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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롱올립 Oct 24. 2021

빗속에서


몇 해전 여름, 영국의 스톤헨지를 여행한 적이 있다. 인생 첫 홀로 여행을 외국에서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갑작스레 마음이 동했다. 기억에 남는 여행지를 꼽으라고 하면 늘 그 장소를 떠올렸다. 더 아름다운 곳도 많이 가보았지만 이상하게도 가장 마음에 남는 여행지는 매번 그곳이다. 우중충하고 습한 날씨와 축축하게 젖은 옷가지들, 맛없는 값싼 샌드위치, 혼자 찍던 어색한 셀카가 기억난다. 길을 헤매어 배회하던 교회 앞 광장과 여행자센터의 더러운 벤치들, 온갖 땀냄새와 젖은 옷의 습기로 가득 찬 버스, 언덕 위로 끝없이 늘어선 여행자들의 행렬, 그리고 마침내 마주한 황량한 돌기둥들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모두 선명히 떠오른다.


나로서는 이렇게까지 잘 기억을 한다는 것이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기댈 곳 없이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해야 했기에 여행 내내 긴장을 한 채로 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많은 것이 마음에 남았나 보다. 나는 시력이 좋지못한 탓으로 사물을 흘려 보고 주의를 기울여 관찰하지 않는다. 자세히 보아도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는 행위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저 멀리 들판을 따라 달리는 기차를 볼 때 나는 그저 '아 기차가 가는구나' 할 뿐이다. 저 기차가 새마을호인지 무궁화호인지 KTX인지 가려낼 필요가 없다. 어차피 잘 안 보여서 구분할 수가 없다. 옆에 앉은 이가 친절하게 기차의 생김새에 대해 설명을 덧붙이면 '아 그래?' 하고 만다. 무신경하고 무례하게 보일 수 있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달리 내가 무어라 할 수 있겠는가. 안 보이는 것을 거짓으로 아는 체 하는 건 내키지 않는다.


나는 런던에서 곧장 스톤헨지로 향하는 길이었다. 런던에서는 함께 할 일행이 여럿 있어서 큰 걱정을 하지않고 다녔다. 일행들은 런던에 며칠 더 머물고 싶어했고 나는 이미 여러차례 런던을 방문했던 터라 구미가 당기지 않아 혼자 먼저 떠나기로 했다. 몇 달을 숙소로 묵고 있던 곳은 런던에서 기차로 두시간 남짓한 작은외곽 도시였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인데 그 날 아침은 유독 날씨가 맑았다. 햇빛은 화창하고바람은 선선하고 하루 종일 비는 절대 올 것 같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그 길로 곧장 스톤헨지행 기차표를 끊었다. 믿을 것은 손 안에 작은 휴대폰 하나뿐이었지만 인터넷만 잘 터지만 길 찾는 건 워낙 쉬운 세상이니까 크게 걱정이 되지 않았다.


첫번째 과제는 기차역에서 짐을 보관하는 것이었다. 당시 쇼핑을 좀 한 터라 가져간 케리어에 짐이 가득 들어찼다. 스톤헨지까지 가는 버스는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로 늘 붐볐다. 사고의 위험도 줄이고 변덕스러운 영국 날씨에 고생을 줄이려면 케리어를 기차역에 보관해야만 했다. 스톤헨지 행 투어버스는 작은 시골마을 솔즈베리역 앞에서 출발하는데 역사 내에 따로 짐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찾아낸 정보에 따르면 기차역에서 곧장 나와 길 건너편에 작은 술집이 있는데 낮에는 손님이 거의없어서 여행자들의 짐을 맡아준다고 했다. 술집 유리창에 영어로 '짐 보관 가능' 이라고 적혀 있으니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역사에서 불과 1미터 남짓한 거리에 보관 가격도 저렴해서 안성맞춤이겠다 싶었다.


나는 호기롭게 선글라스를 장착하고 솔즈베리역을 나왔다. 역 앞에는 이미 투어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여럿 있어서 정류장이 어디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오케이, 버스는 저기서 타면 되겠고 빨리 짐만 맡기고 얼른 줄을 서야지' 나는 역사 앞의 작은 횡단보도를 건너 미리 알아 둔 방향대로 곧장 걸으며 술집처럼 보이는 가게의 간판들을 유심히 살폈다. '짐 보관 가능, 짐 보관 가능'을 중얼거리며 상점들의 유리창에 붙은 글귀들을 읽었다. 예상했겠지만 이미 뭔가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고 있었다. 1미터는 훨씬 더 멀리 걸어 온 것 같은데 여태껏 짐을 맡아 준다는 안내문구가 적힌 술집은 본 적이 없었다. 창문에 고개를 들이밀고 하나하나 자세히 보았으니 도중에 놓치고 지나쳤을 리도 없었다.


