔하게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는, 그래서 심지어 평화로운 분위기마저 감도는 사무실이 보였다. 이모와 나는 두 손을 꼭 잡고 소파에 앉아 앞 손님의 상담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십 여분쯤 흘렸을까, 기다리는 동안 사무실 이곳 저곳을 살펴보았다. 신당은 손님들이 대기할 수 있는 작은 응접실과 안쪽에 신을 모시는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곳곳에 크고 작은 실내용 화분들이 놓여져 있었으나 딱히 관리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밖에도 일상적인 물건들, 예를 들어 정수기, 오래된 책장과 한문이 가득 적힌 낡은 표지의 책들, 복덕방에나 있을 법한 낮은 유리 상판 테이블 등이 얕은 먼지를 안고 있었다.
온통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할 수가 없는 손님이 상담을 끝내고 신당을 나왔다. 그는 코를 약하게 킁킁거렸는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울고 있는지 아니면 단지 코가 가려워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우리 차례였다. 우리는 무당의 안내에 따라 신당으로 들어가 그녀의 맞은편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여기서부터는 사실 긴장이 되고 무섭기도 해서 뚜렷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무당의 생김새는 어땠는지, 신당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 공간의 분위기는 어땠는지 기억해 보려고 노력을 했지만 생각나는 것은 십분 남짓한 짧은 대화가 전부다. 처음에는 단지 건조하고 식상한 말들이 오고 갔다. 나는 이모가 미리 알아오라고 당부했던 생년월일, 출생 시간을 불러주었다. 무당은 이면지를 잘라 만든 건 같은 줄이 없는 하얀 색 종이 뭉치 위에 빠르게 그것들을 받아 적었다. 과연 저 숫자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호기심 반 의구심 반의 마음으로 종이 위에 적힌 숫자들을 쳐다보았다.
이모는 외동아들인 사촌 동생의 장래에 대해 물었다. 무당은 이 녀석이 생활력이 강해서 잘 살 거라고 했다. 당연한 말이었다.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사교성도 좋고 유머감각도 탁월해서 사촌동생은 늘 어느 자리에서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사랑과 관심을 이끌어 낼 줄 알았다. 나는 녀석이 무슨 일이든지 잘 해낼 거라고 확신했다. 흔히 말해 사막에 떨어뜨려 놓아도 자기 살 길을 찾을 놈이었다. 이모는 그래도 자식의 일이라 누군가에게 자꾸만 확인을 받고 싶은 모양이었다. 실은 내가 걱정 되었던 게 아니라 이모가 묻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만만한 나를 데리고 갔던 것일지 몰랐다. 아무튼 이래나 저래나 나도 언제 한 번 신당이라는 델 가 보겠냐 싶어 따라 나섰던 참이라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라도 나를 지리멸렬한 현실에서 잠깐이나마 꺼내어 남들은 어떻게 사는지도 보여주고, 바깥 바람도 쐬어 주곤 하는 이모가 고마웠다. 돈 문제부터 갓 시작한 직장 생활, 편찮으신 엄마까지 신경 쓸 일이 많을 때였다. 그 시절의 나는 살아 있으나 버티는 것은 아니었고, 나사가 열 개쯤 빠진 채로 그냥 그 자리에서 존재하는 목각인형 같았다. 어서 빨리 시간이 흘러 이 모든 골치 아픈 일들이 다 해결되기를 바랬다.
그녀는 내가 훗날 내 명의의 건물 두 채를 가지게 될 것이며,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을 거라고 말했다. 나중에 이 얘기를 전해 들은 우리 엄마는 미래에 큰 부자가 될 딸의 창창한 앞날을 그리며 매우 기뻐하셨다. 건물 두 채에 은행 빚은 얼만지, 임대료는 꼬박꼬박 잘 들어오는지, 상권은 좋은지 따지고 보면 요즘 세상에 건물주가 그리 좋은 것만도 아니다 싶다. 신경 쓸 것도 많고 세상물정에도 밝아야 하니 나랑은 참 안 맞는 직업이다. 나는 셈하고 관리하는 것에는 영 소질이 없다. 하지만 건물을 두 채나 가진 사람이 된다는 무당의 말이 싫지 않았다. 당시 나는 법원에서 개인회생 절차를 밟아 수년째 가족의 빚을 갚아 나가고 있었는데, 많지 않은 공무원 월급에 한달에 칠십 만원씩 꼬박꼬박 돈이 나가는 것이 젊은 가장에게는 큰 일이었다. 그래서 언젠가 지금의 빚을 청산할 날이 올 것이며 착실히 돈을 모아서 나중에는 결국 잘 살게 된다는 말이 비록 기약 없었지만 위안이 되었다.