대여섯 개의 상점 앞을 수십 번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어느새 한시간이 흘렀다. 장사가 안되는 오래된 술집이 하나 있긴 했는데 밖에서 보니 안이 너무 어둡고 카운터에 직원도 없어서 문을 닫은 것 같았다. 삐질 새어 나오는 땀을 훔치며 나는 다시 길을 건너 역사 앞으로 돌아왔다. 내 처지에 혼자 여행을 하겠다고 한 건 역시나 무리였다고 자책을 하면서 자포자기한 상태가 된 나는 홧김에 핸드폰 화면의 검색창을 탁탁 두드렸다. 신경이 곤두서는게 느껴졌다. 이렇게 간단한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내가 어이없으면서도 가여웠다. 그러는 사이 또 한 무리의 여행객들을 태운 버스가 출발했다.


벌써 여러 번 버스가 떠나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았다. 초조하게 정류장을 배회하는 동안 여러 명이 나를 힐끔거렸다. 그 중엔 역시 혼자 여행하는 것 같은 키 큰 외국 남자도 한 명 있었는데 아까부터 내게 말을 걸려고 기회를 보는 중인 것 같았다. 그가 내 쪽으로 다가오려고 몇 번 몸을 기울였지만 이내 내가 지금친구를 사귈 형편이 못 된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결국 투어버스와 함께 떠나갔다. 그도 그럴것이 나는 아까부터 미간에 주름을 잔뜩 구긴채로 신경질적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들과 함꼐 여행 온 듯한 금발의 외국인 아저씨도 기억난다. 그는 버스에 오르려다가 반쯤 몸을 돌리고서 혹시 도움이 필요한 거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절박한 눈빛을 보내며 짐을 보관할 장소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바로 맞은 편에 땡땡이라고 적힌 간판 보이지?"

"……..예스?"

"너….. 정말 저거 보여? 저기 있잖아. 큰 글씨로 땡땡이라고 적힌 가게말야. 거기에 맡기면 되."

"아…… 죄송하지만 좀 더 자세히 설명해줄 순 없나요? 내가 시력이 좋지 못해서 말예요."

"노,노. 멀리 말고 바로 저 앞에 저기! 저기 저 간판! 보이지?"

"노…….우"

"….. 오 마이 지저스……"


그는 무서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황망하고 놀란 얼굴이 되었다. 오 마이 지저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아무튼 그 사람 말에 따르면 저 길 건너 몇 안되는 가게 중에 짐을 맡아주는 데가 반드시 있기는 하다는 거니까 일단 안심이 되었다. 나는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다짐하며 가게들의 문을 하나씩 두드렸다. "혹시 여기 짐을 맡아 주시나요?" 이내 곧 폐업할 것 같은 분위기의 오래된 술집에서 짐을 맡아 준다는 걸 발견했다. 여러차례 그 가게 앞을 지나쳤는데 유리창에 안내문구가 없어 들어가 볼 생각을 미처 못했다. 사실 술집이 그 가게 하나 뿐이라 진작에 물어보고 답을 구했더라면 시간도 아끼고 쓸데없는 자책으로 여행 초반부터 진을 뺄 일도 없었을 것이다. 뭘 잘 모르겠으면 무작정 부딪히고 볼 일인데 나는 그게 참 쉽지 않다. 새로운 곳에 오면 오래된 나를 벗어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관성은 극복하기 어렵다. 공들여 의식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살아온 대로 저도 모르게 살아가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렇게 과거에 끌려가듯이 살지 않으려고 여행도 오고 모험도 하고 새로운 인연도 만나려는 건데 나를 바꾸는 것은 그리 쉽게 돈 몇 푼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투어버스에 오르고 나서부터는 어려울 것이 없었다. 여행자센터에서 곧장 인파에 휩쓸리는 데로 발길을 돌리니 어느새 스톤헨지앞에 도착했다. 센터에서 스톤헨지까지는 중간에 방향을 헛갈려도 그저 사람들이 더 많이 가는 쪽으로 길을 잡으면 되었다. 눈치껏 살아온 세월의 짬빠는 아주 동물적이고 직관적으로 발휘된다. 나는 단체로 체험학습을 나온 듯한 수십 명의 학생들 무리 뒤를 쫓았다. 그들은 중간에 다른 곳으로 길을 새지 않고 곧장 스톤헨지로 향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그룹이었다. 여행자센터의 뒤뜰 벤치를 점령하고 앉아 도시락을 까먹으며 선생님의 장황한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그 아이들을 발견했을 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세계 어느 곳이나 아이들은 무리 지어 모이면 말이 많고 정리정돈이 안되고 어른들의 말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 만국 공통이었다. 아이들이 도시락을 먹는 동안 기념품 샵에서 작은 샌드위치와 물 한 명을 샀다. 나는 아이들이 놓칠 새라 허겁지겁 빵을 집어 삼켰다.