“제가 혹시 실명을 하게 되지는 않나요? 나이가 들면 시력이 떨어지니까, 늘 그런 걱정이 되더라구요. 실은 제가 시력이 많이 안 좋아서요.” 이런 순간이 오면 꼭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미래를 점칠 수 있다는 사람에게 우리가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은 그가 제일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무엇이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 내가 가장 열망하는 것은 다름 아닌 건강한 삶이었다. 그래서 불쑥, 그런 질문을 했나 보다. 무당은 잠깐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몇 초간의 침묵이 흘렀고 그녀는 사뭇 진지한 눈빛을 하고 말했다. “장애수라는 게 있어. 근데 지금은 그런 게 안보이네. 아무것도 안 보여. 실명하고 그럴 것 같진 않은데?” “아, 진짜요? 정말 실명은 안하는 거예요?” “어, 실명은 안해. 그건 걱정은 안해도 돼.” 무당은 다시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종합해보면 나는 훗날 단란한 가정을 꾸릴 것이며 부자가 될 것이고 건강하게 살 것이다. 완벽한 결말의 삶이었다.
그 후로 몇 년이 흘렀다. 나는 정말 무당의 말대로 결혼을 했고 임신을 했다. 첫 아이의 성별은 남자라고 했다. 학자금 대출을 비롯한 각종 채무는 깨끗이 정리되었고, 얼마전에는 대출을 끼고 도시 외곽에 작은 땅도 하나 샀다. 여유롭지는 않지만 부족하지 않을 만큼 돈을 벌고 엄마도 건강을 되찾으셨다. 남동생은 좋은 직장에 취업을 했고, 시어머니와 남편의 누이도 좋은 분들이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내 시력은 더 이상 나빠지지 않았다. 얼마전에 큰 안과병원에서 몇 십 만원 어치 거금을 들여 정밀검사를 했다. 장애등급을 더 높여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지금보다 더 높은 장애등급을 받으면 정부에서 받을 수 있는 혜택도 더 많을 것이고, 장애 판정을 받은 지도 어언 20년이 흘러 사실상 재점검이 필요했다. 검진결과는 기대와 달리 ‘심하지 않은 정도의 경도 시각장애’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장애등급은 상향조정되지 않았다. 아까운 병원비를 날렸지만 소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덕분에 나는 내 시력이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무당이 정말 용한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눈치가 빨라서 상황에 따라 대충 넘겨 짚어 말하는데 맞히는 확률이 높았던 건지, 그것도 아니면 주로 듣기 좋은 얘기를 몇 마디 해주면서 손님의 환심을 사는 영업전략을 쓰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처음부터 무당의 말은 듣지 않아도 좋았고 신경을 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결국 인생사 순리대로 흘러가는 것이니. 얽힌 매듭은 풀리기 마련이고 풀 수 없는 문제는 싹을 잘라내면 그만이다. 무언가 잘려나간 자리에는 새 살이 돋아날 것이다. 씨앗은 제 스스로 돋아나려 노력하지 않아도 떨어지는 빗물과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면서 조금씩 싹을 틔울 것이다. 죽을 만큼 아프고 힘든 일도 결국엔 지나간다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불행한 삶도 없으며 반대로 끝까지 행복만 가득한 삶도 현실에는 없다. 삶은 희노애락이 복잡하게 뒤엉켜 무엇 하나도 정의할 수 없다. 그래서 어떤 방향으로 살게 될 것인지 점치고 예견하는 일은 정말이지 부질없는 일이다.
그러나 때때로 이 뻔하디 뻔한 무당의 말이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모든 일이 잘 될 거라는 그녀의 말이 기억 한 켠에 남아 문득 마음이 고요한 순간에 까닭없이 위로가 된다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면 나는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천진난만하고 순수했던 어린 시절, 장난감 요술봉을 들고 힘차게 공기를 가르며 큰 소리로 떠들어대던 공주 옷을 입은 예쁜 소녀의 세상으로 간다. 그 세상에서도 무서운 것은 많았지만 몇 밤 자고 나면 금새 그 두려움은 잊히고 나는 다시 요술봉을 흔들며 골목을 누비고 인형놀이를 하면서 공주가 되고, 왕자도 되고,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었다. 착한 사람의 눈에는 없던 사탕도 보이고 엄지공주가 풀잎 사이를 폴짝폴짝 뛰어 다니고 12월엔 빨간 루돌프와 하얀 산타할아버지도 만날 수 있는 그런 세상이었다.
잘 될 거라는 말, 모든 것이 괜찮을 거라는 말에는 엄청난 힘이 있다. 비록 검증할 수는 없지만 그런 말들은 기분을 좋게 한다. 그리고 정말이지 그대로 믿어버리고 싶다.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듣는 것도 좋고, 내가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되는 것도 좋겠다. 증명할 수도, 책임짌 수도, 주워담을 수도 없는 말들이지만 나는 그런 말들을 남발하는 사람들이 가득 찬 세상을 상상해 보았다. 그 곳은 모두가 모두에게 밝고 희망찬 미래를 장담하는 세상이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으며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인다고 굳게 믿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이다. 무책임해 지기로 결심한 김에 나는 그런 세상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기로 했다. 그래서 내 인생도, 당신의 인생도, 우리 모두가 함께 사는 이 세상도 결국엔 잘 풀릴 거라고 말하기로 했다. 당신이 내 말을 믿었으면 좋겠다. 왜냐고 묻지 말고 그냥 믿어주면 좋겠다. 우리 모두는 결국 괜찮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