스톤헨지에는 관광객이 가까이 다가갈 수 없게 먼 발치에서 넓게 펜스가 쳐져 있었다. 얕은 언덕 위에 거대한 돌덩이들이 기괴한 형상으로 우뚝 솟아 있는 광경이 시공간을 초월한 듯한 이질감과 경외심을 자아냈다. 나는 천천히 텅 빈 들판을 둘러 보았다. 아침에는 분명 멀쩡했던 하늘이 어느새 먹구름을 잔뜩 몰고와 있었다. 한낮이었지만 흐린 날씨 탓에 멀리까지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 안개같이 뿌연 것이 언덕 너머로 얕게 깔려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 뿌연 기류의 정체가 무엇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나는 줄이 쳐진 울타리를 따라 돌기둥 주변을 크게 원을 그리며 거닐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배낭에 있던 우비를 꺼내 입었고 부착된 모자에 빗방울이 부딪히며 후두둑 후두둑 둔탁하고 무거운 소리를 냈다. 내리는 비를 피하지 않기로 작정하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언덕을 두 세 바퀴쯤 계속 돌았더니 황량하고 낯선 풍경도 차츰 익숙해지고 편해졌다. 혼자 여행 온 사람은 찾기 드물었다. 엄청나게 무거워보이는 대포만한 카메라를 어꺠에 둘러매고 여러 각도에서 연신 사진을 찍어대는 남자가 유일했다. 사람들은 함께온 연인이나 가족, 친구들과 함께 돌기둥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나는 홀로 외롭고 용감무쌍한 방랑자가 된 것 같아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투어를 마치고 솔즈베리역으로 돌아오니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미리 끊어놓은 기차시간까지 약간의 여유가 있었고 혼자 온 여행의 만족감을 조금 더 즐기고픈 마음이 들어 마을에서 꽤 유명한 교회를 들르기로 했다. 구글맵을 따르면 도보로 20분 남짓한 거리였으니 가는 길에 마을 곳곳을 둘러보아도 시간은 충분했다. 네이게이션 기능을 켜 둔 채로 거리를 걸었다. 가는 길에는 사거리도 나오고 인적이 드문 둑길도 지났다. 쓰레기봉투를 들고 느릿느릿 걸어가는 사람과 길가 벤치에서 멍하니 쉬어가는 사람, 신호 대기중에 차창밖으로 퉁명한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인상을 구기던 사람을 보았다. 교회앞에는 커다란 잔디 광장이 있었는데 피크닉을 온 듯 먹을 것을 한가득 꺼내놓고 입을 오물오물 거리는 사람들과 엎드려 책을 읽는 이도 보였다. 한가롭고 평화로운 일상의 풍경들이었다. 교회는 작고 비교적 조용했다.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지고 흘러내리고 여러 새들과 동물들, 사람들의 손떼로 낡아버린 건물 벽을 따라 걷다가 아담한 중정을 발견했다. 커다란 아치형의 창문 모양으로 사면을 디자인한 정원의 한가운데는 네모난 꽃밭이 있었다. 해질녘의 노랗고 시린 빛이 꽃밭에 쏟아져내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에 몸을 실으니 잠이 쏟아졌다. 지금부터는 곧장 집까지 내려야 할 역과 돌아갈 길을 잘 알고 있어서 사실상 여행은 이제 끝난거나 다름이 없었다. 잠을 쫓으려고 그 무렵 즐겨듣던 영국 가수 아델의 노래를 틀었다. 따뜻한 노래와 축축하고 매서운 날씨, 해질녘의 풍경이 어우러졌다. 귓 속 이어폰으로 비에 관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거센 비 바람이 당신의 얼굴을 스치고, 저녁이 지고 별이 떠오를 때에 지구 끝까지라도 달려가서 너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거야' 낭만적인 가삿말이었다. 숙소로 묵고 있는 홈스테이 집 거실 벽에도 비에 관한 문구의 액자가 걸려 있던 것이 떠올랐다. '나는 폭풍우속에서 비가 그치를 기다리지 않겠어. 그 대신 빗속에서 춤추는 법을 알려 달라고 말할거야' 내리는 비를 한껏 맞았던 날에 비에 관한 아름다운 노래를 듣고 비에 관한 멋진 글귀를 떠올리는 상황이라니, 우수에 젖은 나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물응 왕창 머금은 수채화같은 풍경들이 휙휙 지나갔다.


뜨끈한 물로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우니 밤 10시를 막 넘긴 시각이었다. 환기를 위해 늘 열어두던 천장의 작은 창문이 여전히 열려있었다. 나는 까치발로 침대를 밟고 올라서서 주인 집 아저씨가 준 긴 막대기로 창문을 힘껏 끌어당겼다. 어쩐지 오늘은 보슬보슬 비를 맞으면서 자는 것도 운치있고 좋겠다고 장난삼아 생각해보았다. 비를 즐기는 여러가지 방법 중에 분명 제일 미친 짓일테지만 오늘 밤이 가기 전까지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내일이 되면 다시 현실로 돌아가 버릴 것을 아는 마법에 걸린 동화 속 주인공을 상상했다. 정말 동화같은 하루였다. 빗속에서 춤을 추진 못했지만 이 정도면 노래도 부르고 리듬도 타보고 달리기도 해본 셈이었다. 비가 똑똑똑, 영원처럼 내리는 밤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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